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40화 (339/489)

#340

끝의 시작 (2)

정신이 하나도 없는 이 산만한 인물도 오랜만에 보니 조금은 반가웠다.

클레이오는 친구들의 등을 두드려 얼른 수도방위대로 복귀하도록 하고, 자신은 에즈라가 타고 온 세르게프 가문의 마차에 올라탔다.

“일단은, 이렇게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봉쇄령 동안에는 별일 없었습니까?”

“그, 뭐냐, 비바람 불고 난리 났다는 날 나는 큰형이 불러서… 집에 가 있었어가지고~! 아레미스랑 다리아랑 우리 집에 며칠 있다가 중간에 형 올 때 같이 마차 타고 돌아왔어! 호위역! 호위역으루 말야.”

눈치라곤 없는 에즈라가 어떻게 화를 피했나 했더니, 페텐카 세르게프가 미리 손을 써 동생과 측근을 빼낸 거였다.

‘안 그래도 페텐카가 뭔가 했단 얘길 들은 거 같은데, 호위 핑계로 수도에 와서도 동생을 딱 끼고 있었군. 일처리 확실해.’

“다행입니다. 그럼 레이디 디오네에게도 별고 없고요?”

“물류! 물류 땜에 지금 그레이어 상회 일이 정신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내가 후배님 데리러 온 거야!”

해맑은 에즈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지 제법 발랄하게 이것저것 수도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으어어―, 형이랑 같이 수도 돌아왔을 때 왕세자가 길가에다가 무슨 기계를 달고 라디오 방송이란 걸 했는데, 듣고 있으니 정신이 멍해지고 머리가 띠잉! 해서 내가 갖고 있던 밀랍 녹여서 귀 막게 했어. 다리아랑 아레미스 귀도 꼭꼭 막아버렸지. 다들 성질을 팍팍 냈는데, 나중엔 고맙다고 하더라!”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항구랑 기차역에서 물자가 썩어간다고 난리난리던 사람들이 그 연설 두 번 듣고 나니 싸아악 흩어져갖고, 완전 신기했어!”

클레이오는 고양이의 잔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므에에에에엥. (멜키오르 놈이 이제는 아주 날뛰게 됐구나.)”

“역시 스킬을 쓴 거겠지?”

속으로만 생각을 한다는 게 상대가 에즈라다 보니 말로 나와 버린 모양이었다.

“엉? 스킬? 무슨 스킬?”

클레이오는 대충 상황을 뭉갰다.

“아, 아닙니다. 제 말은, 밀랍으로 귀를 막은 건 정말 훌륭한 대처였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거였습니다.”

“므웨에에에에엙.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지.)”

고양이의 독설을 못 알아듣는 에즈라는 클레이오의 열없는 칭찬에도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했다.

“그치? 그치그치? 형도 웬일로 내가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고 칭찬해줬어!”

“네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이후로도 혼자 신나 떠들던 에즈라는 마차가 왕의 공원 근처에 접어들 무렵, 오늘 클레이오의 마중을 맡은 진짜 이유를 드러냈다.

“후배님, 후배님, 아까 나한테 고맙다고 그랬지?”

“네. 직접 나와 마차까지 내주셨는데 감사하지요.”

“그럼 말야, 다음에 또 파티 열 때 꼭 다시 초대해 줘야해. 응? 이번엔 진짜 디오네랑 춤추고 싶어~!”

‘뭔 얘길 하나 했더니.’

클레이오는 어이가 없어서, 기대하듯 고개를 쭉 뺀 에즈라를 빤히 쳐다보게 됐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지고, 뺨은 기대감에 달아오른 분홍빛이었다.

파티를 여는 건 어렵지 않으나 디오네가 그와 한 번 더 파트너를 해 줄지는 본인의 말을 들어봐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클레이오는 굳이 그 생각을 입에 담진 않았다.

세상이 다 뒤집힌 판에 저런 소릴 하고 있는 점이 에즈라다워서 어쩐지 긴장이 풀렸다.

클레이오는 철모르는 어른 애를 타박하는 대신 픽 하고 웃기만 했다.

신의 쓰임 속에 새겨진 이들 가운데 한 명 정도는 이렇게 나사 빠지고 편한 사람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사명을 몰라서 자유로우나, 어쨌든 실력만은 일류인 6레벨 마법사의 호위를 받으며 클레이오는 아세르 저택에 당도했다.

.

.

.

아세르 저택 앞마당에는 사용인 절반 정도가 나와 있었다.

클레이오는 당황해 표정이 굳어졌다.

전화를 받았으니 캔튼 부인 정도는 책임감에 저택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았을 줄은 몰랐다.

“왜 다들 콜포스로 안 가고 여기에 있는 겁니까? 마수가 출몰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여길 두고 떠나라고 제가….”

클레이오의 눈길이 운전사인 미라를 찾았다.

캔튼 부인 뒤쪽에 선 미라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캔튼 부인은 미라를 감싸듯 한 발자국 나서 클레이오에게로 다가왔다.

“그런 말씀은 마세요. 여기가 도련님의 집인데 책임자인 제가 어딜 떠나나요. 그렇잖아도 자녀나 배우자가 있는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보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의지로 남아 도련님을 기다렸던 거예요.”

미라도 모자를 벗어들며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도련님.”

미라의 어깨를 살짝 감싸주며 캔튼 부인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걱정하시는 마음도 알겠지만, 날뛰던 지진 지룡은 수도방위대로 복귀한 기사님들이 다 처치하셨습니다. 여기 저택 주변은 스웨인 템플 경이 직접 와 주시고, 도련님 소식도 물어보더군요.”

물꼬를 트자 다들 기다렸단 듯한 마디씩을 더했다.

“잘 돌아왔어요, 도련님.”

“무사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남은 사람 중에는 트리스테인 출신 요리사인 가엘도 있었다.

머쓱한 얼굴로 환영 인사를 듣던 클레이오의 귀에 최고로 반가운 소리가 쏙 꽂혀 들었다.

늘 무덤덤한 얼굴인 가엘의, 역시나 무덤덤한 목소리를 타고 들린 희소식이었다.

“새로 담가 둔 배추절임도 마침 알맞게 맛이 들었습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블러드 소시지 스튜도 끓여 뒀습니다.”

클레이오의 발치에 서서 수염을 뽀실뽀실 움직거린 베헤못이 부엌 쪽으로 고개를 빼고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내 만족스런 울음소리를 냈다.

“웨우우우우우우웅우웅.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소리다.)”

“그러면, 식사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엘 씨.”

.

.

.

“흐어어어어.”

푹신한 침대, 보송하게 관리된 시트에 뺨을 묻고서 클레이오는 귀가의 기쁨을 만끽 중이었다.

고작 몇 주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기분상으로는 몇 년 만인 것만 같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아이고야, 집이 최고구나, 집이 최고야.”

수도는 난리통인 데다가 대낮인데도 창밖은 밤이라 집 안은 전깃불을 밝혀야 했지만, 그게 대수일까.

침대에 엎어져 있는 클레이오의 등을 거대묘가 꾸욱꾸욱 눌러댔다.

“식사 시종아, 빨리 본분을 다해라. 그동안 본묘의 혀에 맞는 와인을 영 맛보질 못했으니, 저걸 얼른 따라 보아라.”

“어어, 어어어… 아직 향 덜 올라왔는데.”

“멍청한 것! 접시에 따라 두면 금세 향이 올라올 것 아니냐! 빨리!”

“넵.”

클레이오는 사랑해 마지않는 아세르 저택의 와인 셀러와 재회한 기념으로 베헤못과 함께 주교의 탑 그랜드 빈티지를 땄다.

아직은 향이 안 올라와 잠시 기다리던 것을, 고양이의 재촉에 얼른 쪼르르 따랐다.

고양이 물그릇에 펼쳐진 와인은 온 방 안을 과실과 꽃의 향기로 채웠다.

찹. 찹찹찹찹찹.

고양이가 혀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와인을 짭짭 삼키고, 클레이오도 그에 질세라 제 잔을 채웠다.

아끼면 뭐 된다는 격언에 따라,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지진 지룡에 의해 끝장날 뻔했던 지하 셀러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아직 덜 열린 첫 잔을 머금었다.

“아.”

이 맛이었다.

옅은 떫은맛이 혀에 남아 있는 동안 클레이오는 얼른 스푼을 들었다.

딱히 어울리는 안주는 아니지만 그냥 먹고 싶어서, 가엘이 끓여 뒀다는 트리스테인식 블러드 소시지 스튜와 시게 절인 양배추 스튜도 듬뿍듬뿍 떠먹었다.

살짝 시어 새콤하게 톡 쏘는 펜넬향 백김치도 더하니 참 좋았다.

이 경우에는 마리아주가 좋아서가 아니라, 일종의 고향의 맛을 맛보는 즐거움이었다.

‘이게 바로 지상의 홍복이요, 기쁨이지.’

***

배를 든든히 채우고, 따듯한 물을 받아 베헤못과 한참 참방거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어난 다음 날.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이 다려둔 여름 정원의 케이프 코트를 차려입고서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수도방위대 학교로 향했다.

교정은 한산했다. 학생들과 교사진마저 모두 마수 진압 지원에 나선 탓이었다.

제베디의 결계에 의해 보호받는 학교 안은 지진 지룡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어 땅이 판판하게 온전하고, 건물 벽에 금이 가거나 기둥이 기운 구석조차 없었다.

그러나 학교가 안전해도 수도 전체가 안전하냐면, 그렇지가 않았다.

클레이오는 다시금 어두운 하늘을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하늘이 점점 더 시커멓게 어두워지는군.’

‘그림자 낙진’은 당장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마수였다.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고 기온이 점점 내려가는 데다 수도 주변의 식량 작황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나서서 대책을 강구하는 높은 분이 하나도 없었다.

수도의 상황은 복잡했다.

엄청난 수의 지진 지룡을 상대하느라 수도방위대는 전시 상황에 준하는 체제로 돌아갔다.

해산된 평민원을 재건하라는 요구는 당장의 위기 앞에서 우선순위가 밀렸다. 멜키오르가 두문불출하는 지금, 실세로 떠오른 쥴레이카가 평민원 재건을 원치 않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벤자민 비튼 의장은 몇 번이나 암살 시도를 받은 탓에, 혼란스러운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피살된다고 해서 새 평민원 의장을 선출할지 어떨지가 불분명한 시국이었다.

‘아슬란에게 한참 유리한 상황이 됐군. 멜키오르는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클레이오는 두 갈래의 예측을 했다.

1. 멜키오르는 오래도록 경감을 받지 못한 탓에 고통에 침식당하고 말아,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이다.

2. 아슬란의 정치 공세에 대항할 만한 수를 준비하며 반격의 적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두 번째라는 생각이 들어.’

멜키오르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자가 어리석은 행동을 자처한다면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봉쇄령의 강행과 평민원 무력 해산은 누가 해도 원성을 들을 행위였어. 어차피 아슬란도 그러고 싶어 하는데, 놈이 하도록 두었다면 그에게 비판이 쏠렸을걸.’

심지어 비튼 의장은 본래 멜키오르 지지파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있지만 그가 얼마나 쓰디쓴 마음으로 칼을 갈고 있는지는, 비튼 의장을 호위하는 첼의 부하들조차 알 정도였다.

클레이오가 짐작할 만한 사안이라면 멜키오르 역시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쥴레이카는 평소 멸시하던 평민원의 개입은 배제한 채, 크뤼엘 공작을 위시한 귀족 세력을 호령하며 멜키오르를 왕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들었다.

폐위가 아니라 즉위 자체가 무효임을 증명하는, 보다 근본적인 조처였다.

클레이오는 은은한 숙취로 띵한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골 때리네.’

작금의 상황은 원고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이쯤이면 8교에선 아슬란이 군대를 이끌고 알비온을 침공하고도 남았을 시점인데.’

지금 아슬란은 동남수비군의 정예를 이끌고 나타나 수도의 구원자를 자처하며 지진 지룡을 무찌르는 참이었다.

솨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낮게 부는 바람이 차갑게 클레이오의 머리를 헤집었다.

클레이오는 오랜만에 다시 갖춰 입은 여름 정원의 케이프 코트를 꼭꼭 여몄다.

케이프가 아니었다면 뼛속까지 얼렸을 냉기였다.

그림자 낙진의 일렁임 속에서 구름은 사납게 파도치고, 마치 하늘에서부터 풍랑이 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어두운 하늘로 시선을 고정한 클레이오는 이곳이 해도가 없는 바다, 오디세우스가 내던져졌던 자줏빛 파도의 한복판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해를 막아 놓으니 계속 기온이 떨어지잖아. 일단 저걸 처리해 놓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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