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41화 (340/489)

#341

끝의 시작 (3)

기사들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지진 지룡’을 잡는 데 여력을 낭비할 필욘 없었다.

아침에 슬쩍 연통을 넣어 보니 아서와 첼, 이시엘 역시 감봉과 격오지 발령 이상의 처분 없이 그대로 근교의 마수 퇴치 작전에 파견되었다.

‘아슬란 놈도 설치고 있고, 아서도 힘을 쓸 테니 지진 지룡은 문제가 안 돼. 하지만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는 놈들은 다르지.’

그림자 낙진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진격의 원]을 날릴 수 있는 상급 검사가 되어야 했는데, 그나마도 떠 있는 높이가 너무 높아 큰 효과가 없었다.

첼의 고유 스킬을 써 아서와 함께 창공에 올랐을 때 직접 검에 일으킨 검기로도 마수를 갈라보았다. 에테르에 의해 눅진하게 뜯겼다가도 이내 다시 들러붙는 꼴이 꼭 시커먼 타르 같았다.

‘아서가 해도 안 되는데, 저놈들을 검으로 어떻게 처리하겠어.’

바로 그래서, 클레이오는 제베디에게 긴히 연락을 취하고서 학교에 온 것이었다.

애초에 항명한 적이 없어 처벌받을 이유도 없고, 공식적으로는 내내 수도에 머무르며 아세르 저택에서 요양 중이던 그였기에 거취에 제한이 적었다.

‘아슬란한테 납치에 대한 피해 보상을 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으로선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구는 게 그나마 최선이긴 하지.’

다행히 하늘을 다 쓸어버릴 대마법을 펼칠 바탕은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이이잉―

어둠 속에서도 학교의 숲 가운데, 스텔라 방벽의 중심이 될 수도방위대 학교 내부 결계엔 밝은 빛이 돌았다. 결계석 자체를 보호하는 제베디의 강력한 보호 마법이었다.

본래 세 개에서 이제는 여섯 개로 늘어난 앤트러사이트 결계석들 중심엔 [반사]와 [증폭]의 복합 마법식이 양각된 티플라움 판이 놓였고, 그 한복판에 제천의 거울이 꼭 맞춘 듯 끼워져 있었다.

‘설계도보다 더 낫게 완성이 됐구나.’

제베디는 행방이 묘연한 제자를 대신하여 제천의 거울을 학교 결계에 결합했다.

결계 시동자가 시행한 마법을 증폭하고 유지시키는 기능이 제천의 거울로 인해 추가된 걸 알 수 있었다.

기예에 가까운 중첩 마법 없이도 증폭이 가능해졌단 뜻이다.

‘스승님이… 고생이 많으셨군.’

그러나 성 스텔라 방벽의 구동 핵심이 될 학교 결계는 아직 방벽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룬데인 경계를 따라 세워져, 스텔라 방벽을 이룰 아다만티움 부품은, 양산은커녕 아직 시작품밖에 안 나온 단계였다.

다 설치가 되었던들 부품엔 단순 방어 기능만이 탑재돼 있어 방벽만 가지고는 이 결계처럼 작동 방향을 손쉽게 반전시킬 수 없었다.

게다가 연결에 쓸 엄청난 분량의 티플라움 케이블 역시 당장 얻을 수 없었던 터라, 케이블 연결부의 마법식이 새겨질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방벽 축조가 지지부진한 것도 당연했다. 수도는 온통 난리에 물류는 멈추었지, 제자란 놈은 행방불명인 데다가, 3차 마수 준동까지 일어났으니 악조건 중의 악조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아직 결계를 스텔라 방벽과 완전히 연결하기 전인 지금이 단순 에테르 증폭 기기로는 사용하기에 용이했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그 짧은 시간에 이만치라도 해 놓은 게 기적이지. 역시 왕실 마법감, 대마법사님이셔.’

클레이오가 얼추 결계 상태를 다 확인하고 나자, 저 멀리서 제베디 학장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답지 않게 강건한 다리로 달리던 제베디는, 오히려 클레이오의 모습이 잘 보이는 거리부터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자신이 본 모습이 진짜인지 헛것인지 확인하려는 듯 눈을 부릅뜬 표정이었다.

천천히 다가와 클레이오를 한 걸음 앞에 둔 노인은 체면도 잊고서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네가 맞구나. 무사…했다니 다행이다, 클레이오야. 나는 그게 제일로 기쁘구나.”

“제 ‘요양’이 너무 길어 심려를 끼쳤습니다. 스승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에잉, 내가 무사하지 못할 건 뭐란 말이냐? 학교에서 결계 하나 만드는 걸 못하겠느냐?”

제베디는 괜히 역정을 내는 듯 팔을 척 휘두르고는, 로브 끝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클레이오는 그런 스승의 모습을 못 본 척하고 결계석 위에 손을 얹었다.

일단은 가볍게 서클을 열고 에테르를 주입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클레이오의 에테르와 만난 내부 결계는 엄청난 효율로 클레이오의 마법을 증폭해 냈다.

아래로부터 위로 떠오르는 빛 가운데 클레이오의 결가는 머리카락이 금사처럼 흩날렸다.

제자의 서클 발동은, 왕실 마법감에게도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방금 서클을 펼친 마법사의 레벨을 확인한 제베디는 저간의 사정도 잊고 놀라움과 기쁨을 표했다.

“너, 너, 너너! 클레이오야! 또 레벨이 올랐구나! 7레벨이라니, 7레벨이라니!”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하도 번잡한 일이 많아 전달하는 것도 잊었던 자신의 레벨을 뒤늦게 떠올렸다.

결계석에서 손을 뗀 그는 힘아리 없는 손길로 흐트러진 머리만 쓸어 넘겼다.

“아. 그랬지요.”

그 열없는 반응에 속이 뒤집힌 제베디의 목소리가 공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 그랬지요? 아. 그랬지요라 했느냐? 내가 너 때문에 수명이 다 주는 것 같구나!”

도대체 무슨 간난신고를 겪었기에 보지 못한 새 레벨이 올랐느냐, 네게는 역사상 최초이니, 공전절후이니 하는 수식어가 이제는 시시하게 여겨지겠으나 이건 그리 가벼이 볼 일이 아니라느니, 하는 장광설이 이어졌다.

클레이오는 일단 두 손을 꼭 모으고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은 죄가 많아서 판을 깰 수 없는 불초 제자의 당연한 운명이었다.

사제 간에 벌어진 짧은 실랑이는 결국 스승이 제자에게 한 수 물러주는 형태로 마무리됐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먼저 결계를 이용한 중첩 마법 시험부터 해본 뒤, 바로 교내 우체국으로 가 레벨 등록 전보를 보내기로 했다.

몇 년 전 4레벨에 올랐던 직후와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도 레벨 올린 거 보이자마자 학장님에게 이끌려 교내 우체국에 갔었지. 그다음엔 마라톤 면담….’

“너는 키는 이리 멀대같이 자라고, 마법의 성취는 기적적인데, 어째 하는 짓은 이리도 얼이 빠졌는지. 내 걱정이 되어 큰일이다.”

“이 모자란 제자 때문에 심려가 많으십니다.”

“아이고, 참으로 남 일처럼 말한다!”

“스승님의 심려를 좀 덜어 드리려, 이 제자가 그나마 잘하는 걸 좀 준비해 봤습니다만.”

클레이오는 셀바 주에서 봉쇄령 해제를 기다리며 구상했던 마법을 제베디에게 설명했다.

“첼레스테스의 성흔인 중력의 구 덕분에 상공에 올라가 마수에게 몇몇 마법을 직접 시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자 낙진은 기초적인 마법인 [바람]과 [광원] 두 가지 조합으로 쉽게 소멸하더군요.”

“그새 결론에 다다랐느냐? 옳다. 다만 저것들은 압도적인 광량으로 밝힌 에테르를, 최소 열세 시간 이상 쏘아줄 때에만 완전 소멸이 가능했다.”

클레이오는 피로로 속눈썹이 여러 겹 잡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네. 하늘에서 열 시간 넘게 머무르려니 참 추웠습니다.”

역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 이 마수를 가만두고 보고 있었을 리 없었다. 어쩐지 안심이 되고, 막중했던 사명감이 좀 가볍게 느껴졌다.

“제가 앞의 일곱 시간을 맡겠습니다.”

“어디 감히 제자가 스승 앞에 서려 하는고?”

“스승의 그늘 아래 서서 일단 할 만큼 해보고 하다하다 안 되면 저는 드러누울 겁니다. 나머지는 스승님이 알아서 해 주시리라 믿고요. 그러려면 제가 앞이 맞습니다.”

손발이 잘 맞는 두 사제는 입으로는 타박하는 말과 능글능글 아무렇게나 빠져나가는 소릴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실행하려는 마법은 실로 세기의 대마법이었다.

농담은 긴장을 흩어놓으려는 방편이었다.

“클레이오, 너의 섬세한 에테르 조정이 엇나가리라 생각진 않는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너의 시든 풀 같은 체력이다, 이 녀석아. 아무튼 해 보거라.”

제베디는 양손으로 스태프를 잡고 결계 바로 앞에 턱 버티고 섰다.

클레이오 역시 공작의 완드를 현현시켰다.

결계가 발하는 미광을 바래게 하는 황금의 빛이 밤의 일부를 영원히 몰아내는 것만 같았다.

공작의 긴 꼬리깃이 중력을 벗어나 살랑이고, 클레이오의 손끝에서 일어난 [바람]과 [광원]의 식이 타는 듯한 빛을 입는다.

청년 마법사는 젊은이다운 조급함이라곤 없이 깊은 인내심을 가지고 에테르를 끌어낸다.

우우우우우웅―

별의 시간 단위로나 측정할 수 있을 법한 유량의 에테르를 받아들인 결계석이 웅웅 공명하며 흔들렸다.

클레이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더욱 에테르의 강도를 올렸다.

구우우우웅―

이제껏 광대한 그릇 안에서 침잠하던 에테르가, 세찬 강물처럼 몸 안을 휘둘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았다.

‘헤스터와 대결한 이래 에테르를 소모할 일은 거의 없었지. 컨디션도 좋고.’

이럴 때에 클레이오는 자신의 그릇 안에 에테르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어떤 거대한 힘의 통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 순간 스승의 눈 안에 서려 있던 염려는, 경이로움으로 뒤바뀐다.

아직 진언은 낭송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에테르의 금빛이 퍼져 나가며 지상으로부터 천상까지, 뒤집힌 일출을 자아냈다.

8레벨 마법사인 제베디는 똑똑히 보았다.

‘결계에 접촉하지도 않은 순수한 에테르가 이 정도란 말인가…!’

데르니에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제베디조차도 이러한 유량의 에테르를 단숨에 쏟아낼 수 없었다. 아니 그 수식조차도 머잖아 이 아이의 것이 될 것이다.

본래부터 완성되어 있어 제베디 자신이 키워냈다고도 보기 힘든 제자는, 마법의 개념이 첫 줄부터 다시 쓰이게 만들 존재였다.

그것은 제베디 역시도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듣는, 거의 기적에 준하는 에테르 유량을 타고났기에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클레이오는 제베디로부터 한 발자국이나 두 발자국 더 나아간 존재가 아니었다.

뒷모습을 볼 수조차 없이 멀리 나아간 존재. 그리하여 유일하도록 고독한 고도에 설 마법사.

이솔트 왕비의 다음에 단 하나의 마법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클레이오 아세르이다.

숭고한 경이 가운데 클레이오의 여리고 낭랑한 목소리가 암흑과 대적할 말을 자아낸다.

“[어두운 안개가 우리의 대지를 짓누르는

음울한 계절 내도록 이어진 뒤,

온화한 남풍으로부터 난 날이 당도했노니

병든 하늘의 볼품없는 얼룩을 모두 쓸어낸다네]1)”

그리하여 빛이 있었다.

결계로부터 쏘아 올려진 빛이 그림자 낙진의 두터운 중심을 뚫고 올라가, 저 먼 대기로부터 아래를 향해 양광을 흩뿌렸다.

.

.

.

그로부터 일곱 시간 후.

회색빛 하늘에서는 오후의 빛이 기울고 있었다.

곧 비가 올 듯 찌푸려진 가을 하늘이 이리도 맑고 찬란하게 느껴지는 날은, 제베디의 팔십여 년 생애에서도 처음이었다.

혀가 떨어질 듯 쯧쯧 차며 제베디는 [치유]와 [경감] 마법을 제자에게 퍼붓고 있었다.

공중을 휘몰아치던 마법의 바람이 잦아들어 사위는 고요했다. 정확히는, 학교를 둘러싼 외부 결계 안쪽만이 조용했다는 뜻이다.

학교 정문 앞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소란과 소음 모두 제베디가 외부 결계를 발동시켜 차폐해 놓았을 뿐이다.

저 바깥에서 웅성대는 구경꾼이나 기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러 온 왕실의 시종, 큰 상사의 사환들은 모두 공평하게 발이 묶였다.

오로지 클레이오 아세르의 안정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

그럴 만도 했다.

결계석 하나에 등을 대고 반쯤 드러누운 클레이오는 방만한 자세를 고칠 힘조차 없어, 그냥 그 꼴 그대로 스승의 돌봄을 받았다.

스승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무리하게 마법을 운용한 걸 책하기라도 하듯, 제베디의 에테르 흐름이 평소보다 거칠기는 했다.

“열세 시간이 무어냐, 일곱 시간 만에 끝나는걸. 이 스승의 몫은 남기지도 않고, 이 무엄한 놈. 말을 해도 반응을 않으니, 네가 잘못될까 중간에 마법을 그치게 할 수도 없고, 원.”

“집중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게다가 말입니다. 제가 산술에 약한 건 스승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기계식 계산기 없이는 손쉬운 계산도 못 해낼 때부터 알기야 알았다.”

간만에 문송한 순간이었다. 클레이오는 뻘쭘하게 입을 다물었다.

1) John Keats, 「After dark vapors have oppress'd our pl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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