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44화 (343/489)

#344

끝의 시작 (6)

캔튼 부인이 새로 탄 차와 찻잔을 날라 오고, 디오네와 오랜만의 안부 인사를 나눴다.

디오네는 작게 자른 타르트 오 프랄린 로즈 한 조각을 오도독 씹고, 연하게 우린 정산소종(正山小種) 향을 음미한 다음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무도회 뒤로는 제대로 얼굴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아.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몰라요.”

디오네의 눈길이 클레이오의 머리를 야무지게 붙들고 있는 초록 리본에 가 닿았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도방위대 복귀 이후 외출 금지에 묶인 첼레스테스는 메이드 친구에게 부탁해 리본 한 상자를 클레이오에게 배송시켰다.

클레이오는 간질간질한 호의에 장난스럽게 답했다.

“지나친 피로로 시력 저하가 의심되는군요. 레이디 디오네, 부디 안경을 맞출 때는 제가 선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게 뭐래. 안경이든 제게 기어오르는 거든, 아직 천 년은 이르거든요? 제 눈은 아주 멀쩡하죠. 우리 회사 신작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인걸요. 절 놀리느라 낭비하느니 그 돈은 레비 씨에게나 좀 기부해 주세요.”

“안 그래도 사정은 들었습니다.”

바이제 레비는 레비 유한회사가 자리한 건물 전면이 부서진 바람에 복구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정을 듣는다고 제가 뭘 알겠습니까. 방법은 레이디께서 강구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하여간, 능글거리긴. 자, 이거나 읽어 봐요.”

디오네는 익숙한 서류철을 클레이오의 가슴에 턱 갖다 안겼다. 오랜만에 보는 자산 장부였다.

“스텔라 방벽을 만든답시고 현금과 채권 모두 털어버린 데다, 봉쇄령에, 마수에, 악재가 많았죠.

하지만 티플라움 유관 사업에 투자한 주식은 거의 버블에 가깝게 상승했어요. 이 주 전에 수익 실현해서 다시 현금화해놨고요.”

“잘하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티플라움 유관 사업은 모두 국유화될 가능성이 몹시 높습니다.”

클레이오는 현금 자산이 갑작스레 불어난 재산 내역을 만족스레 확인했다.

“안 그래도 전에 당신이 그 소리 하던 게 기억나서 제때 발 뺐어요. 다행히 마수가 하늘과 땅을 다 뒤집어엎어도 증권거래소는 안 닫히더군요! 독한 베아투스 지구 인간들!”

“증권거래소 직원들도 내내 불이 안 꺼지는 그레이어 상회를 보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러면 누워서 침 뱉는 소리 아닙니까.”

“얼씨구? 댁은 누구 편이죠? 저 아니면 이 많은 재산을 누가 관리를 하나요?”

“저야 당연히 레이디 디오네의 편이지요. 영명하신 사업의 귀재님이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이었습니다.”

뻔히 입에 발린 소리라도 클레이오가 붙임성 있게 주워섬기는 게 귀여운지, 디오네는 봐 준다는 태도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보자, 레비 유한회사가 있는 건물이 좋은 가격으로 나왔어요. 거기도 대여가 아니라 매매 가능한 토지거든요. 그래서 주인이 좀처럼 놔 주지 않던 건물이었는데, 지진 지룡 출몰 후 아예 수도를 떠난다잖아요. 평소에 밑밥을 잘 깔아둬서 그런가? 저한테 제일 먼저 매매 제안이 왔어요.”

“당장 매입해 주십시오.”

“좋아요. 오늘 바로 회신할게요. 제가 봐도 그건 사야 해요. 부동산 하락장은 잠시일 거니까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룬데인은 매매가 안 되는 토지가 많아 제때 잡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 매물만 있다면 땅을 더 늘리는 건 클레이오로서도 바라는 일이었다.

“한동안 마법이니 마수니 온갖 소란에 다 휘말려 있기에 재산엔 관심 놓았나 했는데, 감은 안 잃었네요? 맞아요. 다시 지가가 뛰는 중이죠. 중심가와 먼 장소도 제법 상승폭이 높아요.”

클레이오는 약간 식은 차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성 스텔라 방벽으로 보호되는 룬데인 시는 앞으로도 안전할 것이다. 그러려고 사재를 털고 뼈를 갈아 넣으며 연구실에 붙어있는 것 아닌가.

“또 말이에요, 드 네쥬 호텔은 봉쇄 동안 외국이나 지방의 귀족과 사업가들이 모두 그곳에서 장기 체류한 덕분에 매출이 훌쩍 뛰었다더군요. 앞으로도 당신이 임대료 떼일 일은 없겠어요.”

훌쩍- 이라는 말에 맞춰 양손을 팔락 올린 디오네의 손짓이 얕은 바람을 일으키고, 디오네의 무릎께에 고개를 파묻고 졸던 베헤못의 양 귀도 쫑긋 일어섰다.

“뭬옭! 므냐아아아아아앙! (그러면! 와인 셀러의 빈 구석을 이제 전부 채울 때가 됐겠구나!)”

갑작스런 베헤못의 뻗댐에 디오네의 옷이 마구 구겨졌다.

하지만 레이디는 아이보리색 스커트가 고양이 털로 회색빛이 되든, 발톱에 올이 걸려 블라우스의 레이스가 나가든, 하등 신경 쓰지 않고 고양이 미간만 살살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따끈말랑커다란 고양이 덩어리를 껴안은 디오네의 얼굴은 황홀 그 자체였다.

“배고프단 이야긴가? 못이 뭐 먹고 싶어요? 배고파요?”

“먉. 웅냐냨. (아니다. 점심도 간식도 잘 먹었다.)”

역시나 오랜만에 아름다운 숙녀의 무릎을 차지한 고양이는 신이 나 발라당 몸을 뒤집고는 애교스럽게 배를 까 보였다. 보드랍게 흰 배털이 검은 털 사이에서 도드라졌다.

디오네는 뺨뿐 아니라 귓불까지 붉히며 진지하게 고양이의 배털을 살살 쓸어 넘겼다. 진작 강펀치가 날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베헤못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쓰다듬을 허락해주고 있었다.

한참 만족스러울 만큼 고양이를 물고 빨고 한 디오네는 고양이가 오후 순찰을 나간 뒤에야 체면을 되찾았다.

“흠흠. 그러고 보니 제베디 학장과 함께 하늘의 그림자를 몰아낸 사람이 있다는 것 같던데, 그거 당신 맞죠?”

“아니, 그건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듣긴요? 연구마법사로서 수도방위대 마법단에 제베디 교수의 연구 자료 조회 요청을 했을 뿐인데요?

아무리 제1 저자를 교수님으로 넣어 놔도, 같은 마법사의 눈은 못 속이죠. 마법을 전개하는 방식이 교수님 게 아니던데요?”

“그 사실을 또 누가 압니까?”

“일단은 제가 사본을 대출한 후 반납을 안 하고 있어서 아무도 못 봤을 거예요. 나라의 녹을 먹는 마법사란 마법사는 모두들 잠잘 시간도 없을 만큼 마수 출몰지에 불려 다니고, 그건 복원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당장은 앉아서 서류 들여다볼 정신이 있는 마법사가 없는 거 같네요.”

“…정말이지, 디오네 당신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림자 낙진을 몰아낸 이번 일의 공은 모두 제베디에게 돌렸다. 이 숨 막히는 권력 투쟁의 와중, 지금보다 더 심한 견제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제베디의 에테르는 금빛이라 클레이오가 마법을 썼어도 결계 밖에서만 마법을 본 사람들에게선 구분이 안 갈 터였다.

제자의 뜻을 헤아린 제베디는, 무척 못마땅해 하면서도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 찬성했다.

‘내 비망록에는 꼭 진상을 기록해 놓겠다. 내가 죽으면 올바른 내막이 밝혀지도록. 딱 그때까지만 가지고 갈 비밀로 알겠다. 쯧.’

그렇지만 디오네는 제베디에게서 마법을 배웠던 제자이면서, 지근거리에서 클레이오의 마법 구동 방식을 보아온 친인이기도 했다.

“이보세요, 클레이오 아세르 씨. 손바닥으로 하늘을 전부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렇지만 가능한 데까진 좀 가리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건 저조차도 장담을 해드릴 수 없는 일인데요.”

딜 크림을 바른 연어 샌드위치를 쏙 삼킨 디오네는 고양이가 사라진 거리만큼 클레이오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다만, 그 기간이 좀 길어질 수는 있을 거 같네요. 세상에나 일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클레이오에게 [방음][차폐] 마법을 걸게 한 디오네는 오늘 다과회의 진짜 목적이었던 정보를 풀어놓았다.

“브룬넨에 파견해 둔 정보원에게 소식이 왔어요. 예상했다시피 마인라트는 당장이라도 서진할 준비가 끝났다고 해요.

본래도 산업 기계와 포도주 수출로 부유한 공국이잖아요.

엄청난 양의 마석을 쓸어 모았고, 수출 제한이 늦게 걸려 벌써 시장에 풀려 있는 티플라움 중 대다수를 마인라트에서 떨어간 정황이 여럿이에요. 거기에 아다만티움 광산까지 독점하고 있으니. 뭔가를 하려는 건 분명하죠.

이를테면 말이죠, 요즘 마도구 경매장에 왜곡의 돛 매물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건 라에티카에서 매점매석 중이란 소문이 있어요. 마인라트와 라에티카는 긴밀히 연합 중이고 말이죠.”

“다른 건 전쟁용 마도구로 만든다지만, 도대체 왜곡의 돛은 어디에 쓰는 걸까요? 이어붙여 봐야 거대 아공간 주머니를 만들 순 없지 않습니까.”

디오네는 긴장한 듯 옅은 숨을 내쉬고는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혹시 비행선이란 걸 들어봤나요? 기구에 기체를 채워 띄우는, 하늘을 나는 운송 수단인데 이걸 본 사람들 말이 갈려요. 느리다는 소문도 있고 놀랍도록 빠르다는 소문도 있고.”

“…일단 제가 아는 기계가 맞다면 그건 최대 시속이 120km까지 나올 겁니다. 빠르다고 가정하고 대응해야 할 거고요.”

“그건 정말 무시 못 할 정보로군요.”

디오네는 수첩을 꺼내 클레이오에게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그녀 역시 이 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니까.

클레이오는 식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비행선은 거대한 기구 아래에 동력기를 단 형태로 추락시키기 쉽고 엄청나게 눈에 띈다. 브룬넨 측에선 그걸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일까.

항공기가 이미 발명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비행선이 그보다 늦게 나왔다는 점이 오히려 특이했다.

그건 즉, 클레이오가 이전 생애서 알던 비행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동되는 기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아슬란이 숨겨놓은 한 수와 관련이 있는 걸까?’

모친이 멜키오르에게 억류되고 크뤼엘 공작과 피어스를 잃은 아슬란은, 룬데인에 당당히 입성했던 것과 달리 소리 소문 없이 마인라트로 돌아갔다.

약혼녀라는 외제니아 공녀조차 수도의 저택에 놓아둔 채였다.

여러모로 입장이 나빠진 공녀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상을 치른다는 구실로 상복을 입고 두문불출했다.

홀로 남은 약혼녀란 지위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외제니아는 아슬란을 지지하는 세력도 배척하려는 세력도 대응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럴 만도 한 상황이었다. 현재 알비온 최고의 정예 기사단인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평기사들 중에선 아서와 뜻을 같이하는 이가 여럿이었으나, 기사단의 상층부로 갈수록 아슬란을 따르는 이들이 다수가 됐다.

그런데 이들을 통솔하던 피어스 클라겐이 마지막 왕실자문회의 이후 원인불명의 격통으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멜키오르가 독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크뤼엘 공작 역시 의식을 잃고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의혹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크뤼엘 일파가 멜키오르에 대해 뿌렸던 온갖 음해와 음모론이 만천하에 퍼진 판이었다. 의심이 자라나기 좋은 바탕이었다.

‘멜키오르가 피어스와 크뤼엘, 그리고 왕비에게 해를 끼쳤을 거란 게 딱히 근거 없는 의심이나 음모론도 아닌 게 더 문제긴 하지.’

멜키오르는 분명 마지막 왕실자문회의에서 간파의 구조시와 매혹을 펼치고 뮈토스의 홀을 휘둘렀을 테니까.

왕세자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이며, 저주받은 이능을 쓰는 자 ― 라는 표현 자체는 사실상 참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애초부터 저레벨 기사인 멜키오르를 낮잡아보던 귀족 출신 기사들 사이에서 가볍게 볼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상황.

어느새 수첩을 내려놓은 디오네가 음영이 깊어진 콧대를 가볍게 꾹꾹 눌렀다. 피로를 몰아내려는 시도였다.

클레이오는 잠자코 [방음][차폐] 마법식에 에테르를 더 더했다. 아직, 더 들어야 할 내용이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징집이 예고될 거라는 소식도 있어요. 그, 수도방위대 학교 응시자 고를 때 쓰는 거 있잖아요. 약식 에테르 감응력 검사지의 대량 주문이 들어와 있어요.”

“마석 금모래를 종이에 입힌 검사지 말입니까? 그건 에테르의 흐름을 감지하는 정도이지, 서클을 열거나 검기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판별해주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거야 우리 모두 알죠. 그런데 검사지의 발주처가 수도방위대가 아니라 군무청이에요. 이건 뒤집어 말하면, 통상적으로는 전력이 되지 못할 미약한 에테르 감응력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징집을 할 거라는 뜻이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