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47화 (346/489)

#347

끝의 시작 (9)

마침내 길고 길었던 [경감]이 끝났다.

청록빛이 돋아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멜키오르는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태서턴이 부축해 자세를 바르게 정리해 주었다.

여러 생애 동안 익숙해진 행동은 그들의 낡은 친밀함을 드러냈다. 몇 모금 물을 삼킨 멜키오르는 한결 나아진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말일세, 이 모든 것이 지겹게 다시 반복된다 하더라도 태서턴은 무용한 복수를 할 거야.

신살자의 맹목을 얕보지 말게. 저자는 그대가 아끼는 계몽의 기수를 참수해 클라리온 편집부의 닫힌 문 위에 걸고, 제 사지가 다 잘린다 하더라도 그대의 왕을 죽이고 말 테지. 그렇게 지금의 이 세상은 닫히게 되네.”

클레이오는 몇 초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런데도 해볼 만한 시도인가?”

“허나 저하께서는 여기에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시는 한에는 저하의 도구가 명령을 어기도록 놓아두시지 않을 것을 압니다. 프란시스의 쓸모는 아직 다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클레이오는 자신이 되돌려 놓은 멜키오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확신 속에서.

뮈토스의 홀을 얻은 멜키오르가 프란시스를 죽이거나 세뇌하려 했다면 진작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프로파간다 성흔을 가졌고, 멜키오르는 그 성흔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리라.

“기억하십니까? 몇 년 전 겨울 궁전에서 저하께서 말씀하셨지요. 프란시스를 아끼시고, 또한 시간을 들인다면 설득할 수도 있으리라고요.

세월이 꽤 지났습니다. 하고자 하리라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셨을 만치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자유롭고 무사하다면, 저하께서 바라는 그의 쓸모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멜키오르는 아슬란의 실험을 알면서도 묵과한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설계를 프란시스가 안다면 그는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클레이오는 마음 한 편으로 프란이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르길 바란다.

“그래, 맞아. 나는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가 제 원고의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의 재능은 스스로의 의지와 자유 속에서만 온전히 발휘되는 것이니.”

멜키오르의 미소 너머, 닫힌 문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툴민 비서관이었다.

그는 정작 문 앞에 도착해서는 당장 들이닥치질 못하고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툴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멜키오르와의 접견을 허락받은 데 놀라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입구에서 태서턴에게 저지당할 줄 알았건만, 오늘은 드디어 클라렌던 하우스에 출입을 허가받았다.

왕실자문위원회의 소란 이후 국왕 대리의 업무는 재개했지만 이전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집무실에 붙어있는 일은 없어진 멜키오르였다.

위급한 사안은 골라 처리했으나,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클라렌던 하우스에서 나서질 않았다.

왕세자의 몸은 심하게 여위고 수척해 꼭 맞던 예복이 남의 옷처럼 커졌다. 눈밑이 푸르스름하고 눈에서는 주홍빛이 이글이글 감도는 멜키오르의 상태는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다만 툴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멜키오르의 용태에 대한 정보가 궁성의 담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사실은 그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지난한 일이었다.

충실한 시녀장 힐레이다의 적극적 조력이 없었다면 그와 몇몇 실무자들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지금 현재 툴민이 움직일 수 있는 동료의 수는 적었다. 궁성의 분위기는 불온했다. 멜키오르의 세력을 이루던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페텐카 세르게프와 아서 왕자 측으로 넘어간 이가 적잖았다.

출신이 한미한 시빌 서번트들은 아슬란에게 권력의 축이 기우는 데 민감하게 반응했다. 누구도 침몰하는 배의 갑판에서 버티고 싶어 하진 않는 법이니.

멜키오르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 관료들에게 아서는 선택 가능한 유일의 대안이었다.

그뿐일까? 건국의 명가와 소드마스터인 기사 왕자의 조합은 알비온인으로서의 근본적인 자의식을 자극했다.

아서 왕자가 소드마스터에 이른 사실은 현재까지도 거의 은폐되어 있지만, 마수가 계속 출몰하는 한 언젠간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페텐카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그 사실을 공표할 터.

결국 아주 이른 시기에 멜키오르의 진영에 들었던 동료, 이를테면 아레사 리드 보좌관 같은 사람만이 툴민의 곁에 남았다.

고립된 툴민은 멜키오르를 택한 자신의 선택에서 간과된 요소가 무엇인지를 재검토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내 일을 해야지.’

망설임을 그친 툴민은 노크 없이 침실 문을 열었다. 문안에 클레이오가 있는 것에도 눈썹만 한 번 치켜올렸을 뿐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저하, 시급히 들으셔야 할 소식입니다. 여기서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아슬란 리오그난의 악행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제레미 툴민 비서관의 왼손에는 잉크가 번진 호외와 대자보, 팸플릿 뭉치 등이 들려 있었다. 대문자로 쓰인 헤드라인이 클레이오의 눈에 박혀들었다.

<아슬란 리오그난, 피를 먹는 자>

‘프란이 해냈구나.’

호외의 내용을 확인한 멜키오르는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마치 이 일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클레이오는 멜키오르의 속셈을 알지만 이 순간엔 프란의 성취에 순순히 기뻐하고 싶다.

멜키오르가 프란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가 한 일의 옳음은 변치 않는다. 그는 분명히 멜키오르보다 오래 살 것이다.

살아남아서 서술의 권리를 얻는 쪽이 역사에서는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다. 그 점에서 멜키오르는 프란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마법사는 내심을 감추고서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뜻대로 되어서 기쁘시겠군요, 저하.”

“흡족하네.”

“이 폭로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기다림이 너무 길어 지리함에 익사할 뻔했지만, 기다렸던 것은 맞지.”

툴민 비서관은 자신을 앞에 두고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와 자신의 국왕 대리를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딘가 비세속적인 분위기를 두른 저 두 사람은, 툴민이 가져온 놀라운 소식을 먼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확고한 3왕자의 인물인데, 그가 여기에 왜 와 있는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멜키오르가 [경감]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툴민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조합이었다.

그는 일어나는 일들에 계속해서 소외되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우발적 사고이고, 어디까지가 멜키오르의 안배일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할 수 있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의심은 가장 우선해서 할 일이 아니었다.

툴민은 보고를 이어나갔다.

“요주의 인물인 프란 화이트가 안셀름 파크에 기자들과 군중을 불러 모은 뒤 연설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물량의 호외를 룬데인과 주요 도시 도심에 뿌렸습니다. 대자보 역시 주요 역마다 나붙었음은 물론입니다. 실로 물량공세를 펼쳐 아슬란 왕자의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이제껏 여러 불만이 쌓였던 시민들의 반응은 격합니다. 이래서는 안셀름 파크에 모인 인파가 그대로 시위대로 전환될지도 모를 정도의 소요가 일고 있습니다.

현재 수도방위대 기사단은 대부분이 파견을 나가 마수 퇴치에 전력을 다하고 있고, 경찰력만으로는 군중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흘러내린 잠옷 가운을 여민 멜키오르는 제법 총기를 되찾은 눈으로 툴민 비서관이 오른팔에 끼고 온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프란 화이트가 기고하던 클라리온은 정간되었을 텐데, 어디에서 호외를 찍었나?”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척 하고 안경을 올린 툴민은 그 짧은 새 파악해 온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여기 서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근 창간된 주간지 루치올라라고 합니다. 발간 인가 자체는 한참 전에 나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제작되지 않다가 이번에 1호가 나옵니다.

발행인은 브루네토 마로, 포리고의 망명자입니다. 부친이 주석 가공으로 엄청난 돈을 번 거부이나 도시 공화국 간의 내전에서 밀려나 알비온으로 망명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쾌락주의자로 이름 높으나 정치적 행보를 보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매우 대담한 재담을 즐기는 성격이라는 평입니다.”

“깃발의 기수이자 공화주의자 언론인인 미스터 화이트와는 썩 마음이 맞을 것 같은 타입이 아닌데.”

“그렇습니다만 놀랍게도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 그 과정에 대해선 알아보는 중입니다. 혹시 내무보안국 쪽의 정보가 있습니까?”

“지금 국의 역량은 해외에 집중시켜 놓아서 국내 정보는 미진하네. 그렇지만 프란 화이트에대해서는 더 조사하지 않아도 되네.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이니.”

“…그렇습니까?”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툴민의 평정이 깨지는 게 클레이오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클레이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이판사판이라고 사람 관리 막 하네.’

멜키오르가 제 손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프란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라면 충분히 할 만한 짓이다.

제가 아슬란의 인체 실험을 방기하고 있다는 폭로가 동시에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거다.

‘그런 제 살 깎는 전략이니 저 똑똑해 뵈는 비서관이랑 일정공유를 할 순 없었던 것 같고.’

클레이오가 잠자코 눈알만 굴리고 있는 사이 툴민 비서관의 어조에 희미한 당혹이 서렸다.

“하지만 프란 화이트는 멜키오르 저하에 대한 불경한 모함 역시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슬란 왕자가 저지른 민간인 납치와 잔인한 인체 실험을, 저하께서 알면서도 방기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입니다.”

멜키오르는 사르라니 눈을 떴다.

“그래서 비서관 역시 나를 의심하나?”

일어난 멜키오르가 한 걸음 다가오자, 서류를 들고 있던 툴민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움츠렸다.

놀랍게도, 멜키오르는 간파의 구조시를 발동시키지 않은 채였다.

그러한 능력 없이도 툴민 비서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혹은 자신에게 최후까지 충성을 바치는 관료에 대한 존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툴민 비서관의 안경다리 주변으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가 땀에 젖어드는 게 보였다. 몇 초간 굳어져 있던 그는 마침내 답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판단에 필요한 근거가 미비합니다.”

이 순간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반드시 포섭해야 한다고. 이런 종류의 충의는, 베스나의 광기나 태서턴의 집착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근거를 더 찾아보는 것을 비서관의 개인적 과제로 삼도록. 허면 당면한 논점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

상당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툴민은 보고를 재개했다.

“이 호외와 대자보는 62페이지에 달하는 팸플릿의 요약본입니다. 전문은 내일 오전 발매될 루치올라 1호의 지면에 게재될 거라고 합니다.”

물러가라는 말이 없기에 클레이오도 그대로 그 자리에 끼여 보고를 들었다. 내막이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툴민은 팸플릿의 내용이 잘 보이도록 멜키오르 쪽으로 돌려 펼쳤다.

클레이오는 속으로 감탄했다. 프란의 글이 이토록 강인하게 빛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간절히 뜻을 전하려는, 성흔의 가호를 입은 문장들.

프란은 선언의 기능과 효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누구라도 이걸 읽는다면 아슬란 개새끼라고 생각하고 말 거 같은데.’

프로파간다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고 싶고, 지지하고 싶어 할 때이다.

‘그래서 프란은 이제껏 그걸 발표하지 않았던 거구나.’

프란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할 순간이 도래하기를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가장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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