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내밀한 기적 (1)
편집자 권한에는 돌이킴의 한계 지점이 있다. 그 구간을 파악하기 위해 클레이오는 익숙하게 페이지를 역순으로 넘겼다.
나달나달 닳아, 펜에서 떨어진 잉크를 푹푹 먹는 페이지들이 뒤돌아간다.
―온몸이 피에 젖은 아서는 멀리 해안선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끼쳐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두 발이 대지를 박찼다.
또다시 한 페이지.
―전경화에서 벗어난 아서가, 아직 화마에 휩싸이지 않은 시장 사저의 폐허에 홀로 나타난다.
클레이오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안도와 허탈감이 뒤섞인 숨소리였다.
두 가지의 사실이 클레이오의 분열하려는 정신을 간신히 틀어쥐었다.
아서는 제 영웅적 행동을 치명적 상처 없이 완수했다.
전경화가 해제되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공간으로 들어갔던 최초 지점으로 함께 돌아온다.
하지만 아서는 완전히 혼자서 되돌아왔다.
왕자는 아공간으로 끌어들인 라에티카의 기사들을 모두 이겼고, 그러므로 테르게스티의 성벽 안을 독으로부터 지켰다.
투둑.
떨리는 손에 쥔 펜 끝에서 또다시 잉크가 흘렀다. 금분이 섞인 듯한 초저녁 하늘빛의 잉크는 아서의 이름자 주변에 얼룩졌다.
클레이오는 길디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페이지에 잉크가 스민다는 것은, 곧 고쳐 쓸 수도 있다는 보장이었다. 같은 페이지 위에 쓰인 도시의 멸망은 돌이켜질 수 있는 구간이다.
그리하리라 믿기는 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은 불안을 가졌더랬다.
그러나 테르게스티는 필시 지도와 역사 위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되살려 다시 쓸 것이므로.
클레이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원고의 낱장들을 되돌려 보았다.
다시 한 페이지.
―이시엘은 단신으로 라에티카의 경비병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시의원들의 신병을 확보했다.
그들은 도시가 처한 조건을 이해하고, 이시엘이 제시한 안을 받아들인다. 이미 깨져버린 중립의 가치에 매달리는 대신 당장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테르게스티의 시민들이었다.
또다시.
―친우들의 놀랍고도 영웅적인 활약.
기기기기긱.
아서의 기사들이 보인 용맹하고도 용감한 행위에서부터 더 이상 페이지들은 잉크를 머금지 않고, 청금빛은 보석의 이슬처럼 맺혀 툭툭 흘러내린다.
‘여기구나.’
이들이 테르게스티에서 얻은 승리는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있는 가장 뒤쪽 페이지는 고작 몇십 분 전이었다. 하지만 아직 클레이오 자신이 ‘비탄의 정화’를 쓰기 전, 에테르 고갈에 이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클레이오가 책장을 넘기기를 멈춘 동안에도 고귀한 색을 띤 잉크는 하염없이 바닥으로 흐르고, 그것은 마치 차마 울 수조차 없는 클레이오의 눈물을 비유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뼈의 표집처럼 보이는 손에 펜을 고쳐 쥔 클레이오는 일견 차분하게, 고칠 수 없는 페이지들을 넘겨본다.
사태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됐다.
비록 저 아래에서 도시는 폐허만이 남았더라도.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병사들이 멈춘 시간 속에서 망연히 멸망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도리엔 시의 교회에 설치된 전화에서 한밤중에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수도로부터의 대지급 통신이다.
―제레미 툴민은 국왕 대리 집무실에서 통신 보안을 해제하는 열쇠를 빼돌린다. 평생 두 번째로 저지른, 불법적인 취득이었다.
―결국 제레미 툴민은 오래된 고뇌에 답을 내린다. 다른 사안이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살게 하는 일과 죽게 하는 일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데에는 정치적 계산이 개입할 수 없다.
―제레미는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한 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암호문의 내용을 검증한다. 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결론에 다가갈수록 툴민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져간다.
―첫 번째 불법 취득은 그로부터 다섯 문단 전에 벌어졌다.
―툴민 비서관이 기묘한 암호문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암호문의 불법 취득은 자의에 의해 일어났다.
―별 볼 일 없는 문서엔 국왕 대리가 친히 확인했다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해당 문서의 내용을 국왕 대리가 직접 확인했다는 보증임을 적어도 제레미 툴민은 안다.
―그는 페드르식 암호조합법을 알아보았다. 서류 위의 숫자들은 원자재가 아니라 알파벳의 순서를 가리키는 암호였다. 암호문의 내용은 경천동지할만한 것이다.
브룬넨이 테르게스티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내무보안국은 알비온의 동부 국경 부근에서 오가는 모든 전신을 수집한다. 기묘한 방식으로 암호화된 정보는 분주한 방첩부원의 눈을 벗어났다. 원자재 거래에 관한 것으로 보이는 테르게스티발 전신은 국왕 대리의 집무실에서 돌아와 폐기함에서 파쇄를 기다리고 있다가 눈썰미 좋은 툴민의 눈에 띈다.
―괴괴한 궁성은 이제 늘 침묵에 휩싸여 있다. 동남 전선에서 올라온 엄청난 수의 마석이 왕의 홀에 쌓였고, 홀의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추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닌, 음산한 기운이 늘 뒷목을 붙드는 것만 같았다.
수도의 모든 마법사는 룬데인 군사병원으로 거취를 옮긴 뒤이기에 클라렌던 하우스의 정원은 붉은 죽음에 뒤덮인 채로 내내 스산하다.
―서안의 드 네쥬 호텔이 후방 이송된 병사들의 요양소를 겸하게 된 무렵이니 시녀와 시종 역시 군사병원이나 후방 지원 분과로 빠져나가 궁성에 머무르는 인원이 퍽 줄어들었다.
―툴민은 오늘도 몸져누운 멜키오르를 대신하여 주간 보고를 듣기 위해 북문 지하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다.
―앤디미온 한이 보내는 전신이 테르게스티와 결연을 맺은 페드르의 3개 도시에 보내진다.
―앤디미온의 상선에는 테르게스티 시의회 부의장이 탑승해 있었다.
―분노에 찬 훌쩍임과 헐떡이는 숨소리가 제 기척을 드러낼까 이가 부러지도록 깨물고서, 에테르 전지를 써 [차폐]를 펼친 채 버텼던 것이다. 부의장은 부의장이기 이전, 시장과 38년간 알고 지낸 친구였다.
―부의장은 마도구 취급상 출신으로 각종 마도구를 능란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무단 점령에 항의하던 시장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동안, 역시나 시장을 대피시키기 위해 시장 사저에 도달해 있었던 부의장은 비밀 통로에 몸을 숨긴 채 라에티카 기사단 장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테르게스티의 알비온 측 출입 도로와 페드르 측 출입 도로의 관문을 부수는 라에티카 기사단원들의 얼굴은 무감했다.
―헤스터 워드는 라에티카의 암초 많은 해안에서 건조한 잠수정 함대를 이끌고 데르니에 대륙의 남쪽 해안선을 따라 거슬러 와, 해안방어진지 앞에서 기척을 죽인 채 잠복해 있다. 물속까지 뻗어 나온 에테르의 창살이 이들을 막으나, 그 창살은 영원히 견고할 수 없을 것이다.
―테겔만이 창을 두 번 휘두르자 테르게스티 관문을 지키고 있던 알비온 기사들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클레이오는 고개를 들었다.
금으로 빚은 글자들이 남은 시간을 알렸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
00:04:11 / 00:30:00]
아직 읽고자 하는 페이지는 더 남아있었으나 이제는 읽기가 아닌 편집에 임해야 할 시간이었다.
앞장을 조금 더 넘겨보았지만 브룬넨 측의 동향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재된 것이 없었다.
베헤못이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눈 감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처럼, 팔림프세스트에 쓰인 내용 역시 그랬다. 전쟁에 임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이 불안정하고 완전치 못한 텍스트만을 붙들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클레이오는 한숨으로 불안을 흩어버리고 현재까지 취합된 정보에 집중했다.
룬데인에 가보지 못한 1년 동안 왕성과 수도에도 전쟁의 영향이 끼쳤다. 툴민이 가로질러 가던 왕성의 황량한 풍경이 눈에 보일 듯 다가왔다.
여러 해 동안 세상을 이루는 텍스트를 편집해 온 그는 쓰인 내용을 읽으며, 쓰이지 않은 내용 역시 윤곽을 읽어낼 수 있게 됐다.
세계를 기록하는 원고는 그에게는 지독하게도 절박한 읽기의 대상이므로. 어떻게 능숙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는 멜키오르, 늘 행동의 상세와 진의가 누락되는 자의 이름 주변으로 클레이오의 시선이 맴돌았다.
과거의 그라면 이러한 수많은 우연성이 엮인 방식으로 아서와 니네베 연대를 테르게스티에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더 심대한 계획을 위해서 다른 일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구는 것인지도 모르지.’
지난 일 년간 국왕 대리가 전선의 클레이오를 호출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성흔에서 비롯된 멜키오르의 고통은 그대로일 테니, 그의 행동은 한 가지 결말을 가리킨다.
그가 계획한 끝이 머잖은 것이다.
왕의 홀에 쌓인 마석 무더기와 절대로 에테르를 쓰는 법이 없는 트리스테인 공작은 우연히 배치된 요소일 수 없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서 무언가를 하리란 건 알지.’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클레이오는 백지를 읽을 줄은 모른다.
피로한 어깨가 낮게 처졌다. 그는 애써 몸에 힘을 주고 미끄러지려던 펜을 들었다.
그는 제 앞에서 조각상처럼 멈춘 친우의 뒷모습, 깃을 올려 입은 가죽 재킷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얼굴 윤곽을 일별한다. 깜빡이지 않는 은빛 눈은 오로지 도시의 파괴를 집요하게 응시한 채로 굳어졌다.
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비록 그녀에게선 잊힌다 하더라도 클레이오에게는 효력이 지속되는 약속이므로.
클레이오는 줄어가는 시침을 바라보며 새로이 쓸 문장을 가다듬는다.
이제껏 그 어떤 잔혹한 전장에서도 아무런 개연성 없이 적군 지휘관을 급사시킨다든지, 아군 기사들의 레벨을 상승시키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런 문장을 적으려 하면 또다시 잉크가 스미지 않았고, 페이지 위를 도르르 굴러 흐르기만 했다. 원고가 그러한 기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흔은 달라.’
그는 이미 아서가 가진 성흔의 범위를 완전히 다시 쓴 적이 있었다.
물론 판면에는 좀처럼 이름조차 쓰이지 않는 멜키오르의 성흔을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아서의 조력자에게라면 가능할 것이다.
‘중력의 구 범위를 확장하자.’
클레이오는 고쳐 쓸 페이지를 펼치고는 시간과 묘사 사이의 여백에 한 문장을 추가한다.
―05시.
―라에티카의 기사들은 알비온 측의 공격에 밀려 해안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시내 방면으로 물러섰다.
[고유 스킬: ‘중력의 구’
―위급 상황에 처하여 고유 스킬의 기능이 확장됩니다.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물리적 조건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스킬의 통제 범위는 에테르 확장 범위의 10배 크기입니다.]
제가 가진 권한의 주제와 한계를 아는 클레이오는 그 모든 제약을 염두에 두고서 몇 문단을 새로이 쓴다.
본래는 검격 범위의 40분의 1이었던 ‘중력의 구’ 적용 범위를 최대한으로 늘렸다.
멀리 보는 첼레스테스가 불길한 위화감을 느끼고, 물속의 위협에 반응하듯 성흔이 확장된 것이다.
이 항구에 정박된 모든 배를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펜 끝이 낡은 원고의 표면 위를 사각사각 스쳤다. 청금빛 잉크가 페이지의 행간을 채운다. 원고는 아무런 저항 없이 개정을 받아들였다.
클레이오는 팔림프세스트로부터 손을 뗐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
00:00:09 / 00:30:00]
창공에 멈춰 선 마법사는 복원되기 시작하는 도시를 일별한다. 잊힐 파괴를 눈에라도 새기듯.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알비온의 도시들 역시 맞이할 수 있는 최후를 주지하듯.
그때.
“―, ――!”
바스라지는 책장과 줄어드는 제한 시간 표시 말고는 움직이는 것이 없어야 할, 시간이 정지된 편집 구간에 우렁찬 목소리가 울린다.
거리가 멀고 이곳은 너무 높아 그 말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으나, 클레이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선로가 뒤틀리고 시계탑이 타버린 테르게스티 기차역을 넘어, 항만 시설이 쓰러지고 꺾인 해안가에 아서가 도달해 있었다.
편집자 권한에 직접 연루가 되면 시간의 되돌림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저기에 서 있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돌이켜지기 전의 몇 초간, 에테르의 가호가 없는 클레이오의 나안으로는 아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든든한 미소를 띠었든, 장난스럽게 웃음 짓든, 이러한 대규모의 멸망을 목도한 아서는 슬픔과 연민을 느끼리라.
클레이오는 미약하면서도 허망한 웃음을 짓는다.
‘너는 목격자가 되겠구나.’
아서의 두 발이 대지를 박찼음을 보았으니,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주인공의 시간은 돌이킬 수가 없고, 그는 편집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데.’
[―저자가 편집자의 권고를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