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86화 (385/489)

#386

키시온 제5대 자작 (14)

결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며, 고인에게도 모독적인 생각이었다. 이시엘은 딸로서의 감상을 접어 넣고 키시온의 후계자로서의 책무에 충실히 임한다.

푸슛! 치이이이익―

그녀의 손에 쥔 멜라미드의 검은 불길의 궤적을 남기며 세실의 어깨뼈와 팔목을 갈라냈다.

시커먼 피가 튀어 이시엘의 머리끝과 제복의 깃을 녹였다. 그녀는 [강화]를 끌어올리며 세실의 품으로 한층 깊이 파고들었다.

푸우우욱!

세실 역시 기민하게 반격했다. 그는 이시엘의 공격을 흘려보내며 몸을 반 바퀴 돌려, 예리한 검날을 피해냈다.

그는 몸을 돌리는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멜라미드의 검과 제 검을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카가가가강!

두 검 사이에서 주홍빛 불씨가 튀었다.

현묘한 검식 따윈 쓸 줄 몰랐지만, 검붉은 에테르의 엄청난 파괴력이 세실의 기술적 약점을 보완했다.

이시엘의 어깨에서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나고, 세실의 옷자락은 검은 피에 젖어 달라붙었다. 갈라진 피부 표면을 따라 진득하게 흘러나온 피는 에테르와 엉켜 세실의 몸을 뒤덮었다.

이제는 독이 그를 움직이는 것인지, 그가 독을 다스리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에 비례하듯 검에 휘감긴 에테르의 기운도 더더욱 거세졌다.

이시엘 역시 멜라미드의 검에 감긴 불꽃을 더 크게 피워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절체절명의 쟁투에서, 두 사람은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힘을 힘으로, 기세를 기세로 밀어붙였다.

기이이이익, 투둑.

치열한 대치 끝에, 세실이 쥔 슐리만의 검이 녹아내렸다.

자작의 검 또한 장인이 주조하고 마법사가 강화의 식을 새긴 명검이었으나, 멜라미드의 검과 한참을 붙어 겨루자 성흔의 불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끼이이이이잇.

그러나 세실은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녹은 날을 오로지 힘만으로 비틀어낸 세실의 공격에 멜라미드의 검신이 둥글게 휘어졌다.

몸이 가벼운 이시엘은 세실이 끄는 대로 이끌려가는 척 휘청이다가, 순식간에 검을 틀어 측면으로 내리꽂았다.

푸슛.

자신을 끌어당기느라 세실의 움직임이 커지며 생긴 약간의 빈틈을 이용해 이시엘의 검이 폐를 관통하고 골반을 향해 사선으로 꿰뚫렸다.

세실은 내장이 찢기고 타는 고통 속에서 왼손으로 이시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그그극. 퍼걱.

클레이오가 만들었던 방어 건틀렛이 최후로 착용자를 지키고는, 사슬의 미늘이 하나하나 풀려 흩어져버렸다.

이시엘의 검에 몸이 꿰인 채로도 세실은 꽉 쥔 손을 풀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이시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럼에도 붉은 머리의 기사는 상대에게 무감한 무표정 외에 내어줄 것이 없다.

“네가… 이시엘 네가 날 봐 줘서… 나는, 흡, 컥.”

세실의 마지막 말은 검은 피로 젖은 잇새에서 맴돌다 스러졌다.

만일 무어라 더 내뱉었다 하더라도, 레벨 상승의 여파에 휩싸인 이시엘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소드마스터를 한 레벨 앞에 둔 기사였다.

[7레벨 검사

칭호: 불과 대적의 기사]

충만해진 에테르를 두른 이시엘은 세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7레벨에 이른 이시엘이 휘두르는 검은 가히 신속에 가까운 속도였다. 표면상의 에테르 레벨이 같다 한들 세실과 이시엘이 살아온 시간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스스슷―

세실은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제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목과 몸을 이어 붙이려는 듯 혈관과 신경을 따라 스물스물 기어 나오던 검은 피는 대적의 불에 지져져 기화되었다.

이시엘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검으로, 여전히 뛰고 있는 세실의 심장을 꿰뚫었다.

엎어진 채 일어서려던 머리 없는 사체, 오로지 독과 암흑의 힘으로 움직이던 몸은 검의 불 속에서 기능을 멈춘다. 히드라는 불에 패배하는 법이므로.

이제 이시엘의 앞에는 죽은 배신자와, 또한 죽은 부친의 시신이 있다. 자작을 지키다 절명한 충성스런 부하들의 시신이 고두하듯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시엘은 그들을 거두기에 앞서 검을 달리 고쳐 쥔다.

붉은 가문비나무는 500미터로 넓어진 검격 범위 안에 넉넉히 들어왔다. 마수 셉스가 똬리를 틀었던 둥지의 표식이자, 협곡을 부술 지점.

레벨 상승으로 더 정묘해진 에테르 탐지 능력이 협곡 아래에 모인 수백여 명 적군의 존재를 알려왔다.

이시엘은 망설임 없이 진격의 원을 쏘았다.

콰아아아아아앙!

형형한 검기는 그녀의 성정만큼이나 똑바르게 나아가 표적만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연이어 같은 자리에 검기가 꽂히고, 또 꽂혔다.

구구구구구궁!

머지않아 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힘겹게 협곡의 입구까지 내려온 리피와 레티샤의 등 뒤를 거대한 암석이 덮쳤다. 두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이 완전히 파묻혀 수백의 적병들이 단숨에 매몰된 직후였다.

클레이오의 서클이 펼쳐지는 기색을 못 느꼈으니, 필시 이시엘이 홀로 그 일을 해낸 것이리라.

“어떻게든 해내기는 해냈구나.”

“그럼 이시엘인데, 어떻게든 해내지.”

“야, 우리도 분발해야겠음.”

“그걸 말이라고. 검 들어.”

통솔하던 2분대 병사들의 엉덩이를 발로 차 산 아래로 쫓아낸 안젤리움 자매는 운 좋게 매몰을 피한 적병의 잔당이 협곡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셉스의 둥지에선 한참 벗어나 있었는데도 이따금씩 터엉터엉 소리를 내며 굴러 내려오는 낙석이 적잖았다.

마도구 건틀렛을 매개체로 써 [강화]를 마치 방패처럼 두른 레티샤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협곡이 무슨 랑그드샤처럼 부서짐. 근데 마수 얘넨 왜 안 죽는 거야?”

“털이 강철 같잖아. 돌 정도로는 안 죽는 거야.”

산이 무너지면서 마수 오르토스 떼 역시 우르르 아래로 몰려 내려오는 게 문제였다.

앞서서는 적병에게 타격을 입혀 도움이 됐지만, 이제는 리피와 레티샤도 몸을 뺄 수 없는 처지다 보니 놈들을 상대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됐다.

리피는 인체해부학적 욕을 줄줄줄 해대는 레티샤를 은근하게 나무랐다.

“또또 그놈의 상소리.”

“그럼 지금 욕 안 하면 언제 함? 리피 너두 참, 언제부터 글케 고상을 떨었다고.”

리피와 레티샤는 입으로는 티격태격 비꼬고 찌르고 하면서도, 손발을 맞추는 건 한 몸처럼 척척 박자가 맞았다.

레티샤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낙석을 떨어내고, 리피가 머리 두 개인 개 마수 오르토스들을 베었다.

퍼어억―

적병들의 행렬 역시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에테르의 빛에 이끌리듯 안젤리움 자매에게 다가왔다.

그들 중 멀쩡한 몸을 가진 놈은 거의 없었다. 다들 [강화]도 제대로 못 쓰는 것 같은데, 어지간한 부상을 입어도 전투 불능이 되지 않으니 생긴 버릇 같았다.

그리 짐작을 하면서도, 돌덩이에 맞아 두개골이 완전히 함몰된 상태로 덤벼오는 상대의 꼴이 마수보다 더 기괴하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었다.

별수 없이 적들 하나하나의 팔다리를 저미고 심장을 꿰던 안젤리움 자매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야, 근데 놈들 본진이 다 돌더미에 파묻혀서 잔당 잡는 건 금세 끝낼 줄 알았는데… 저기, 산 위가 아니고 뭔 맨바닥에서 쑥 솟아 올라오는 놈들은 뭐임?”

“검붉은 것도 아니고 반쯤 녹아내린 검은 놈들 말이야?”

“어어어어.”

적의 목뼈 사이에 걸려 덜걱이던 숏소드를 콱 빼낸 레티샤는 고민했다.

‘진짜 이게 뭐지? 아까 나오던 놈들이랑 차원이 다른데?’

움직이며 독액을 컥컥 토해내는 놈들의 팔다리는 앞뒤로 기묘하게 꺾여 있고, 검끝에 걸리는 감각으로 미루어볼 때 폐 역시 쪼그라든 지 오래였다.

호흡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시체가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두 쌍둥이들은 몰랐지만 그건 트로모스의 심장이 하나씩 멈추어가며 암흑에 흡수되었던 브룬넨 병사 중 미처 다 융해되지 않은 자들이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리피, 너도 모르겠어? 그럼 알 만한 놈을 잡아서 물어보자.”

“오랜만에 쓸 만한 의견이네. 마침 저기 딱 좋은 놈들이 온다.”

두 사람은 전방을 주시했다.

낙석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부하 일부를 통솔하여 기민하게 대피로를 찾아낸 상급 기사 셋이 숙련된 사냥꾼인 안젤리움 자매의 시야에 포착됐다.

판단력, 에테르 레벨, 통솔력을 종합할 때 저들이 산을 넘어온 병력 가운데 핵심이 되는 장교들임에 틀림없었다.

적들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쌍둥이들은 말없이 눈빛으로 교신을 나누었다.

‘진짜네. 하나는 영관 장교 같기도 한데? 암튼 빠릿하게 구는 거 보니 뭘 좀 알 거 같음.’

‘일단 셋을 떨어뜨린 뒤에 각개격파 가.’

‘좋아.’

리피와 레티샤는 서로 등 뒤를 대고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꾸벅였다.

밤을 가르며 나아간 두 사람은 마치 네 사람처럼 싸웠고, 치열한 전투는 안젤리움 쌍둥이들의 승리로 끝났다.

산을 오를 땐 6레벨이었던 쌍둥이들이 산을 내려올 땐 7레벨이 되었다.

그것은 피에 젖은 영광으로서, 오늘 하루의 싸움이 이룩한 성취가 아니라 그간 사선을 넘나든 전투를 거듭하며 쌓은 경험의 결실이었다.

그렇게 쌍둥이들은 적병의 핵심 인력 셋 중 둘을 포로로 포획하고, 하나를 사살했다.

아래에서 기다리던 병사들은 각자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포로를 짊어진 리피와 레티샤가 나타나자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어린애들처럼 환호했다.

“인자 끝난 거 맞지요?”

“세상에! 지휘관을 잡은 겁니까?”

“역시 중위님들입니다!”

“끝이라고 풀어지지 말고 정신 차리자, 엉?”

.

.

.

그 시각, 협곡의 위쪽.

산이 무너졌는데도 남아 있는 암반 틈새에 기사 한 명과 병사 둘이 몸을 숨기고서 앞쪽의 상황을 주시했다. 그들 뒤로는 한 소대의 정예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미약한 에테르 감응력이 있는 막내 병사가 느긋하게 말했다.

“저기, 활성화된 에테르가 느껴지는디요.”

“그래. 상급 기사지.”

앳된 얼굴의 기사는 붕대로도 지혈이 안 돼서 연신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감각을 집중시켰다.

여름 궁전에 남아 적들의 주의를 끄는 작전의 지휘관은 그였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으나 적병의 공격은 시원찮게 흐지부지됐고, 머잖아 절벽이 무너진 덕분에 아군 병사들은 큰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들은 전신이 피와 먼지로 뒤덮인 데다가, 하나같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살아있었다.

산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자작님이 성공한 것이 아니겠냐며 기뻐했다. 하지만 기사인 그로선 현장을 확인하기 전까진 마냥 기뻐만 할 수 없었다.

하여, 남은 병사들은 병영에 귀환하도록 명령한 뒤, 나무꾼과 사냥꾼 출신이라 산의 지리에 밝은 병사들만 이끌고서 다시 이곳으로 올라왔다.

길잡이 역이던 늙은 상병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기사에게 말했다.

“글타기엔, 붉은 에테르가 아니잖으요. 브룬넨 놈덜은 에테르가 진짜루 다 벌겋던디? 저건 금색인디요.”

“알겠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르도록.”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었다. 병사들은 아직 모르는 듯했으나, 기사는 전방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척이 단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슐리만 키시온 자작은 중급 기사다. 그렇다면 전투 와중에 레벨이 오른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장년의 연령에 에테르 레벨이 상승하는 일은 몹시 드물었다.

애초에 슐리만 키시온은 그리 대단한 에테르 감응력을 지니지 않았고, 5레벨의 실력 역시 오로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어찌됐든 가보면 알겠지.’

기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끌어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본래 안젤리움 영지에서 기사로 복무하던 그는 중앙에서는 병력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룬데인 사령부의 농간에 휘말려 이곳 동북으로 차출되었다.

처음에는 티플라움 광산을 지키는 직무를 받았으나, 우연찮게 슐리만 키시온 자작과 안면을 튼 뒤로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이곳 파리사 시에 재배치를 지원했다.

낙후되고 척박한 땅에서 오래된 방벽을 지키는 슐리만 키시온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기사의 귀감이요, 애국자였다.

기사가 파리사 시에 머무르게 된 지는 아직 한 해가 채 되지 않았지만, 알면 알수록 슐리만 키시온 자작의 성품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자작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기사된 자의 도리 아니겠는가.’

마침내 암석의 그늘을 벗어나 위태롭게 남아 있는 협곡의 상단에 접근한 순간.

기사는 저도 모르게 오금이 풀려 땅 위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거기에 불이 있었다.

압도적이고 순수한 징벌과 대적의 불이.

에테르 감응력이 하나도 없는 상병은 덜덜 떠는 기사를 지나쳐 구르듯 뛰어나갔다.

“소자작님! 이시엘 아가씨!”

저 앞에 앉은 붉은 단발머리의 소자작은, 상병으로서는 아무리 어두워도 잘못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나는 날부터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던 아가씨가 아닌가!

여름 궁전은 통신이 끊겼고 그들에겐 포옹의 반구가 없었던 터라, 병사들은 이시엘과 니네베 연대원들이 지원을 왔다는 사실도 몰랐다.

“다들 일루 와. 불 켜라! 소자작님이시다!”

상병이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소대원들을 모두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이 와아아,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자작님이 성공한 거 맞지요? 적병의 진군을 막아 냈구만요!”

“도대체 언제 여기 오신 거여. 아부지 도우러 온 거 아닌감요?”

막내 병사만이 그들을 따르지 않고, 뒤편에 낙오되어 이를 딱, 딱 부딪치며 떠는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 역시 고개를 땅으로 조아린 채 이시엘을 감히 쳐다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병사들만이 기뻐하며 가스등에 불을 지폈다.

그렇게 문명의 불은 협곡 위의 참상을 드러냈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고, 힘차게 바닥을 딛던 다리에서는 힘이 빠진다.

산 자들은 지독한 꼴로 찢겨 널브러진 동료의 곁으로 다가왔으나 몸을 일으키지도 등을 쓰다듬어주지도 못했다.

가지런히 머리를 눕힌 자세로 수습되어 있는 시신 중엔 도통 사지가 제대로 붙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은 흐느낌 소리 가운데, 이시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품에는 슐리만 키시온이 피에 전 군복을 입은 채 안겨있었다. 영면에 든 제4대 자작이.

이시엘 역시 몸이 온전치 않았다. 갑주는 깨어졌고, 붉은 튜닉은 검은 독에 삭았다. 옷소매에는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묻은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있었다.

부친의 뜨인 눈을 감기고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이시엘이 마침내 두 발로 암반을 디디고 섰다.

이제는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병사들마저 폐가 찌부러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설계된 가스등이 마신이라도 들린 양 마구 일렁였다. 이시엘의 에테르가 짙게 휘몰아치는 탓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병사들은, 이시엘의 양손에 쥐인 것을 본다.

오른손에는 불에 휘감긴 붉은 검이, 왼손에는 시커먼 핏속에서 쪼그라든 수급이 들렸다.

그것은 처단과 승리의 증거물.

이시엘은 제 손에 든 세실의 수급을 높이 들어 올리고서는, 지극히 냉엄한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모두 들으라. 나 이시엘 키시온이, 키시온 제5대 자작으로서 명령한다. 여기 선대를 배신한 죄인의 수급이 있다. 그의 몸을 산중에서 삭게 하라.”

이시엘 키시온 제5대 자작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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