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387화 (386/489)

#387

귀향 (1)

죄인의 사체를 까마귀와 산짐승의 밥이 되도록 던져두는 것은 배신자에게 내리는 합당한 형벌로써, 키시온 영지의 오래된 관습법이었다.

슐리만 키시온은 자애로운 영주였으나, 역사 동안 키시온의 모든 영주가 그럴 수는 없었다.

초대 키시온 자작은 압살롬 2세의 가신으로서 오로지 무력으로 작위와 영지를 얻은 자였다. 그 이후 이 험한 동북을 지켜온 이들이 어찌 다정하기만 한 영주였을까.

이시엘 키시온 역시 압살롬 2세와 함께 산을 넘었던 자의 후손이었다.

잘 트이지 않는 숨을 컥컥 힘겹게 내뱉던 병사들은 동물적 본능으로 명령에 따라 힘 앞에 복종했다.

그들의 엎드린 등 위로, 서쪽으로부터 뻗어온 [정화]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일출은 멀었으나 밤은 거기에서 끝난다.

1896년의 첫날은 평생 잊히지 않을 긴 밤이었다.

.

.

.

1896년의 첫날에서 두 번째 날로 넘어가던 자정 무렵.

살아남은 동북수비군 병사들이 자작과 동료의 시신을 수습해 키시온 자작저로 돌아왔을 때, 이미 사망자의 시신은 시커멓게 썩어 녹아가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이시엘이 귀환한 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홀로 자작저로 돌아왔다.

그는 횃불을 낮처럼 밝혀 둔 자작저 마당에서 세실과 트로모스가 살해한 희생자들에게 즉시 [정화]와 [보존] 마법을 걸었으나, 이미 독에 녹아버린 부분까지 원래대로 되돌릴 순 없었다.

[복원] 마법 역시 적용이 불가했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사자(死者)의 시신에는 듣지 않는 마법이었다. 메이지 마스터조차도 그 법칙을 바꿀 수는 없고, 연병장을 밝힌 마법식만이 무력하게 찬연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몇 없는 에테르 감응자들은 데르니에 대륙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확하게, 이 밤 세상을 뒤덮고 한순간 에테르의 흐름마저 끊어놓았던 마법의 시전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불발의 마법마저 이토록 장엄하고 고절한데, 성공한 마법은 그리도 초월적이었던 것이 당연하리라.

그들은 감탄을 넘어선 외경심을 느꼈다.

그 감정에선 기젤라 클라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카스퍼와 릴리안이 다리아와 에즈라를 듀브리스로 모셔간 후, 통신병과 함께 사령실을 지키고 있던 기젤라는 듀브리스 기차역 역장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다가 좁은 창을 뚫고 들어오는 에테르의 빛에 놀라 그만 수화기를 턱 놓쳤다.

그녀 역시 뛰어난 기사였고, 클레이오와 공사 모두 가까운 축에 속했다.

저 마법사가 어려울 것도 없다는 태도로 청량하게 식혀주는 샴페인을 맛봤고, 비틀어진 팔꿈치와 부러졌던 발목도 그의 마법으로 온전하게 치유받았다.

그가 벌이던 대규모의 정화 아래 죽어가는 이 살아나는 것을 여러 번 마주했고, 검은 독의 병사들이 독의 힘을 잃는 것 역시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고절하기가 그지없으며, 다시 있기 어려운 마법 능력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다음이 있었다니. 저것이 사람의 힘이란 말인가….’

이제 메이지 마스터가 된 클레이오의 에테르는 황금빛이 아니다.

따스했던 기운이 탈색되어 이제는 서늘하게만 느껴지는 백금색 서클 주변을 감도는 빛은 거룩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선이 엉클어진 수화기 너머에서 듀브리스 역의 역장만이 소리를 높여, 두 마법사를 보내 선로와 역을 복구하고 중상자를 치유해준 사령부에 열렬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 두 분이 와 주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피해가 커졌을지 모릅니다. 심각한 유실 구간 앞에서 피난민 수천 명의 발이 묶이고 검은 어둠은 덮쳐오는데, 그 두 분께서 나타나셔서 불을 밝히고 선로를 복구해주셨지 뭡니까.

또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젊은 역무원과 군인들이 낮은 어둠에 발목이 잡혀 다쳤던 것을 세르게프 소령님께서 모두 고쳐, 감사의 말을….”]

***

아서 리오그난은 또다시 환시를 본다.

아니 이것은 환시일까? 꿈일까? 현실일까? 그것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는 은밀히 흐르고는 지워져 버린 잔인한 세월을 본다.

여러 소드마스터와 함께 전장에 나아가고도 이기지 못한 전투를 복기한다.

발전소의 부품이 기능을 멈추고, 풍요한 대지가 얼어붙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절규를 듣는다.

고작 그림자 거미 따위 하찮은 마수가 병사들의 목줄기를 물어뜯는 걸 저지하지 못하고, 검기를 잃은 검의 시린 냉기를 느낀다.

폐절된 에테르를 간구하며 절망 속에서 차가운 검날을 쥘 때 손가락을 파고들던 금속의 감각을 느낀다.

그것은 있었던 일인가, 일어날 일인가?

아서는 저의 인식에 제 것이 아닌 예지가 스미게 되는 때의 조건을 안다.

클레이오가 성흔을 써 시간을 되돌린 순간, 세상은 조밀하던 연속성을 잃고 시간의 법칙은 불능을 시인한다.

한때는 제가 없는 곳에서 그가 신의 대리인으로 권능을 행사할 시, 아서는 아무것도 몰라야만 했다.

하지만 세계 전체의 에테르가 그 애의 움직임에 복종하자, 데르니에 대륙의 최남단에 잠든 아서에게까지 성사의 여파가 다다른 것이다.

유일한 예언의 마법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정렬을 뒤바꾸고, 영원의 법칙을 다시 쓴다.

그 시간 속에서 심장은 거꾸로 뛰고, 내뿜어진 숨결은 사람들의 몸속으로 되돌아간다.

예외는 클레이오와 아서 자신뿐이다.

이제야 비로소 아서는, 운명이라는 개념에 대해 기존과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건 일종의 논리학적 문제로 기실 아서가 썩 뛰어나지 못한 분야이다.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

자신은 신녀로부터 태어나 예언을 듣고 환시를 보는 사생아 왕자였다.

한 시대를 저 혼자 바꿀 신적인 영웅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저가 그저 범속한 범부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기 판단은 유효성을 잃었다.

아서 자신이 그러하기를 지극히 바란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됐다.

진실로 자신을 그저 한 왕국의 왕으로, 고작 한 세대의 통치 이후에는 왕관을 내려놓아야 하며 권위와 권력을 의회와 나누는 것이 마땅한 위정자로 만들기 위해 신은 그 모든 비극을 안배했단 말인가?

아서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짐작할 수 있다.

여신은 분명 그의 대리인과, 또한 자신에게 완수케 하고자 하는 더 큰 사명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클레이오 아세르의 지독한 헌신과 희생은 납득 가능한 것이 아니다.

펜을 든 클리오 여신은 현재를 기록하여 미래의 과거를 정의한다. 므네모시네 여신의 아홉 자녀 중 가장 큰 권능을 가진 이는 실상 클리오가 아니었을까?

클리오의 이름을 받은 클레이오는, 역사와 또 새로 쓰는 역사 속에서 정신과 신체 모두 마모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십 대였던 아서가 가졌던 예감은 맞았다.

클레이오는 어딘가 더 먼 곳에서 더 큰 쓰임을 가진 이였으며, 그가 쓰이는 곳에 언젠간 자신 역시 쓰이게 될 것이다.

소드마스터에 이르렀는데도 드러나지 않은 칭호, 무언가의 지연자. 그 이름이 명백히 밝혀질 때 ‘쓰임’의 정체 역시 드러날 터였다.

그러나 언제?

언제가 끝이란 말인가?

아서는 기다림에 익숙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다림은 마음을 닳게 한다.

허공에 서 있던 아서의 발아래에 청량한 강물의 흐름이 생긴다. 야트막한 개울은 맨발과 발목을 부드럽게 쓸며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분수대로부터 흘러나오는 개천의 물은 청금빛이고, 청금빛 물가에서 이파리를 파득거리는 월계수 나무의 잎은 비취로 만들어졌다. 벌판의 연보랏빛 풀들은 나긋한 바람을 따라 한들거렸다.

아서는 비단 같은 감촉을 지닌 풀잎을 쓸어보다가 두 발목 사이로 흐르는 물결을 가벼이 튕겨 본다.

물방울은 금분이라도 섞인 양 각도에 따라 색을 바꾼다. 그 물속에 또 다른 세계가 떠오른다.

시간의 틈새에서, 다시 흐르게 된 것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채 아서는 물에 거꾸로 비친 세계를 본다.

재와 강의 도시에서 거울 조각을 품은 탑이 뻗어 있었던 호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자남빛 강물 속으론 낯설고 익숙한 두 세계의 그림자가 겹쳐지다가, 위태로운 파문을 따라 흩어진다. 한 차례 얕은 파도가 일면 포말 아래선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물굽이 아래로 하얀 책등이 비석처럼 늘어선 서가가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또한 물에 휩쓸려 사라진다.

부자연스러운 암전.

다시금 시간의 틈새는 봉합되고 과거와 미래는 한 번도 전후의 연계를 잃지 않은 것처럼 이어진다.

돌연 아서의 눈앞이 어두워진다. 여신의 두 손이 그의 눈을 가린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에게 허락된 목격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의 틈새가 찢고 간 제 이마의 상처와 손등에 팬 상흔처럼, 완전히 맞물리지 못한 시간의 틈새가 드러내 보인 것은 필시 표면 너머의 진실이다.

아서는 맥락도 전후도 알지 못하며, 클레이오에게는 말하기가 금지된 신의 지식.

그는 숨을 죽이고 제 존재를 가라앉힌다. 없는 듯이 살며 모든 것을 보는 일은, 아서에게는 숙달된 행동이다.

짐승의 안광처럼 형형한 빛이 도는 청록색 눈은 크게 뜨여 장막처럼 드리운 암흑의 저편을 본다.

어떤 기억들은 소리와 빛의 파장 없이도 앞을 볼 수 있게 한다. 파도 소리. 계속해서 부닥치는 인력의 작용. 또, 파도 소리.

아서는 식은땀에 젖어 눈을 떴다.

헛헛한 허탈함과 기묘한 예감이 어우러져 속을 진창으로 얽어 놓았다.

에테르 고갈로 인한 깊은 잠은 자고 난 후에도 진득한 탈력을 안길 뿐, 피로를 회복시키거나 기력을 돋워주지는 못했다.

잠들지 않아도 유지되던 몸의 체계가 완전히 교란되고, 팔다리가 축축 늘어지는 느낌이 불쾌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는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달칵.

“일어났냐?”

장식 없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첼이었다. 풀기도 안 가신 셔츠에 조끼 차림인 첼의 얼굴이 수척했다.

게다가 의복 역시 모조리 맞춤인 평소의 제 옷이 아니라 그런지 허리와 품이 한 줌씩 남도록 컸다.

남색 머리는 아무런 꾸밈없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고, 길이가 맞지 않아 걷어 올린 소매 아래 양손엔 신문 뭉치가 들려 있었다.

신문을 협탁에 내려놓은 뒤,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 아서를 살피던 첼이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꿈 아니니까 확인 안 해도 되고. 정신 차리지그래. 꼬박 사흘간 병원 신세 지는 소드마스터라니, 아무래도 면이 안 살지 않아?”

아서는 그제야 제가 누웠던 객실이 병실임을 깨달았다.

좁지만 깨끗한 작은 방은 회칠을 한 벽도, 시트도, 커튼도 온통 희었다. 숨을 들이켜자 공기 중에 떠도는 [소독] 마법의 여운이 감지되었다.

반쯤 열린 창으로는 바닷가의 짭짜름한 공기와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온다.

테르게스티는 항구였다. 이것이 꿈속을 휘젓던 파도 소리의 실체였을까?

“지금이 몇 시지?”

첼은 보란 듯이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척 들여다본다.

“1896년의 1월 3일 07시 47분이 지나가고 있군. 이 몸이 한 해에 단 하루뿐인 탄신일을 무참하게 건너뛰고 깨어난 지는 2시간 15분가량 지났고 말야.”

아서보다 먼저 의식을 되찾은 첼은 전화를 통해 키시온 영지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도시의 대부분이 잠든 새벽 시간을 놀랍도록 알차게 썼다.

아서와 자신이 잠들어 있던 지난 이틀간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효율적으로 정리해온 것이다.

압살롬 방벽을 넘어온 브룬넨의 대군과 새로운 히드라의 독.

티플라움 광산의 폭파.

적의 대군을 자력으로 막아낸다면 직권으로 상속법을 개정해 주겠다던 멜키오르의 전보.

키시온 자작의 사망과 여름 궁전의 파괴.

메이지 마스터가 된 클레이오가 펼친, 그러나 아직 대중에게 공표되지 않은 대정화의 마법.

두 쌍둥이의 7레벨 달성.

또한 7레벨과 불의 성흔을 얻은 이시엘.

하나하나가 경천동지할 내용인데도, 툭툭 간결하게 보고를 마친 첼은 냉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우린 모가지 받을 준비나 하라 이거지.”

“누구의 목?”

“세실 휴잇. 여름 궁전 결계를 안에서 연 배신자의 수급.”

세실의 이름을 부르는 첼의 어조에는 세련된 경멸이 아니라, 까끌한 분노의 파편이 묻어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