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귀향 (4)
“아서 왕자님의 말씀이 맞는지 나 수도방위대 마법단 단장 타디우스 예츠켈이 검증해 보겠습니다. 여신께 맹세컨대 진실만을 말하리라 선언합니다.”
수도방위대 마법단 단장이자 룬데인 군사병원 원장인 7레벨 마법사는 장갑을 낀 손으로 유리병 안의 내용물을 살피고, 서클을 열어 [추적][분석] 마법식을 펼쳤다.
그는 곧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세실 휴잇 키시온의 시신에는 히드라의 독 복용자의 전형적인 증상이 모두 나타납니다. 피가 검게 변했고, 에스라의 철필 성분이 검출됩니다.
알려진바, 공격을 받아 생긴 중독으로는 혈관까지 검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본래 에테르 미감응자이던 자의 몸속에 상급 레벨의 에테르 반응이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히드라의 독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타디우스는 제 이름으로 감정 결과를 보증했다.
이미 기세에 밀려 있던 귀족원 의원들 사이로 경악이 퍼져나갔다.
‘히드라의 독이라니….’
‘휴잇 가문에서는 어쩔 것이오.’
알비온 측에서는 구하기가 불가능한 적측의 비밀 병기 히드라의 독을 입수해 복용한 것만으로도 내통의 죄를 따져 물을 수 있는데, 중대한 반역인 결계 파훼와 선대 자작을 살해한 죄까지 더해졌다.
역시 상원에 출석해 있던 휴잇 후작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오래전 양자로 보낸 이이니 본가의 일이라 할 수 없소. 본인은 기사 이시엘 키시온이 키시온 제5대 자작의 자작위를 승계하는 것을 지지하오.’
그로서는 양자를 보낸 것도 자신들의 뜻이 아니었고, 양자가 저지른 일 또한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화급히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저 변방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짜 내막을 어찌 알겠는가. 키시온의 딸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조작이 아니냐 수군거리던 늙은 귀족들의 거만한 귓속말조차 충격적인 증거물 앞에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장미의 난 이후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에드워드 왕을 폐위하고 로사 페히테를 강등시키는 데 직접 손을 보탰던 이들은 대개가 정계를 떠난 뒤였고, 법안 개정의 강경한 반대파이던 크뤼엘 공작이 아슬란을 따라 브룬넨으로 전향해버린 뒤였기에 저항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귀족원 의장인 페텐카 세르게프는 군사위원회를 종료했다. 말이 군사위원회였지, 실상은 법안 개정 예고였다.
절도 있는 걸음으로 들어온 의회 서기가 안내문을 크게 읽었다.
“내일 이 시각 무가의 상속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이 있을 예정이니, 출석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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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이렇듯 무리한 일정으로 표결을 밀어붙이고, 정식적 검증 과정보다는 공연에 가까운 짓을 벌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멜키오르나 신귀족 일파가 규칙의 세부를 낱낱이 따져 들면 불리한 쪽은 오히려 이쪽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니네베 연대원들이 룬데인 사령부의 명령 없이 근무지를 이탈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대중의 주목과 세간의 의견이 한 방향으로 몰아칠 때 그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요란하게 룬데인에 도착해 귀족원을 뒤집어 놓은 그날 저녁에는, 예상대로 룬데인 사령부에 불려 갔다.
피어스 클라겐이 폐인이 된 지금, 왕실 기사단 단장을 맡게 된 태서턴 트리스테인이 그곳에 있었다.
룬데인 사령부 최고 지휘관인 멜키오르는 출석하지 않았지만, 태서턴은 멜키오르의 뜻을 그대로 표하는 자이니 구분해 보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한데, 그 자리에서 입을 연 건 은퇴한 장성 출신의 군무대신이었다.
본래의 직위 체계에 따르자면 트리스테인 공작이 아서를 심문했을 자리였으나, 태서턴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졸지에 너무 많은 책임을 지게 된 군무대신은 불편한 얼굴로 테이블의 상석에서 구물거렸다.
“보고는 받았네, 리오그난 대위. 하지만 지적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냐.
키시온 영지에서는 지휘관이 정식으로 지휘권 위임을 한 바가 없고, 테르게스티의 니네베 연대 역시 사령부의 재가 없이 움직였지. 이건 국제적 문제야. 일개 대위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네!”
“하지만 니네베 연대는 승리했고, 브룬넨군의 무작스런 공격을 모두 격파했지 않나.”
테이블의 맞은편에 버티고 앉은 아서는 경칭을 완전히 생략했고, 군무대신에 대한 예도 표하지 않았다.
오로지 군인처럼 처신하던 의회에서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였다.
당황한 건 군무대신 쪽이었다.
사문이 시작되기 전 태서턴에게 제대로 아서의 실책을 따져 물으라는 언질을 듣기는 했으나, 소드마스터인 아서에게 맞서기엔 군무대신의 기백이 약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리오그난 대위?”
아서는 상처로 인해 끊긴 왼쪽 눈썹을 부러 휙 휘었다.
“토비어스 경,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나, 아서 리오그난에게.”
“아니, 이 자리는 니네베 연대 소속의 기사를 문책하기 위한 자리이지, 왕족인 신분을 내세우는….”
“매슈 토비어스, 나는 이 자리에 일개 대위로 와 있는 것이 아니네. 내 조상이 건국한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게 상이 아니라 벌을 주어야 한다는 자들의 머리를 일깨우러 온 것이지.”
군무대신은 제대로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아서에게 밀렸다.
“아서 전하…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것이 아니옵고.”
아서는 ‘리오그난 대위’가 아닌 ‘아서 레오니드 리오그난 왕자’로 태도를 일관하며 군무대신의 압박을 무력화했다.
오로지 타고난 지위와 핏줄만을 이용해 의견을 관철하는 건, 아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아서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가 테르게스티에 간 것도, 클레이오와 친구들이 키시온으로 간 것도, 모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자신 혼자만이라면 영창에 들어가도 좋고, 직위가 해제되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서에게는 니네베 연대가 힘겹게 성취한 승리에 올바른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의무가 얹혀있었다.
전쟁 내내 상처 입고 죽어간 사람들의 최종적인 명예가, 그들이 가진 ‘니네베 연대’라는 이름이, 공통의 기억 속에 차지할 위치가 지금 정해지는 것이다.
군무대신이 꼬리를 말자 훈장만 화려한 늙은 군인들 역시 기세가 죽었다.
사령부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태서턴 트리스테인 공작은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문책은 형식적으로만 끝났다.
그는 오로지 아서를 지켜볼 뿐이었는데, 그 짙은 남색 눈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밤의 바닥처럼 깊은 눈에는 흔한 경멸이나 미움조차 없이 불길하게 어둡기만 했다.
아르모리크 공작과 공작의 주인은 무엇을 꾸미는 것일까? 불길한 침묵과 도사림 아래 놓인 독과 칼의 정체는 무엇일까?
‘뭐, 닥치면 알 수 있겠지.’
언제는 그의 인생에서 환란이 정확한 형태를 알리고서 닥쳐왔던가.
미래의 흐릿한 윤곽은 그것이 현재가 되는 순간에서야 올바른 맥락을 얻었다. 앞뒤와 전후를 모두 알지 않고서는 예지 따위 소용이 없었다.
아서의 각오는 단순했다.
무엇이 다가오든 넘어서면 될 일이었다.
그는 흉한 예감에 휘어잡혀 행동을 멈추는 대신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다음 날도 멜키오르는 아서가 올린 형식상의 접견 요청을 거절했고, 건강을 구실로 대며 두문불출했다.
당분간 국왕 대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아서로서는 운신의 여지가 더 커진다.
그날 오후엔 키시온의 경비병들이 기차를 타고 수도로 왔다.
사투리를 쓰는 키시온의 경비병들은 총구같이 겨누어진 카메라 렌즈와 시체 앞의 하이에나처럼 모여든 기자들 면전에서도 떨지 않고 증언을 해냈다.
웅장한 의회에서 역시 그들은 꿋꿋하게 굴었다.
“그, 정식 후계자란 넘이 말이에요, 자작님이 주신 단검으로 결계의 티플라움 철사를 탁 끊어놨다 이 말이에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여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와이어가 끊어지믄서 결계가 뚝 멈췄습니다. 검고 벌건 에테르를 잔뜩 흘리는 적병이 밀려들면서 우리 동료들이 무수히도 죽고 말았습니다.”
증언자들의 말을 받아 적는 속기사들의 손이 빨라졌다.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시커먼 에테르를 뚝뚝 흘리는 세실의 수급이 기자들에게도 모두 공개된 판국이었다.
이때도 증인 ‘리오그난 대위’의 신분으로 의회에 나타난 아서는, 수 대에 걸쳐 고귀한 피를 흘린 가문이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날 있었던 무가의 상속법 개정안 표결 결과는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이로써 무가의 상속법에 대한 수정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성별에 무관하게 적법한 후계자가 영지와 군사를 상속받을 수 있으며….”
국왕 대리의 특별 재가(裁可)가 아니라 정식으로 상원에서 표결을 거친 법안 개정이었다.
상원의 표결을 반려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원 역시, 이번만은 미적지근한 지지를 보냈다.
페텐카가 의장이 되고부터 준비해온 데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무척 적은 ‘무가의 상속’에 관한 사안이다 보니 개정은 속결로 이루어졌다.
사실상 그 법은 이시엘 키시온을 위해 개정된 것이었다.
이시엘은 정식으로 명부에 이름을 올린 키시온 제5대 자작이자, 전후엔 동북수비군의 변경백이될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권리 주장에 당사자가 나서서는 입장과 명분이 퇴색된다.
고결과 용기 같은 가치를 자신의 입으로 주장하는 기사를, 그 누가 진정 고결하고 용기 있게 보아주겠는가?
그래서 아서는 이시엘을 대신하여 그녀에 대해 증언했다.
여성이고, 연소하며, 고귀한 성흔을 지닌 상급 기사는 대중의 큰 관심을 샀다.
요 며칠은 황색지들마저 이시엘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멜키오르나 베스나가 어깃장 놓는 수를 하나도 쓰지 않은 덕인 듯했다.
<이시엘 키시온 제5대 키시온 자작, 선친의 권리를 되찾다>
<대를 이은 영웅적인 헌신!>
그리하여 무가의 상속법 개정안의 첫 번째 수혜자가, 이시엘 키시온임이 온 나라에 알려졌다.
평민들은 어려운 시절을 지나 알비온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 간다고 여겼고, 테르게스티와 키시온 영지의 대승을 바로 그 상징으로 보았다.
일어날 뻔한 참사는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소비된다.
하마터면 온 도시가 멸망했을지도 모를 듀브리스의 참상은, 뒤늦게 파견된 기자들의 사진과 기사를 타고 서서히 퍼졌다.
듀브리스행 기차에는 조사단 자격으로 타디우스 예츠켈도 탑승했었다.
동북에서 암흑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디까지 펼쳐졌을지 모른다는 예츠켈 단장의 조사 결과 발표는 룬데인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도를 떠났던 귀족이나 상층 부르주아들도 비워두었던 저택으로 하나둘 돌아왔다.
수도에 남았던 사람들은 전쟁에서의 희생과 그들이 승리를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티플라움 광산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전쟁으로 돌려 전비(戰費) 부담이 적었던 것이 오히려 시민의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었다는 분석 기사가, 복간된 <클라리온>에 실리기도 했다.
이제껏 룬데인 사람들에게 전쟁은 갑작스레 나타났다가 사라진 브룬넨의 비행선이고, 어느 순간부터 밀려드는 피난민들이며, 슬금슬금 오르는 빵과 버터의 가격이며, 도시의 저택을 비우고 시골로 가 버린 귀족들의 부재였다.
혼란과 불안은 가득했으나 당장 부모와 자식이 모두 전사하고, 내일 먹을 빵이 없어 죽음의 투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티플라움 광산은 복구가 요원하고, 무역은 타격이 불거지며, 동부의 더럽혀진 토지로 인해 산출량이 줄어든 식량, 피난민들로 인한 주택난까지, 더 이상 봉합할 수 없는 문제들이 차례로 터져 나왔다.
전시 체제의 삐걱임이 사회 문제의 불붙은 도화선이 되고 있는 시점에, 멜키오르는 여전히 은둔하고 있었다.
클라렌던 하우스의 지긋지긋한 침묵은 선보여진 지 오래인 멜키오르의 권능마저 빛바래게 했다.
멜키오르의 은신이 길어질수록 반대급부로 아서에 대한 기대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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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수도방위대 기사단의 장교 숙소에 딸린 접견실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왕세자 근위대가 왕실 기사단의 직위를 물려받기는 했어도, 그들의 본진은 헤브론 성이었기에 부대시설은 수도로 귀환한 니네베 연대원들이 사용했다.
여러 번 개축해 시대 양식이 모호하고 내부 마감도 온통 낡아버린 그 소박한 장소는 아서와 첼이 전략적으로 구축한 대외용 채널이었다.
그들은 기사이고,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자산은 ‘전쟁 영웅’이자 ‘숭고한 희생자’라는 이름이다.
전선에 한 번 들른 일조차 없는 병약한 국왕 대리와 수도에서 세력을 보존하고 있던 그의 근위대는 결코 가지지 못한 가치였다.
아서의 목적은 이시엘을 5대 자작으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었다.
실라 홀링워스는 미리 언질을 다 들어놓고도 마치 난생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접견실 안에는 사진사와 막내 기자가 동석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성당 영웅의 홀 말입니까?”
“네. 영웅의 홀입니다. 슐리만 키시온 경의 이름은 크게 새겨져야 할 겁니다. 레오니드 1세 이후 알비온에, 하룻밤 동안 천 명의 기사를 막아내야 했던 사령관이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고인은 대성당 납골당에 묻힐 자격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