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407화 (406/489)

#407

이 배반은 고귀하지 않다 (5)

여기 지하 감옥에 와 있는 것도, 하나 남은 포로를 심문하려고 하는 것도, 모두 클레이오의 독단이었다.

하지만 편집자 권한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자신은 신 대신 인간의 방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약 없이 길어지는 이번 장은 때로 클레이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신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

클레이오의 권한은 진정 되돌려지는 것인가?

수도로 돌아와서 단 한 번 대주교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끄트머리가 짧아진 흰 머릴 늘어뜨린 채 잠든 레지나는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한층 더 존재감이 옅어진 옆모습은 오건디1)로 잘라낸 그림자 인형 같았다.

넘쳐나는 에테르를 가진 마법사는 충동적으로 [경감]을 일으켜 대주교의 주변을 씻어내려 보았으나, 어떤 치유의 마법도 레지나 이스토리아를 현세로 불러오지 못했다.

그녀는 일어나야만 하는 순간에만 일어난다.

클레이오가 아무리 바란다 해도 지금은 아니다.

그는 고독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시간을 돌이킬 권능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하는 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

호안석을 쓴 [경감]은 올바른 해결책이었다.

마법을 쓴 그다음 날 다시 구금실로 가보니 브룬넨 장교는 본래 가졌을 이성적인 눈빛과 단정한 몸가짐을 되찾았다.

클레이오가 이곳에 드나든 이래 처음으로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구금실의 심문용 책상 맞은편에 앉은 옅은 금발과 흐린 푸른 눈을 한 남자는, 이때에야 비로소 브룬넨의 고위 장교로 보였다.

검을 오래 쓴 사람답게 어깨가 발달했고, 단단한 윤곽에선 평생 혹독한 단련을 이어온 태가 났다.

멜키오르가 머리를 휘저어놓기 전까진 좁은 수옥 안에서도 단련을 해왔는지, 타고난 골격의 강인함이 여전했다.

키는 클레이오가 더 컸지만 포로 쪽이 심문자보다 훨씬 체격이 좋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으니,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처럼 신체의 부피에 차이가 났다.

장교는 수갑도 채워져 있지 않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에테르는 완전히 차단되었을지라도, 그의 육체 자체가 순수한 폭력 행사에 숙달된 자의 서슴없는 태도를 전시했다.

그에 굴하지 않고 클레이오는 심문에서 필수적인 첫 질문을 했다.

최소한의 힘만 쓰려는 듯 사무적인 어조였다.

“? 이름, 소속, 지위.?”

클레이오의 지치고 앳된 얼굴을 무례하게 뜯어보던 중년의 남자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

“조지 새들리어, 마인라트 기사단, 대령.”

브룬넨어로 물었는데 답변은 알비온어로 돌아왔다. 심지어 외국어로서 배운 제2언어가 아니라, 출신 지역의 억양이 드러나는 모국어였다.

낮게 깔리는 굵직한 바리톤에다 명령을 하는 데 익숙한 어조였다.

클레이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심문을 이어갔다.

“알비온 남부 출신이었군. 크뤼엘 기사단의 배신자인가?”

“내가 여기 갇힌 지가 벌써 반년인데 그걸 이제야 알다니, 은총의 마법사께서는 허술한 구석이 있소. 하지만 배신자보다는 전향자가 좀 더 낫게 들릴 것 같구려.”

멜키오르가 머릿속을 휘저어 폐인이 되다시피 한 걸 에테르가 잔뜩 털리는 마법을 써 돌려놓았더니 한다는 말이 저랬다.

평소의 클레이오라면 좀 울컥할 만한 소리였지만, 미리 켜 둔 「이격」 덕에 노련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사는 별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코트 주머니에서 시가렛 케이스를 꺼냈다.

구금실을 만들기 위해서 지하를 드나드는 동안 다시 피우게 된 담배였다.

물론 전선에서 피우던 조악한 것은 아니고, 그레이어 상점에서 취급하는 향기롭게 블렌딩한 제품이기는 했다.

어차피 피우면 목이 칼칼한 건 똑같아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디오네는 소매깃에 남는 향이 다르다고 강변하며 시가렛 케이스를 갖다 안겼다.

‘무조건 이걸로 피우는 거예요. 그치만 많이는 안 돼요. 여기 갖다준 한 박스로 만족하세요. 이 블렌드는 한정판이니까요.’

그렇게 단언한 디오네는, 두 번째 박스는 진짜 영영 배송해주지 않을 태세라 담배를 아껴 피워야 했다.

덕분에 클레이오의 흡연량은 크게 늘지 않았다.

사실 이 순간에도 담배가 말려서 궐련을 꺼내는 건 아니었다.

클레이오도 전선에서 사람을 다뤄보았다.

그는 타고나기를 신체적인 위압감을 주지 못하는 타입이므로, 정신 못 차리는 놈들 머리를 번쩍 깨어나게 해줄 일이 왕왕 있었다.

달칵.

폭력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기름한 손가락이 은제 시가렛 케이스를 젖힌다. 손이 움직이면서 커프스 사이로 공작의 깃 끄트머리가 얼핏 보였다가 다시 사라진다.

얄팍한 입술이 움직대는가 싶더니, 입 안에서 단어를 굴리는 뭉툭하고 불분명한 소리가 나고는.

치익―

곧바로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부러 심문자를 긁어놓기 위해 선공을 했던 조지는 완전히 제압된 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클레이오가 보여준 건 진언이 ‘거의 없이’ 펼쳐지는 마법이었다.

이 구금실은 7레벨까지의 에테르 감응자에게만 효력이 있었다.

조지 역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시험해 보았지만, 이전의 감옥처럼 대량의 에테르로 티플라움 장치의 약한 고리를 끊어내는 파훼법도 듣지 않았다.

800킬로그램의 티플라움에 오로지 마법만 쏟아부어 판금했고2), 거기에 마법식을 새겨 사방에 바른 공간이었다.

이 안에서 클레이오는 편하게 마법을 쓸 수 있으나 조지 자신은 검기를 쓸 수 없다.

기사가 제아무리 뛰어난 신체 능력과 반응 속도를 가졌다 한들 에테르의 강화를 입지 못한다면 그저 단련된 사람의 힘밖에는 내지 못한다.

통상적으로 마법이란 발동에 시간이 걸리는 기술이다. 그래서 마법사라면 으레 근접전에 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기의 메이지 마스터에게는 그런 허점이 없었다.

“하나 더 알려주자면, 이 마법의 불은 연소의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타오를 수 있다. 인체에 해를 끼치는 마법은 일으키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지만, 때로는 법칙도 개정된다는 걸 자신의 몸으로 시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아.”

조지의 긴장한 시선이 클레이오의 손끝, 작게 반짝이는 불씨에 저절로 따라붙었다.

저 불을 지금은 담뱃대 끝에 붙였지만, 같은 불을 심장의 동맥에, 눈 속에, 머릿속에 일으킨다면.

저 마법사는 분명 그렇게 할 수 있다.

단숨에 조지의 기세가 꺾였다.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던 클레이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네게 아직도 광을 내야 할 명예가 있다고 여기면 곤란해. 그건 네가 붉은 검기를 일으켜 동료를 베고 국경을 동쪽으로 넘을 때 이미 사라진 거야.”

클레이오의 어조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밋밋했고, 성인 남자치고 다소 가느다란 목소리엔 의욕도 무엇도 없었다.

「지각」을 켠 채로 흡연을 하니 띵한 느낌이 커져 머리가 몽롱하고 몸이 쳐지기 때문이었지만, 책상 맞은편의 포로는 그 사실을 몰랐다.

말의 힘은 목소리의 깊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을 듣도록 강제하는 위력에서 온다.

“내가 여기서 그대로 네 심장을 멈추어도 넌 그걸 눈치채지조차 못할 텐데. 너희가 그리 신봉하는 힘의 논리라면, 내게 감히 대항조차 하지 못하는 넌 그에 마땅한 복종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조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날 것의 감정이 드러났다. 증오, 분노, 수치심. 심문은 효력이 있었다.

“타고난 천재인 당신이 뭘 알겠소.”

한때 수도방위대 학교의 결격생이었던 클레이오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 세상에서 마법의 관용구는 ‘여신의 은총’인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클레이오는 여신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긴 했다.

“내가 범재로 태어났다 한들 민간인을 희생시킨 실험으로 만들어낸 독을 마시진 않았을 것 같지만 말이지. 스스로의 인생을 망친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천의 병사들에게 같은 독을 먹인 짓은 어떻게 변명할 건가.”

“히드라의 피를 마시기로 결정한 건 병사들 자신의 선택이었지. 강제로 주입이라도 한 줄 아시오? 그건 그들 모두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였소.”

붉은 에테르를 쓰는 병사를 양산할 땐 총칼로 위협해 독을 먹이진 않은 모양이다. 그건 프란시스의 취재 내용에도 나왔다.

대신 징집병에게는 말도 안 되게 긴 복무 기간의 단축을, 농노라면 면천을, 죄인이라면 사면을 미끼로 걸었다. 유형지의 수형자들에겐 독을 피한다면 열악한 험지로 보내겠다고 윽박질렀다.

‘그걸 강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신의 권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이런 짓을 해대는 것이 인간이니, 여신은 편집증 환자처럼 세계를 조정하려 드는 게 아닐까, 하고.

“너는 전투의 막바지에 포로로 잡혔잖아. 그럼 분명히 봤겠지. 너희들이 풀어놓은 검은 괴물이 브룬넨 병사들을 집어삼켰던 것을. 거기 삼켜지지 않은 자들도 정화의 빛을 받으니 녹아내려 버렸지.

그래, 알비온과는 적이 되었으니 공격할 수 있다고 치지. 허나 아군의 생명조차도 그리 하찮게 취급해서 제대로 된 군인이나 기사라 할 수 있나? 병사가 모두 죽어 나자빠져도 광산을 점령하기만 하면 작위를 받을 수 있으니 상관없었나?”

마지막으로 개량된 히드라의 독은 브룬넨 병사들의 무력은 크게 높여주었으나 후유증이 끔찍했다.

트로모스의 영향도 있어서 그랬겠지만, 독에 몸을 완전히 침식당한 자들은 ‘낙원의 들판’이 펼쳐진 빛 속에서 검은 진액처럼 몸이 녹아버렸다.

전투와 정화가 완전히 끝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전에 히드라의 독을 마신, 상급 레벨에 달한 장교 몇뿐이었다.

그 독은, 실로 저주였다.

그러나 조지는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지. 나도 듀브리스의 영주가 되고 싶었지. 참으로 달콤한 제안이지 않소? 알비온은 말이야, 다 늙도록 4레벨 기사이던 나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테니까.”

현재 6레벨을 가진 조지는 에테르의 독을 마시기 전에는 4레벨 기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점에 강한 유감을 가졌던 듯했다.

에테르 레벨은 노력보다는 자질의 영향을 받는다. 평생을 엄격하게 수련했던 선대 키시온 자작도 에테르 레벨은 딸인 이시엘보다 낮았다.

“궤변이로군. 키시온 변경백이 인망 있는 영주이자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가졌던 건 그의 에테르 레벨 때문은 아니었잖나.”

“아, 이 사람, 하필이면 보답받지 못할 충정을 이 나라에 바치던 슐리만을 들먹이오? 그는 위대한 남자였는데도, 오로지 에테르 레벨이 낮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량과 성품을 가지고도 삶이 고달팠던 거라오. 어디의 금발 왕자님과는 다르게.”

클레이오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지는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왕이 건국한 알비온에선 소드마스터를 신처럼 숭배하지. 검을 쥐는 아이들은 언젠가 검의 극의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수련을 시작하오.

그리고 한 세대에 한 명쯤만이 정말로 그러한 성취를 이뤄 내지. 그렇다면, 결코 드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검사들은? 머리가 희게 셀 때까지 결코 진격의 원을 익힐 수 없는 사람은? 그들은 명예가 없나? 고결할 자격이 없나?

이 나라에서 힘과 명예는 등치되어 있는 것이지. 그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나는 말이야, 더럽든 징그럽든 오로지 힘 하나만을 추구하는 브룬넨이 차라리 낫다고 여긴 것뿐이오. 히드라의 피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바로 그 관념에 파고든 거요. 그렇기에 독을 마시는 건 항상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지.”

그건 클레이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인생을 변호하는 말이었다.

이솔트와 레오니드의 규약이 변질되어 차별을 받았다 한들, 그게 그보다 더 열악한 처지의 약자를 겁박할 근거는 되지 못했다.

궤변을 클레이오가 받아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럼 네가 여기에 이렇게 처박힌 것도 네 선택의 결과인데, 별로 좋은 결말 같진 않군.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한 번 더 선택해 봐. 하나, 아슬란 카스틸리엔을 배신한다. 둘, 쥴레이카 카스틸리엔을 배신한다. 이미 해본 거니 두 번째는 더 쉬울 거야.”

이미 평정을 잃은 조지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공녀 전하와는 안면이 없는 사이인데, 없는 사실이라도 만들어서 불어야 하나? 이미 내가 여기에 갇힌 지가 몇 달이 지났는데 쓸 만한 정보가 뭐가 있겠소.”

“그러면 네 선택은 정해진 거지. 아슬란의 최종 반격 계획에 대해 말해 봐. 사령부 회의에 들어가던 장교가 그조차 모른다고 지껄이는 뻔한 소린 듣기 싫고.”

조지의 얼굴에 어딘가 악의적인 충동이 번졌다. 때를 보던 클레이오는 ‘적절성 판단’을 실행했다.

“황태자께서는 마인라트에 남은 마지막 마법사들의 심장을 뽑았소. 글쎄, 공중타격대의 마녀들에게 당한 일을 잊지 않으셨으니, 이제는 강철 날개로 하늘이라도 정복하시려는 모양이겠지. 경의 그 엄청난 에테르를 품은 심장이라면 그분께서도 몹시 얻고 싶어 할 훌륭한 재료일성싶은데.”

조지의 말은 ‘참’이었다.

바로 이 답을 얻기 위해 클레이오는 여기까지 온 거였다.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할 근거가 생겼다.

“내 심장을 꺼내 가려면 나를 이겨야 마땅한데, 네 주군이 살아서 못 이룰 목표를 위해 네가 먼저 헌신성을 보여 보겠나? [차폐].”

몇 초간 조지는 당황을 숨기려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는 클레이오가 저 백금색 에테르로 무엇을 했는지조차 몰랐다.

기사는 폐부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제 의지로는 숨을 들이쉴 수 없음을.

콰당.

꼿꼿하던 조지의 몸이 모로 쓰러지고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산소 부족으로 인한 경련이 전신에 일었다.

1) 아주 얇고 반투명한 모직물.

2) 금속을 얇고 넓게 조각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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