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
실현된 예언과 관철된 복권(復權) (2)
이들은 한낮의 그림자이다. 군대를 이루어 진군하는 대군이다.
오랜 포격으로 느슨해진 스텔라 방벽의 아주 좁은 틈새로, 그림자들은 마침내 흘러들어왔다.
그림자의 군단이.
그 검은 자욱들은, 한때 므네모시네의 문이 심적색으로 타오르던 때, 그 안에서 기어 나왔던 마수 ‘혹한’을 떠올리게 했다.
솨아아아아아앗―
분노 어린 검, 황금의 검기가 뱀 같은 어둠을 벤다. 허나, 일시적으로 갈라졌던 어둠은 다시 형체를 갖추어 지면 위에서 일어선다.
아서의 네 이형이, 사방에 떠오른 태양 같은 전사들이 갑자기 일어선 어둠을 순식간에 찢어발긴다.
이제 그는 므네모시네의 문이 아니라 사령부로 걸음을 돌린다.
그림자 군단의 출현은, 이시엘에게만 전적인 대응을 맡겨놓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매처럼 뛰어난 아서의 눈에, 의회와 궁성을 둘러싸고 몰려드는 시커먼 그림자, 팔다리의 수가 넷에서 여덟 사이를 오가는 어름어름한 형상이 보였다.
안쪽의 병사와 기사들이 항전 체제를 갖추고, 마수를 상대하듯 능숙하게 에테르를 일으켜 그림자를 베기 시작한다.
그림자 병사들 하나하나는 그림자 거미 수준으로 그리 강하지 않지만, 소멸하면서 주변을 부식시켰다.
[강화]를 입지 않은 건물의 모퉁이와, 이미 깨져나가 틀만 남은 창이 파스스 바스라졌다.
클레이오는 실제의 전략적 가치가 없는 장소라도, 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는 건축물들은 역이나 방벽 중심의 요충지 수준으로 지키길 원했다.
사람이 사는 게 중요하지, 건물에 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냐는 아서의 질문에 클레이오는 예의 그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어떤 장소는 그 자체가 기억의 현전이야. 그 강고한 벽과 주춧돌은 우리들이 과거로부터 연결된 존재고, 또 미래까지도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물질적으로 보증하지.
천 년의 궁성, 또한 그 궁성만큼 오래가리라는 전망하에 지어진 의회가 모조리 파괴된다면, 뭐랄까, 사람은 실존적 불안이란 걸 겪거든. 쉽게 말하자면 싸우고 재건하고 살아갈 사기가 떨어진다고.’
‘복원하면 되지 않나?’
간식을 가져왔던 아서는 무심코 반문했다가, 클레이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제껏 쌓인 게 많은지 그는 다다다 쏘아댔다.
‘복원은 개나 소나 해? 그런 정교한 건축물을 복원하려면 마리아 교수님 같은 사람이 열 명은 있어야 해. 넌 지금 알비온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지?
수도방위대를 졸업하는 마법사는 매년 줄어드는데, 멀쩡히 잘 졸업하고도 전쟁 동안 닦여나가서 마법은 그만 쓰고 싶단 놈이 널렸다고. 돈도 싫다 그러고, 의무복무도 다 한 놈들을 붙들어 놓을 방도는 없고, 쳇.’
‘결국 그게 문제냐….’
‘난 말이야 돈을 줘도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제일 싫어. 게다가 복원을 아무리 잘해도 한 번 무너졌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잖아.’
어려운 말은 영 헷갈렸지만, 사람이 오로지 목숨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에는 아서도 동의했다.
그러므로 아서는 미리 계획한 대로 제 일을 해야 했다.
그가 국왕 대리의 권한을 대행했고, 현재 알비온을 지키는 사령관이었다.
왕실 근위군도 아르모리크 공작도 모두 무용한 때에 아서는 등대이며 지지대이며 감시탑이 되어야 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뗀다. 뒤돌아보려는 고개를 붙든다.
이제는 병력을 재배치해 외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고, 스텔라 방벽의 힘을 안쪽으로 반전시켜야 할 때였다.
방벽을 재시동하는 순간에는 방어력이 사라지니 마법사에게만 맡겨둘 수 없었고, 기사를 보내 방비를 해야만 했다.
아직 덜 처리된 아슬란의 이형은 자신이 소멸시킬 생각이다.
학교에는 무려 세 명의 마스터가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노인이고 한 사람은 병약자이지만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림자 군단이 돋아난다 해도 학교에 자신까지 가는 건 과했다.
아서에게는 우선순위가 있다. 그에게는 의무가, 이 도시와 사람들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그럼에도 끝끝내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것은, 필시 이 도시가 미련을 가지고 돌아보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아서는 알지 못하지만, 룬데인은 수없이 많은 돌아봄에 의해 구명되고 기록된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아서의 초록색 눈에, 마치 투명한 방벽에라도 부닥친 양 공중에서 흩어지는 피어스의 에테르가 비친다.
저것은 검기끼리의 부닥침이었다.
사납게 타오르는 불 위로 퍼부어진 물 한 양동이처럼, 피어스의 기세를 확 꺼트린 상대가 있었다.
아서는 학교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잘 안다.
로사의 검기는 주홍빛이다. 클레이오는 백금, 제베디는 금빛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검기를 쓰는 이라면,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둘이 있기는 어렵다.
‘…스승님.’
미에츠가, 드디어 그가 왔다.
아서는 안도한다. 한 번도 직접 시인한 적은 없지만 미에츠는 아주 높은 레벨의 기사였다. 그는 모두를 지켜줄 것이다.
믿어야만 제 일을 할 수 있고, 믿어야만 살아남는다. 아서는 사령부를 향해 도약한다. 등 뒤에 믿음을 남기고서.
.
.
.
마침내 학교 정문에서 피어스 클라겐을 따라잡은 미치슬라프 다브로프스키가, 무작스러운 대검을 큰 몸짓으로 휘둘렀다.
얼핏 보기에 빈틈이 많은 자세였으나, 실제로는 바늘 하나 파고들 틈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두려운 검은 무음이었다.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라서 날붙이가 먼저 오고, 소리가 뒤늦게 따라붙는 것이다.
부우우우웅―
검에 실린 무색 투명한 에테르가 기척 없이 공기를 갈랐다. 비가시적이기에 더더욱 살벌한 검기였다.
크라테르의 용병으로 떠돌던 시절 미에츠의 별명은 ‘귀신’이었다.
성흔 ‘은폐의 장막’으로 진짜 레벨을 가리고서 소드마스터의 힘을 쓰니, 그 공격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의 습격 같았기 때문이다.
피어스 클라겐의 몸에서 절반만 돋아난 이형이 미에츠의 일격을 받아내고서는, 파스스 흩어졌다.
오명이 높았다 하나 로사를 이어 이십여 년간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을 맡았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막힌 검술 따위 간데없고, 하고 있는 꼬락서니마저 별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어스의 육신에선 이형이 끊임없이 돋아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실루엣이 불완전하게 구물거렸다.
팔 위에서 다시 팔이 나고, 다리에서 또 다리가 뻗어 나와 버들거렸다. 온몸에 기생 생물이라도 들러붙은 모양새였다.
이토록 무참한 상태에서도, 피어스는 끔찍하게 강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 통상적으론 불가능한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닥에서 이형의 상체만 불쑥 돋아나 미에츠의 두 발목을 베려 들고, 공중에서는 징을 박은 신을 신은 발이 나타나 미에츠가 쥔 검신 위를 달려 머리를 짓밟으려 했다.
이형이란 본체와 동일한 복제품이지, 신체를 조각조각 내 움직인단 소리는 평생 듣도 보도 못했다.
미에츠는 동요하지 않고 그 기괴한 형상을 하나하나 베어냈다.
검으로 가르면 사라진다는 점에서, 어떻게 생겨 먹었든 이형은 그냥 이형일 뿐이었다.
남자는 오랜 세월 소드마스터임을 숨기고 떠돌았기에 오로지 본신만 가지고 싸우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도 단번에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미에츠가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이었다.
검 하나에 집중된 소드마스터의 힘은 가히 산을 가르고 강의 경로를 바꿀 만한 것이나, 그는 전력을 낼 수가 없었다.
이미 이지를 잃고 날뛰는 피어스로서는 전혀 개의치 않을 문제였지만, 미에츠는 이곳에 스텔라 방벽의 핵이 있음을 알았다.
스텔라 방벽의 핵심이 부서지면 이 도시는 무방비가 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피어스의 공격을 피해가 적은 쪽으로 유도하고 때로는 요령 좋게 주변에 [강화]를 걸던 미에츠는, 상대를 앞질러 등 뒤의 수도방위대 학교를 두고서 소리쳤다.
“피어스! 잔재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성싶으냐? 제대로 검을 들어라!”
검기만큼이나 웅장하게 펼쳐지는 음성이 수도방위대 학교의 견고한 정문을 웅웅 울리게 했다.
이따금씩 에테르를 폭발시키고, 발작하듯 검기를 흩뿌리던 피어스가 마침내 스르르 멈춰 섰다.
미에츠가 연속 공격으로 수없이 많은 이형을 걷어내고 나서야, 피어스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한때 유령이라 불리던 남자는 상대의 복장을 확인하고서는 속절없이 허망한 웃음을 짓는다.
“꼴이 그게 뭐야. 허, 허허. 이 새끼 미쳤나? 아니다, 그냥 미치기만 한 거면 낫지. 완전 맛이 갔구만.”
피어스 클라겐은 그가 1대 백작이 되기 전, 수도방위대 기사단장이 되기 전, 에드워드 왕이 알비온을 다스리고 로사 페히테가 그의 기사였던 시절의 예장을 차리고 있었다.
미에츠는 구 수도방위대의 예장에 익숙했다.
그 역시 젊은 시절, 예비기사 노릇을 하던 2년 동안 매일같이 입고 벗고 다리고 닦아 간수하던 복장이었으므로.
망토가 남색이 아니라 붉은색이고, 푸른 어깨띠가 없었으며, 흉갑의 앞판에 에드워드 왕의 머리글자가 음각되어 있어, 필리프 왕 치세의 예장과는 구분됐다.
병상에서 앓으며 그 좋던 풍채가 다 무너진 탓에 창대처럼 후리후리했던 젊은 시절의 복장이 어떻게 맞은 모양이었다.
“이 자식은, 지가 쳐죽인 왕의 이름 박힌 뭐를 한 개도 안 버리고 다 갖고 있었단 거네? 정말 징그럽다, 징그러워.”
평소라면 길길이 날뛰었을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피어스의 멍하게 풀린 눈에는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미에츠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시선은 먼 곳을, 이곳이 아닌 시공간을 헤맸다.
지저분한 로브에 머리와 수염을 산발한 미에츠보다도, 구시대의 예장을 모두 차린 피어스 쪽이 더 ‘유령’처럼 보였다.
여전히 상대의 말은 안 들리는 상태이지 싶었다. 제법 여러 명을 제정신 차리게 만들어 준 정화의 마도구도, 이런 상태에선 절대 안 먹혔다.
미에츠는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기 앞에 선 키가 큰 남자는, 뻣뻣한 성격에 낯을 가리던 열네 살짜리 조기입학생 미에츠에게 검술과 놀이를 가르쳐주던 청년 기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2년 차의 예비 기사였던 피어스는 수도의 재미난 놀잇거리이며, 교본에는 나오지 않고 어머니도 알려주지 않는 실전 검술의 묘수를 알려주던 친구였다.
그 청년 기사는 동부 산간 지역 출신으로, 표정이 무뚝뚝해서 오해받는 일이 잦았지만 사실은 살가운 성격이었다.
일곱 살의 나이 차이가 났기에 미에츠는 그를 터울이 진 큰형처럼 여겼다.
종종 퍼스라고 부르면 기어오른다고 화를 내며 귓바퀴를 붉게 붉히던 그 인격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기억과 경험의 총체로서의 인간은 기억을 잃을 때 붕괴해버린다’는 것을, 미에츠에게 참혹한 방식으로 이해시킨 존재가 바로 저 작자였으므로.
과거가, 이미 묻어두었던 먼 시절의 기억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기억에 휘말려 미에츠의 기세가 흐트러진 순간, 미친 소드마스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예리한 검격을 꽂아 넣었다.
카카카캉― 콰아아앙!
촤아아앗!
화급히 대검을 들어 공격을 흘려냈으나, 연속 공격 중 두세 번의 검격은 결국 미에츠의 피륙을 베어냈다.
이제껏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던 싸움의 양상이 변했다.
잦아들었던 회갈색 에테르가 또다시 피어스 주위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앞서의 지리한 싸움을 또다시 반복할 순 없었다. 검술의 역량은 모르겠지만, 에테르의 유량은 미쳐 날뛰는 피어스 쪽이 압도적이었다.
또 한 차례 피어스가 폭발하기 전에, 적어도 수도방위대 학교에는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미에츠는 남은 모든 에테르를 주변의 [강화]에만 집중한 채 피어스에게로 뛰어들었다. 제 안위는 내버린 판단이었다.
스거거거걱― 샤아앗!
그런 미에츠 주변으로, 주홍색 번개 같은 검기가 절묘하게 일어 피어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어느새 피어스와 미에츠는 학교 정문에서 몇 발자국 안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거기부터는, 로사가 언약의 금제를 파괴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었다.
당당하게 선 로사가 말했다.
“왔구나, 미에츠.”
“좀 늦었습니다, 어머니.”
“아니, 늦지 않았다. 살아있는 한 늦는다는 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