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사자의 검
이제껏 스텔라 방벽 시험 가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건, 동남 전쟁 때처럼 오로지 클레이오 홀로서 대규모의 마법을 거듭해 쓸 일을 없애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힘과 지혜를 합해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 지독하게 저 자신을 마모시킬 필요가 없을 테니까.
듀브리스에서 대규모의 정화 마법을 쓴 일을 기점으로 메이지 마스터가 된 클레이오는,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생명의 기운이 약해졌다.
마법을 써도 피를 쏟지 않는 건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초월적인 유량의 에테르는 쓰면 쓸수록 닳기는커녕 그 양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에 반해 사람으로서의 특성은 점점 희박해졌다.
잠이 들면 주변으로 백금빛 에테르가 누수처럼 흘러넘쳐 고였고, 대체로 진언이 필요 없으니 반쯤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과용하곤 했다.
클레이오가 메이지 마스터이기에 그런 기이한 행각을 보인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우선은 자신도 메이지 마스터인 제베디가 그 꼴에 대경실색을 했기 때문이다.
노스승은 클레이오가 결코 전쟁 이전처럼 회복할 수는 없을 거라며 주름진 눈가를 붉혔다.
마법감이 스텔라 방벽 보강에 혼신의 힘을 다한 건,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제자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단 걸 클레이오만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방벽을 만들어도 결국 클레이오가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시내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방벽의 전지가 설치된 시 외곽으로 이동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방어 능력이 없고, 당장 호위를 시킬 상급 기사 역시 없었다. 977기 동료들조차 여섯 중 셋이 나가떨어진 판이었으니까.
마법단 단장인 타디우스 역시 전투의 부상자들을 임시로 이송시켜 둔 의회 대연회실로 내려가 시급한 부상자들을 직접 치유하는 중이었다.
전란을 겪은 알비온은 중급 이상의 기사 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기사들을 회복시켜 전투에 복귀하도록 돕는 건, 밖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지만 이 전투의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한 명, 한 명의 마법사가 소중한 때였다.
그러니 방벽 복원 임무엔 공격 마법과 스텔라 방벽 구조 모두에 정통한 클레이오가 적임자였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서는 클레이오에게만 또다시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 않아 재가를 망설이던 찰나였다.
“제가 클레이오 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너덜너덜한 제복 차림의 스웨인 템플이 대연회실 방향으로부터 뛰어 들어와 아서 앞에 부복했다.
아서는 미에츠와 교체하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돌아왔던 스웨인의 모습을 살폈다.
그의 군장은 다 우그러지고 피투성이였지만 치유 마법이 잘 들었는지 움직임에 부상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전투 중 무기를 잃은 모양인 듯 검대가 비어 없었다.
“지금은 내어줄 마땅한 검이 없는데 가능하겠나?”
상급 기사의 검기를 버텨내는 검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왕가의 보물은 모두 궁성의 보고에 들어 있다. 궁성의 보고는 왕의 홀 지하의 납골당과 벽을 맞대고 있었다.
현재로서 아서가 내어줄 수 있는 검은 기껏해야 티플라움 보강이 들어간 제식 장검뿐이었다.
스웨인은 꿋꿋하게 답했다.
“검이 부러졌다 한들 의지가 부러졌겠습니까. 싸울 수 있습니다, 부디 명령 내려주십시오.”
그때였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페텐카가 구겨진 재킷 자락을 휙 젖히며 지도 가까이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그의 존재를 알았으나 나서지 않기에 놓아두었던 아서는, 희미하게 책망하는 듯한 기색으로 물었다.
“세르게프 의장이로군. 의원들은 모두 무사히 대피했나?”
“저 대신 하원의장이 자기도 싸울 수 있다고 소매 걷어붙이는 양반들을 양치기처럼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다행인 일이다만, 경이 그저 안부를 전하기 위해 이곳으로 돌아오진 않았을 터인데.”
페텐카는 평소의 우회적 화법은 집어치우고 다짜고짜 치고 들어왔다.
“맞습니다. 지금만큼은 예의고 무엇이고 다 내려놓겠습니다. 우선, 하늘에서 벌어지는 저 혼란은 단순히 대관일식의 징조가 아닙니다. 카르멜라 여왕이 서거하셨을 적 대기의 움직임은 이렇게 불길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한구석이 조금 어두워진 정도였지요.”
아서의 뜻에 반한다면 상대가 상원의장이라 해도 개입하려 들던 클레이오는, 페텐카의 말을 듣고 그대로 완드를 내린 채 딱 멈춰 섰다.
마법사는 제가 언제 사나운 기세를 드러냈냐는 듯 에테르를 스르르 갈무리하곤, 페텐카의 말에 얌전한 첨언만 더했다.
의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페텐카인 것처럼 들리게 하는 교묘한 화법이었다.
“세르게프 후작이 옳습니다. 이에 관하여 국왕 서고 역시 탐색해 본 일이 있으나, 단순한 대관일식이 에테르 흐름을 뒤엎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습니다.”
별달리 인망이 없는 마법사보다는 상원의장의 입으로 사태를 선포하는 게 설득력이 있으리란 계산을 끝마친 표정이었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자였다.
저 마법사는 아서 리오그난이 왕위를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뿐더러, 그 과정에서 한 점의 그늘도 의혹도 없기를 바라는 거였다.
페텐카는 기꺼이 그 판에 끼어들었다.
“이건 제가 대마법사나 대기사가 아니라도 알겠군요. 지금의 혼란은 에드워드 선왕이 서거했을 때보다도 더 격렬하니, 필리프 폐하께서는 필시 살해당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딱 알맞게, 아슬란 카스틸리엔이 비행단을 이끌고 와 수도와 궁성을 침공한 날 선왕께서 공교롭게 서거했겠습니까?”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술렁였다.
그야 타디우스 예츠켈 단장이 필리프 왕의 서거를 선언했을 때부터 그것이 자연사라 여기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국왕 살해를 공공연히 확언할 용기를 가진 자 역시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역할을 상원의장이 굳이 자청하고 나섰다.
아서는 슬픔을 드러내지도, 그러나 기쁜 기색도 없이 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
제 형제가 부친을 살해했음을 인정하는 말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아서는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넘긴 왕자라기보단, 수십 년간 왕좌를 지킨 제왕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다. 그가 맞다. 페텐카는 떨리는 내심을 숨기며, 마지막으로 확신을 얻고자 한다.
“이 상황에서 여전히 대피소는 민간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운신의 여지는 적고, 책임만 커졌습니다. 아서 님께서는, 이 침공을 처음부터 예견하고 있었죠. 그러니 민간인을 강제로라도 소개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네. 지난 전쟁 때나 지금이나, 끝까지 수도를 떠나지 못할 이들은 저 바깥에 영지나 별장이 있는 귀족이나 부유한 이들이 아니야. 생계와 터전이 이곳에 있어 살아갈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이지.”
“식량과 주거를 지원하여 수도에서 먼 외곽으로 임시 이주를 시킬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상하원의 어느 의원도 이 침공이 일어나리라 믿지 않았는데, 시민들이라고 그 예언을 믿었겠는가?
그들에게 기약도 보장도 없이 떠나라고만 한다 한들, 그리하여 살아남았던들, 본래의 삶이 쉽게 회복되었겠나? 왜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는가, 로디언 후작.”
“시급한 상황에서 제 과실이 큽니다. 그러나 제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였기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작금의 사태는 천 년의 역사에서도 지극히 예외적 상태입니다. 법도 전례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겠습니까, 아서 님.”
“목숨을 걸고서 돌아와 묻고 싶은 게 그거라면 의장도 꽤나 호사가로군. 왜 선례가 없단 말인가? 알비온은 검으로 건국된 나라인데. 시조 레오니드께 한 자루의 검이 있었듯, 내게도 한 자루의 검이 있지.”
솨아아아아―
검대에 손을 얹은 아서의 주변으로 또 한 차례 금빛 에테르가 휘돌아 나왔다. 관이 없이도 그 머리 위의 왕좌가 빛을 내는 자였다.
이번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더 이상 페텐카에게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당장이라도 제 형제들을 저지하기 위해 가야만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페텐카는 아서의 힘에 밀려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기묘하게 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리오그난의 후계자인 당신에게는 한 자루의 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사자의 검이라 부르더군요.”
페텐카는 뜨겁게 달아오른 석검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아서는 그 뜬금없는 행동이 의아한지, 상처로 끊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기록에 남은 사자의 검은 어두운 광택이 감도는 장검이었다. 한데, 페텐카가 내민 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설화 석고 검이다.
상원의장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혹이 튀어나오기보다 먼저, 그가 제 팔목을 벴다.
촤아아앗!
페텐카의 피를 머금은 자그마한 석검이 그의 손바닥 위로 떠 오르더니, 나침반의 자침처럼 빙그르르르 돌다 아서 쪽으로 칼자루가 간 채 멈추었다.
상원의장은 떨림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일족의 시조는 사자의 검을 주어서는 안 되는 자에게 건네주었기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최후에는 올바른 사용자에게 이 검을 전하는 것이 혈통의 의무, 부디 쥐어보십시오.”
이 모든 과정이 답답한지 흘러내린 머리를 조금 거칠게 넘긴 아서가 설화 석고 검을 덥석 쥐었다.
장난감처럼 조그마한 세공품이 아서의 커다란 손에 푹 가리는가 싶더니, 화아아아아아아!
거센 빛무리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정적.
웅성거리던 자들의 입술이 굳게 닫히고, 모두의 눈은 빛 속에서 멀어버린 것만 같았다.
투둑. 뚝.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클레이오였다.
아서의 찢어진 제복 소매 아래, 왼팔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아서에게 치유 마법을 덮어씌웠다. 마도구가 몸에 새겨지는 고통은 클레이오에게도 생생했다.
사람들 앞이라 삼가던 반말이 불쑥 튀어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는 이를 꽉 깨물고서 아서의 상처를 살폈다.
근육으로 뒤얽힌 상처투성이 왼팔 위에는, 막 아물어 불그레한 기색이 남은 용맹한 사자의 형상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클레이오 역시 읽어서 아는 마도구, 사자의 검이 맞았다.
그는 뒤늦게야 감탄을 흘렸다.
아서가 부상을 입었다고 여기자 반사적으로 발동된 「이격」이 긴장을 차단해 반응이 느렸다.
‘이것도 8교에선 등장 자체를 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사자의 검 임시 보관함이 어떻게 일개 후작가에 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로디언 후작의 엄정한 평가를 통과한 후에, 아서가 왕세자가 되지 못했는데 선왕이 사망해야만 얻을 수 있는 물품이었던 거군.’
사자의 검은 상징성도 위력도 명백한 유물이었다.
클레이오는 남들도 이 귀속형 마도구의 위용을 볼 수 있도록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감축드립니다, 아서 전하.”
대관도 일식도 지금은 먼일이나, 이미 사자의 검은 저의 왕을 정하였다.
털썩.
클레이오에 뒤이어 역시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페텐카의 낯이 허탈감으로 인해 희게 질렸다.
페텐카는 천 년 간의 저주와 의무에서 풀려나는 것에 두려움과 희열을 함께 느낀다.
이것은 그 전설의 날, 레오니드 2세가 태어나던 그믐밤에 이솔트를 베어내 그녀로부터 영원한 안식을 박탈했던 검이었다.
세르게프 가문의 시조는 검사였지만, 시조의 부친은 설화 석고 세공 장인이었다.
돌산에 살던 노인은 사자의 검을 옮겨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든 공로로, 제 자녀를 레오니드 왕의 기사단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노인의 아들이 바로 세르게프 가문의 시조, 레오니드 2세의 치하에서 귀족 작위를 얻은 초대 로디언 후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문에는 이렇게 비밀스러운 임무와 유산이 함께 물려 내려왔다.
정작 그 검의 새 주인이 된 자는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충격과 흥분에 전염되지 않고 덤덤하게 굴었다.
“이게 사자의 검이라면 대대로 대관식에서 물려받게 되는 그 검은 무어란 말인가.”
“같은 것입니다. 오로지, 진정한 주인이 부재할 때에만 이 설화 석고 속에 검을 담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힘을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가에 대해선 저 역시 평생 궁금했는데, 여기에서 의문을 풀게 되는군요.”
스으으으으읏.
제게 스며든 검을 실체화하여, 그 시리게 날카로운 검날을 빛에 비춰본 아서는 응당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하지만 이 검은 리오그난 왕가의 인물을 해할 수 없지 않나?”
지금부터 그가 맞서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하는 질문이었다.
페텐카는 흔쾌하고 간명하게 답했다.
“아니오. 이 검은 오로지 제 주인만을 해하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당신께서는 신의 축복이 어린 검으로 당신이 베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벨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