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
공현과 내전 (2)
저벅. 저벅저벅.
수련하는 학생들의 기합이나 연습용 검이 부닥치는 소리, 웃음과 함성으로 소란스럽던 수도방위대 학교의 교정은 적막했다.
한 사람의 걸음걸이가 멀리까지 울릴 만큼.
아서는 인적 없는 수도방위대 학교를 천천히 거닐었다.
오늘의 균열은 완전히 봉합했으니, 연합 단장을 접견해야 하는 오후까지는 다소간의 여유가 났다.
프란이 균열 파동을 예측하는 기기를 만들어낸 덕에 기사단을 운용하는 데에도 효율이 생겼다.
여전히 경비는 서지만 아서가 일 분 일 초도 눈을 감지 못하고 내내 깨어있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희생 없이 세상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을 실행하는 데 프란의 조력은 절실하도록 유효했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멸망을 막아내고, 미래를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나날 내내.
여유는 소중했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위기 상황에선 더더욱.
신군의 면면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아서는 남의 눈이 없는 장소가 필요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조차, 신군을 떠올리면 도무지 미소를 유지할 수가 없었으니까.
아서는 무감하고도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정든 교정을 천천히 거닐었다.
신군.
신군이라고 거창히 이름 붙여 놨지만 정말로 수천수백의 병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는 클레이오 아세르의 보조에 지나지 않는 무리였다.
본래라면 클레이오의 개인 재산만으로도 그 조촐한 집단을 꾸리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군대를 거느리는 것도, 규격화된 무기를 공급해야 할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클레이오의 재산은 의회의 명령에 의해 동결된 상태였다. 군사작전권이 없는 인물의 명령을 구실로 무장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였다.
의회에서도 치열한 토론을 거치다 고작 3표 차이로 통과된 명령이었는데, 사실 실질적 효과는 적고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클레이오는 수도를 탈출할 때 이미 마석과 보석류 대부분을 지니고 갔다. 프란에게 덜어준 몫을 제한다 쳐도, 전후의 보석과 마석 시세로는 작은 공국쯤 살 가치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회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기디온 아세르가 차량과 마석을 신군 측에 기부하는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은 아세르 가의 장남 블라드 아세르가 공식 절연장을 신문에 게재하며 알려졌다.
비슷한 일들이 나라 곳곳에서 벌어졌다. 믿음과 희생에 대한 입장은 개개인마다 달랐고 가족 안에서도 분열을 일으켰다.
신군을 일방적으로 대할 수 없는 건 그들의 재산이나 무력을 감안해서가 아니라, 신군의 뜻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신군에 공식적 지지를 표명한 집단은 여신의 독실한 신도들이었다. 신의 뜻을 믿는 저명한 명사 200인이 선언서에 서명해 공표하고, 평생 모은 마석을 내놓았다.
그중 두 명은 현역 왕실 자문위원으로, 아서에게 각성을 요청하며 자문위원직에서 사직했다.
‘어떻게 왕께서 재난을 거두려는 신의 축복을 거부할 수 있는가. 신의 사자를 억류해서는 안 된다, 의식을 속행하라.’고.
클레이오는 저 균열이 근본적으로 자신에 의해 두 세계가 이어졌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발점이 무엇이든, 그 붕괴는 아서의 신체가 무너질 때 더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멸망이라는 것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서 벌어지는 사건인데, 아서가 생각하기에 이번의 저것은 어쨌든 사람의 죄는 아니었다.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아홉 번째 반복에서 사람은 자멸의 병기를 발명해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것이 참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지난달, 니네베 호수에 가까운 동부의 야산 아래에서 첫 비공식 접촉이 있었다. 동남 전쟁 이후 기존의 거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아 방치된 소읍이었다.
물론 아서 역시 타협이 가능하리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건 그저 서로가 정확히 무엇을 상대에게 요구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회동이자, 이제는 서로가 완전히 다른 미래를 원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한 절차였다.
니네베 성과 브리스텔 사이에서 수백 통 전문이 오간 끝에, 아서는 미에츠 단장을 데리고 갔고 클레이오는 태서턴을 대동하고서 나타났다.
왕과 공작이 의전을 따지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므로 회담의 장소인 마을 회관은 조촐하다 못해 남루했다.
어쩌면은 남루한 편이 나았다. 그 자그만 마을은 야산의 줄기와 함께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으니까.
신군과의 접촉은 결국에 신화 같은 전사들의 대결로 끝났다. 천지를 뒤집는 싸움이었다.
아서의 간곡한 설득 뒤에도 아무 소득 없이 회담이 결렬되자, 미에츠 단장은 한때 친분이 있었던 클레이오에게 인사보다는 더 긴 말을 남겼다.
‘나는 네가 아서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걸 알았다. 그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 신들의 축복이란 저주이면서 횡액. 그들의 변덕이 아서에게서 떠나가도 나는 그 애의 편이다.’
그건 국왕을 모시는 기사단장이 아니라, 아서를 자식처럼 키워온 스승이자 친인의 한탄이었다. 그러므로 신군의 지휘관이자 아세르 공작이 아닌 아서의 친구 레이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아서는 설명을 아끼는 타입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왕실 자문위원과 기사단장은 아서가 왜 대관식에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들었다.
미에츠 역시 클레이오가 결행하려는 의식과 이 대결이 어떤 의미인지, 가능한 수준에서는 이해를 했다.
그리고 그 사정을 모두 알고서도 977기의 나머지 인원과 자문위원 대부분, 그리고 미에츠는 인간의 편에 선 것이다.
언약의 폐지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내는, 신의 뜻을 어길 시 하루밖에 살 수 없다 해도 마음을 고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쓰기 위해 천사를 살해해야 한다면 그리할 용의가 있는 기사였다. 아서가 그래선 안 되니까.
미에츠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여전히 클레이오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 제왕의 손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
본래도 안색이 나쁜 클레이오는 그저 파리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연회색 케이프에 감싸인 몸은 앙상했다.
저렇게 겨울나무같이 되어서 고통뿐인 순교를 요망하느니, 저 대단한 마법으로 균열을 함께 막는 편이 낫지 않은가.
물론 아서도 같은 요지의 말을 했지만 눈이 달떠서 반들거리는 신의 사자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미에츠는 돌발적으로 충격 요법을 썼다. 먼저 발검한 쪽은 미에츠가 맞았다. 그러나 전력의 검기를 먼저 떨쳐낸 쪽은 태서턴이었다.
대마법사가 직접 강화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검은, 그것을 쥔 자에게 전성기 시절 같은 기량을 안겨줬다.
태서턴은 에테르 그릇에 금이 갔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역량을 드러냈다.
검격이 열두 번 오가는 동안 야산이 깊은 구덩이로 패고, 소읍은 토사에 파묻혀 사라졌다.
아서와 클레이오가 각자 두 소드마스터를 멈춰 세웠을 땐 인류가 낳은 최강의 병기가 그 파괴력을 드러낸 뒤였다.
오로지 단 두 사람의 대결이 이러할진데, 신군과 아서 왕의 기사들이 모두 전력으로 칼을 맞댄다면 결과는 파국이다.
아서가 신군 측에 손쉽게 병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데엔 무력 진압이 그의 성미에 맞지 않고 의회의 논의를 거쳐야 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끝을 알기 때문이었다.
클레이오는 굳이 마을과 산을 복원하지 않고 떠났다. 그의 주장은 마지막까지 한결같았다.
‘기한은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므네모시네의 문에 도달할 거다.’
대마법사가 쓸 ‘수단과 방법’을 겪지 않으려면 의식을 속행하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약속’의 기능에 기댄 클레이오는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담했다. 아서는 드러나지 않게 낙담했다.
아서가 균열을 제대로 막아내고 있다는 증거를 보고서도 클레이오는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니까.
클레이오의 주장은 공허하지 않았다.
그는 여론의 변화를 잘 감지했다. 터전을 되찾고 싶은 이들은 지금도 적잖으며, 저 두렵고 지겨운 균열을 일거에 없앨 수 있다는 단언을 믿는 이들은 늘어나는 중이라 확신했다.
그가 옳았다.
평민원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에 의식을 다시 치르게 해 달라는 편지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룬데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재난 가운데 남겨져 사람이 떠나간 지역은 급격하게 쇠락하여 몇 달 지나지 않아 폐허의 면모를 띠었다.
룬데인의 다리 중 여섯 개가 끊겼고 그중에선 궁성과 학교를 잇는 안타리오 다리 하나만 복원됐다. 룬데인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폐허의 풍경이 얼마 전 <루치올라>의 사진 기자에 의해 공공에 공개됐다. 한자리에 오래 머물며 카메라를 세팅할 틈은 없었기에, ‘순간 초상’ 기구를 이용한 촬영이었다.
목숨을 걸고 균열과 균열 사이의 시간에 룬데인으로 잠입한 기자의 보도는 신문의 무신론적 논지와는 무관하게 신군 측으로 여론을 기울게 했다.
수도를 떠나왔지만 영원히 떠날 거라 여기지 않은 이들도 갑작스레 현실과 맞닥뜨렸고, 목숨이 중하니 우선은 안전을 챙겼던 이들도 천 년 고도의 상징물들이 부서져 내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감상적인 이유뿐 아니라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존의 선착장은 룬데인 균열 지역에 포함돼버려 콜포스에서 증기선으로 실어 온 상품은 하류의 새 선착장에서 내리게 됐는데, 아직 정비가 덜 끝난 바람에 물류 적체가 심했다.
수도의 서편이 완전 봉쇄되니 룬데인 동역 역시 이전보단 접근성이 떨어지고, 부동산 소유주들의 원망도 거셌다.
알비온 사람들은 의무교육의 혜택을 입고 잘 교육받았으며 문해율이 높았다. 새로이 주어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는 일에도 곧잘 능숙해졌다.
신군과의 2차 회담은 바로 그런 이들 덕에 성사될 것이다.
아서는 마음이 복잡했다.
레티샤는 지난 당번 때 소개된 룬데인에 진입하며 이런 말을 했다.
‘있잖아, 여긴 이제 어쩐지 기억된 세계 같애.’
아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성이 자리한 소버린 지구의 모습은 므네모시네의 문 너머에서 보던 풍경과 꼭 같았다.
그건 아서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안겼다. 그는 ‘재와 강의 도시’에서 클레이오가 짓던 복잡한 표정의 뜻을 온전하게 알게 된다.
클레이오가 지금의 룬데인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그 앤 아서가 남겨지게 될 종말 이후의 풍경을, 이곳에서 떠올리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왜 반대 방향으로는 생각해주지 않는 것일까.
도깨비불들만 차갑게 어른거리는 폐허 속에 네가 홀로 남게 되는 일은 자신 역시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아서는 익숙한 숲길을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연합의 지원이 도착했으니 이전보다는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아서는 방금 전 만난 스승 제베디와 로사의 초췌한 낯을 떠올렸다.
균열이 넘실대는 동안엔 절대로 세상의 에테르가 폐해선 안 되기에, 두 스승은 자진하여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 남았다.
그 장소엔 항상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프란이 직접 설계한 뒤 제베디와 함께 설치한 강경의 다이아몬드 방벽이 기존의 마법진과 더불어 이중으로 처져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스승들은 자진해서 스스로 세 번째의 결계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균열의 모래 한 알조차도 결계의 핵심과 므네모시네의 문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이곳엔 세상의 에테르가 시작되는 근원 뿐 아니라, 스텔라 방벽의 핵 역시 자리하고 있잖습니까. 이 나이에도 이토록 심대한 중책을 맡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영광이외다, 전하.’
‘전하께서는 기사의 피를 끓게 하는 분입니다. 부디 제게서 마지막 의무를 빼앗지 마시지요.’
균열이 부수려는 것은 세상의 핵인 므네모시네의 문이었다. 결국에 이곳은 최후의 전장이고 아서는 멸망을 유예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벅. 저벅저벅.
걸음은 어느새 아서를 연구제자 연구실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익숙한 문 앞에 선 그는, 그가 아는, 한때는 즐거움과 기대 속에서 발음하던 문장을 다시 한번 낭송했다.
“학예의 영묘 베헤못을 찬양하라.”
끼이이익.
돌보지 않은 지 몇 달째라, 경첩이 빡빡하게 삐걱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아서는 먼지가 가득 앉은 연구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첼이 잔뜩 뽑아왔던 졸업사진은 하나하나 프레임이 입혀져 선반 한 칸을 채우고 있었다.
그 밑엔 설거지를 하고 뒤집어놓아 굽 아래에 먼지가 쌓인 각자의 머그컵.
베헤못 용의. 에나멜 장식과 금테를 두른 도자기 물그릇.
여름에도 항상 나와 있던 마석 난로.
소파 한구석에 뭉쳐 있는 캐시미어 모포.
나무 기둥에 빼족빼족 그어놓은 각자의 키.
아서보다 고작 0.5cm 높은 위치에 쓰인 클레이오의 이름.
아서는 서툴게 새겨진 요철을 쓰다듬어 본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키를 재어보던 때가 있었다.
아서에게는 모든 생애에서 최초였던, 기억의 장소.
그리고 여기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의 장소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