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471화 (470/489)

#471

공현과 내전 (3)

바닥의 카펫은 젖혀져 지하 마석 창고의 문이 휑하게 열려 있었다.

아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저 밤엔 어찌나 다급했는지 프란의 평소 행동과 다르게 캐비닛과 서랍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채였다.

꼼꼼하게 챙겨갔는지 대부분의 마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안쪽 캐비닛 덮개가 어긋난 부분에서 희미하게 반사되는 빛이 아서의 시야에 포착됐다.

아서는 어렵지 않게 비틀린 덮개를 빼내고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조각 마석을 꺼내 들었다.

그건 아서에게도 눈에 익은 보석이었다.

관목의 호박, 보존의 마석.

학창 시절에, 처음 열린 기억된 세계에서 난생처음 마음껏 검을 휘두르고 제힘으로 얻어낸 보물이었다.

여왕의 정원에서 나온 모든 마석을 클레이오에게 주었다. 마석의 용처를 설명해주는 클레이오는 무심한 듯 다정하고, 툴툴거리는 듯 친절했다.

[각인]의 마법식을 쓰고, [복원]으로 되돌리고….

아서는 완전히 자라 모양이 잡힌 손의 반 치도 차지 않는 보석을 가만히 쥐었다가, 안주머니에 넣었다.

클레이오가 소장한 마석 중 캐비닛 한 칸 정도는 아서가 직접 마수들의 잔해에서 꺼내 그에게 건넨 것이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프란에게로 갔을 것이다. 아쉬운 사용처는 아니었다. 그 마석은 훌륭한 스텔라 방벽이 되어, 이후로도 플라이트 평원에 두 번이나 찾아온 소규모 균열을 막아 사람들을 지켜주었으니까.

다만 그 기억된 세계에 대한 추억들은 증명해 줄 기념품을 잃어서, 이제는 정말 오로지 기억으로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아서는 아쉬웠다.

반짝.

아서는 앞주머니에 넣어둔 포옹의 반구 신호를 감지했다.

이시엘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훌쩍 오후로 넘어간 시간이었다. 가야 할 때였다. 그는 차림새를 정돈하고 표정을 정비하여 성큼성큼 학교를 빠져나갔다.

.

.

.

늦은 밤에도 브리스텔 시청 한편에는 티플라움 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왕실 자문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은 본래 브리스텔 시청의 오찬실로, 현재는 반을 나누어 각각 친위대와 주요 각료의 집무실로 썼다.

각 행정부처가 모두 브리스텔로 옮겨오며 사무실이 부족한 실정이라, 새 청사가 완공될 때까진 다들 시청 건물에 다닥다닥 모여 불편을 감수하는 중이라 벌어진 일이었다.

장소의 제약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각 부처로 나뉠 필요 없이 일원화된 장소에서 취합되어, 서류 작업에 허비되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서 아서의 친위대는 출동을 나가지 않을 때엔 얼굴을 맞대고 있는 편이었다.

첼레스테스는 항공대원들의 피로도를 계산하여 교대 주기를 바꿔야 한다는 보고서를 읽다가 내려놓았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기사이자 조종사인 항공대원은 균열 방비에도 전쟁에서도 탁월한 효율을 보여주지만, 양성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시엘은 저녁 순찰 순번이라 룬데인에 나가 있어 마음이 더 쓸쓸했다.

“아예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아버리는 건 어때? 에테르로 뭉개면 없앨 수 있다면서. 균열은 세계 바깥에서 와서는, 결국에 문으로 고여 드는 거라니까.”

알비온의 내전에 대한 불개입 문서 작성 후 이어진 연회에서, 아서와 대작하다 먼저 쓰러진 류신옌을 숙소까지 곱게 모셔다 준 뒤 돌아와 모래 낀 칼자루를 털고 있던 레티샤가 이죽였다.

“문에 붙박인 레지나 신녀는 어떡하고! 뭐, 신녀만 문제인 것도 아니지만.”

행정 업무에 더불어 가외로 신학 서적까지 무서운 속도로 탐독 중인 프란이 마지막에 입을 열었다.

“부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장기적인 계획을 통한 철회라면 몰라도, 당장 에테르 없이 이 문명은 유지될 수 없다. 그건 인류의 삶의 조건을 뒤흔들 것이고, 알비온뿐 아니라 데르니에 대륙 전체의 문제가 된다.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그는 너무나도 수수한 차림새라 하급 사무원처럼 보이는 산업부 장관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타이를 맸을 뿐, 야학 선생이나 기자 노릇을 할 때와 비교해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 모습으로 나다니는지라, 맨 처음엔 경비병에게 자문회의 출입을 저지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위엄은 차림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회의실 한쪽 벽, 제일 넓은 책상을 차지한 프란의 주변은 그의 키를 넘는 온갖 자료와 보고서, 서적들로 빽빽한 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완전히 붕괴된 후, 머릿속에서 토대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해내는 참이었다.

칼을 다 닦고 칼집에 돌려놓은 레티샤가 입을 삐죽였다.

“근데 므네모시네의 문이 우리 땅에 있는데 어쩌라고, 진짜 어쩌라고임.”

“그래서 그거 지키라고 알비온에 소드마스터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거 같다며. 아서를 영원히 살게 한 것도 같은 이유일 거고.”

“영원히, 와, 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게 들림.”

프란은 헛소리엔 일일이 답하지 않고, 국왕 서고에서 나온 일식의 기록으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때 플라이트 평원에서 아서가 전달한 이야기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설화였고, 프란이 원하는 건 데이터였다.

현재 알비온의 모든 연구마법사들은 산업부 장관의 휘하에 들었다. 아서는 그가 이리로 온 이유인 연구의 자율성과 자료 접근권을 지켜주었다.

프란은 아서에게 올리는 필수 보고 외엔 에테르 파동이니 반복 경향성 계산이니 하는 얘긴 꺼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인류의 대부분은 그의 설명을 이해 못 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은 프란의 선택에 눈물을 흘렸다.

마도과학자나 연구마법사들은 무신론자가 많았다. 그들은 프란이 내린 ‘신이 존재하기에 불가피했던’ 선택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런 다음엔 눈에 불이 지펴져서는 연구실로 왔다.

프란은 자신의 성흔을 최대한도로 썼다.

이미 들을 준비가 되었고, 의지를 가진 이들은 프란의 짧은 격려 연설에도 크게 고무되었다.

‘인간 해방의 근본에 신으로부터의 독립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모든 창의적 행동은 무의미해집니다. 인간은 모형 정원을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살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을 잃은 신들이 떠나간다 한들 그들이 예비한 장치가 그대로 온존한다면 그건 해방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합니다. 세계를 지속시키고, 우리의 삶을 이어갈 방도를.’

물론 감동적인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프란은 꽤 저명한 활동가였고, 그의 정체와 작위 계승 소식이 알려진 뒤 가장 먼저 비판 성명을 낸 건 <클라리온>이었다.

기자들의 펜은 날카로웠다. 프란이 이념적 차이로 인해 <루치올라>를 분리시켜 나올 적에 험한 말을 하며 싸웠던 전 동료들은 모두 생생하게 현역이었다.

반면 과학아카데미 방화 사건과 하이드-와이트 백작 내외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아는 깃발의 몇 없는 원로는 프란의 운명에 대해 통탄했다.

‘그는 부모를 죽인 왕자와 스승을 죽인 왕자 중에 차라리 전자를 택한 것이오.’

프란은 그런 말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고작해야 말 아닌가. 오해와 동정과 비난 따위,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언젠가 신의 힘을 끊어내게 된다면 그걸 베는 칼은 아서일 것이므로.

그리고 남은, 신이 죽은 세계를 지탱할 이 역시 오로지 아서뿐이다.

멸망을 멈추는 것과 그의 불멸이 거두어지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었다.

프란은 영원성이라는 굴레에 갇힌 아서를, 사적으로는 긍휼히 여긴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아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선택을 위하여 불멸을 각오했다.

베아트리체는 사정을 설명하며 재차 사직서를 보낸 프란에게 엉뚱한 회신을 했다. 청혼 편지였다.

[아서 왕이 계속 산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끌어내리긴 쉽지 않겠지.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내가 제안 하나 할게. 우리 결혼하자. 그런 다음 애를 셋쯤 낳는 거야. 하나는 활동가, 하나는 언론인을 시키고 막내는 과학을 공부하게 하면 어때?]

프란은 그에게 도착한 다른 모든 편지와 마찬가지로 베아트리체의 편지에도 답신은 안 썼다.

“에테르감응자연합의 전력을 이쪽에서 온전히 운용할 수 있게 됐으니 연합 측에 통상의 순찰을 맡기고, 기존의 알비온 측 전력은 차출해 미루어놓았던 므네모시네의 문 활성화 실험을 할 거다. 일정은 정해지는 대로 보고하지.”

대기 중의 에테르 흐름을 관측하여 균열을 예측해내는 시스템은 사실 완벽하게 정확하진 않았다.

사후적으로 데이터를 쌓아가고는 있지만, 그래서는 언제까지고 벌어진 일을 뒤쫓기만 하게 된다.

프란은 므네모시네의 문과 연결된 에테르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증폭된 에테르로 균열을 뒤덮는 방안을 만들 수 있으리란 가설을 세웠다.

혼자 내린 결론은 아니었고, 알비온의 거의 모든 마도과학자와 연구마법사가 모여 이룩한 성과였다.

이에 대한 레티샤의 의견은 하나였다.

“해, 해. 빨리해.”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다. 여러 번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늦은 밤까지 격무에 시달리는 친구들을 위해 차를 타 오던 아서가 희소식을 하나 더했다.

“들어오면서 보고 들었는데, 북에서 라이사 경이랑 로탄 경도 지원을 온다고 하기에 인가했어. 더 이상 마수 같은 건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니까, 수도로 와 돕겠다고 해.”

“큰 도움이 되겠네. 그 사람들 잘 싸우지. 라이사 경을 다시 만난다니 기쁜데?”

“로탄 경도 같이 오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희망은 희박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짧은 기간 동안 반복해서 누적된 균열 관측 정보는 재난에서 발생 경향을 찾도록 해 주었다.

정치가들과 달리 연합의 기사 개개인은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무인이었고,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받았던 만큼 알비온 측에 온 힘을 다해 보답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석을 기부해 몇 겹으로 방벽을 보수하고, 자원봉사자들도 세상의 멸망을 막을 실험을 돕는 데 기꺼이 자원했다.

***

첫눈이 내리던 날, 실험이 결행됐다.

므네모시네의 문에 인공적으로 에테르를 주입하여 활성화시키려던 시도는, 처음에는 제대로 먹혔다.

세심하게 한 레벨 한 레벨 강도를 올릴수록 주변의 에테르 농도가 높아졌다.

그 에너지를 스텔라 방벽으로 이전하면 종전보다 몇 배나 강한 에테르를 발출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상급 기사나 마법사들이 하듯 균열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험자들은 주의 깊게 에테르 양상을 살피며 천천히 실험을 진행했다. 이상 반응은 없었다.

예측했던 대로 돋아난 그날 오전의 첫 균열은 방벽의 빛 아래에서 사그라들었다. 연구자들은 관측값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는데, 이변은 그 눈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왔다.

균열을 잠재운 자리가 수천 가닥으로 갈라져 지면이 가라앉고, 개미굴처럼 깊디깊은 굽이굽이 흰 모래가 수도를 매몰시키기 시작했다.

므네모시네의 문은 잠잠해졌고, 실험은 좌초됐다.

기사단이 나섰다.

“막아! 무조건 여기서 막아야 해!”

“항공대 2진을 띄워!”

“비행장이 균열에 침범당했습니다. 항행 중인 1진 외에 운용 가능한 기체가 전무합니다.”

“젠장!”

이제까지의 관측값을 모조리 뒤집으며 균열은 경향성 없이 날뛰었다. 문에 붙박인 신녀는 가늘게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세상의 참상을 더 볼 수 없다는 듯.

이번에도 균열을 막아낸 주역은 아서였다.

처음으로 선보인 아홉 이형은 흔들림 없이 운용되며 룬데인의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움직였다.

아슬란이 수도 전투에서 선보였던 불완전한 이형과 달리, 생생한 실체로 찬연한 검기를 뿜어내는 아서의 이형은 본체의 기량을 온전하게 재현한 완전체였다.

완벽한, 완성된 그랜드 마스터의 이형들은 하나하나가 한 국가의 군대에 필적했다.

그런 그랜드 마스터와 세상의 소드마스터 대부분이 모여서도 막아내기 어려운 대균열이 7일 밤낮으로 벌어졌다.

낙관주의를 살해하기에 충분한 일주일이었다.

7일간의 격전을 통하여 관측 이래 최대 규모였던 균열을 봉쇄하는 데 공을 세운 첼레스테스 경은, 만신창이인 채로 비행기를 몰아 신군으로 망명했다.

기젤라 클라인이 첼과 함께했다.

클레이오가 몸을 숨기고 있던 템푸스강 상류에 내려선 첼은, 기척을 느끼고 그녀를 맞이하는 클레이오의 어깨를 붙잡고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시엘이 죽을 뻔했어. 아니,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지. 피를 너무 흘려서, 제베디 교수가 조혈 마법을 안 걸었다면 이시엘은…그러니까, 그때 내게도 기억이 주어지잖니. 아서의 술회로도 다 채워지지 않던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기억이.”

클레이오는 두 손을 뻗어 제 어깨에 기대어오는 친구를 열없이 안았다.

언젠가는 이시엘이 그렇게 눈물을 떨구었던 어깨가 이제는 첼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기억. 기억들이 있어. 이제는 알아. 내가 레오니드의 제일검 스텔라였지. 그리고 나는 천공의 여신이며, 나의 세계는 1962년에 멸망했지.

천문과 조화의 신이 다스리던 세계에서 인류는 무려 1959년에 달의 뒷면을 돌아 그 먼지 많은 지면을 밟았는데. 나는 그들이 하늘을 정복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경이를 알면서도, 인간들은 각자의 국가에서 서로의 대륙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지. 그 뛰어난 기술로, 그 대단한 성취로. 그 이후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났을까?”

“그걸 어떻게 다 세겠어. 첼.”

“내가 왜 네게 왔는지는 안 물어봐?”

“멸망이 두려워진 거겠지. 그건 인간적인 감정이야.”

“하, 과연, 두 신의 뜻을 이은 사자께서는 모르는 게 없구나. 그래. 맞아. 난… 난 더는 안 돼. 이시엘이 살아갈 세상이 끝나는 건 견딜 수 없어.

우리 신들이 다시 태어나듯, 인간의 영혼 역시 저승의 강물을 돌아 환생하지. 이시엘 역시도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거야. 근데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린다면. 그렇다면. 다시는 그 애가 없게 된다면.”

클레이오는 그 마음을 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익숙한 얼굴의 미소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체온과 감촉을 아는 존재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야음을 틈타 평야를 가로질러 와, 균열을 잠재우기 위해 템푸스강의 상류에서 강물로 에테르를 흘려보내고야 마는 행동이다.

신의 사자로서가 아니라, 고향을 사랑하는 룬데인 사람으로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