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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수의 수석 졸업자이자, 수도방위대 마법단에서 에테르 유량의 증가 방법에 관하여 연구하는 조지나는 친절한 미소에 상반되는 날카로운 언설로 상당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깃발’과 대중이 시위와 캠페인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밀어붙이는 선거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첫 번째 여성 하원의원이자, 최연소 하원의원이 될 거라는 전망이 뚜렷했다.
클레이오는 조지나의 몸짓과 말투에서, 분노에 가까운 자신감과 정의에 대한 사명감이 절묘하게 조화된 표현에서 익숙한 영혼의 자취를 느낀다.
아홉 번째 세계에서 결국 그가 생을 종결케 했던 인물, 타고난 천품을 오용당하고 언약의 파훼로 인해 잊고 만 기억을 결코 되찾지 못했던 흑적의 마법사가.
그녀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 다르게 살 기회를 얻었다면.
필시 그것은 돌이킴의 결과이리라.
현재는 이미 아홉 번이나 돌이켜진 뒤에 주어진 것이니.
이 새로이 시작된 세상에는 제 친구들 또한 열심히 새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신의 도구가 아닌 사람의 삶을.
분명 남색 머리의 소녀는 권능 없이도 하늘을 꿈꿀 것이며, 사냥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숲을 누비며 사격술을 갈고닦고 있을 것이다.
클레이오는 그 존재들이, 마침내 사명 없는 삶을 얻은 영혼들이 살아갈 세계를 저버릴 수 없었다.
반복되는 세계의 지침, 그렇듯 그들을 살게 하라.
완전치도 전능하지도 못한 신의 시간, 흐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역사의 시간은 그래서 구제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지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그로부터 5년 뒤.
아세르 상사의 룬데인 지부 소매 품목 구매 책임자로 클레이오 아세르가 임명되었다는 급보가, 수도상인조합의 신년회를 은은하게 달구었다.
최고의 소프라노 릴리 로즈의 노래와 함께 빛의 축제를 마무리 짓던 사람들의 첫 반응은 ‘그래서, 클레이오 아세르가 누구인가?’였다.
그만큼, 기디온 아세르의 차남은 이름이 알려진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간 꾸준히 세를 확장한 실용 마도구 사업과 마법 대중서 출판 사업의 주체였다.
간결한 듯 유창한 언변으로 마리아 젠틸레 교수를 설득해 출간한 마법 실용서는 공전절후의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의 하급 에테르 감응자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려 놓았다는 평가를 듣는 <마법 이야기>는 티플라움 대량 채굴과 함께 금세기 말 세상을 바꾼 두 가지 품목이란 평가를 받았다.
정작 본인은 수도방위대 학교를 한 학기도 못 다니고 중퇴했으며 서클도 열지 못하는 1레벨 감응자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책이 설득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레비 유한 상사의 대표, 바이제 레비는 동역에 가까운 사무실에서 느릿느릿 석간신문을 읽고 있는 클레이오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무릎 위에선 몇 년이 지나도 영 성묘처럼은 보이지 않는 몸집 작은 고양이가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레비 유한 회사에서 유통을 전담하는 ‘현묘의 밭’ 와인의 라벨에 그려진 검은 고양이는 저 베헤못이 모델이라고 했다.
인쇄된 커다란 검은 고양이와 저 몸집 작은 고양이는 색 말고는 그리 비슷한 점이 없어 보였는데, 클레이오는 라벨을 그리는 숙련공에게 ‘고양이는 큰 게 좋으니 커다랗게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심지어 아주 진지하게 클레이오는 고양이를 포도밭의 실소유주로 올리려 들었다. 그러나 테오필라 섭정의 엄격한 부동산 정책으로 인해 실패하자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
클레이오의 의지는 불발됐지만 루아르 블랑 품종 포도주인 ‘현묘의 밭’은 꽤 인기가 있어서, 수도상인조합의 신년회 만찬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쨌든 주인과 고양이가 둘 다 잠에 취해 뭉그적거리는 걸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저렇게 멍하니 있다가도 갑자기 뜬금없이 ‘자, 다음에는 이걸 해 보죠.’라는 제안을 하는 게 클레이오 아세르의 버릇이었다.
그가 개발하자는 품목은 똑딱단추와 와인 오프너부터 티플라움 전구, 잘 알려지지 않은 브룬넨 변경 지역의 와인까지 다소 중구난방이었지만, 무엇 하나 잘 팔리지 않은 게 없었다.
소소한 사치품, 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작은 발명품들이 꾸준하게 상사의 수익률을 높여주었다.
‘저렇게 둔감해 보이는 양반이, 앞날이라도 내다보는 듯 기막히게 진출 분야 선정을 잘한단 말이지.’
거기에 더해, 프란 화이트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그가 특허를 등록하면 누구보다 빨리 독점 사용 신청을 내는 데 주력한 게 또 기가 막힌 한 수였다.
선명의 망원경은 특히나 대히트를 쳐 회사의 규모를 늘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매출 자체는 엄청나지 않아도 견실하고 독립적인 사업을 꾸려오는 걸 보고, 기디온 아세르도 클레이오를 인정하게 됐다.
바이제 레비는 벌써 몇 년째 상사인 클레이오 아세르와 손발을 맞추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여럿 있었다.
법학에서도 출판에서도 멀어져 그레이어 가의 비서를 하고 있던 자신을 클레이오는 어떻게 알고, 그런 깜짝 놀랄 만한 액수의 주급을 제시하며 영입했던 것일까.
이유를 물으면 ‘대성당에 가서 출판과 법률관계 일체의 업무를 맡길 유능한 직원을 달라고 했더니 여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셨다.’ 따위의 대답을 아주 진지하게 했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상당히 묘한 사내였다. 나이로는 소년에 가깝던 시절에 처음 봤는데, 그때에도 태도가 침착해서 갓 성년이 된 젊은이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한두 번 마주쳤던 아세르 상사의 후계자 블라드 아세르의 젊어서 날것으로 냉한 기색과는 전혀 달랐다.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형제의 냉대든 비꼼이든 그 무엇이든 아무런 반응을 않고, 십 대 시절 이후엔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일도 드물었다.
아세르 상사의 후계자는 장자인 블라드 아세르였다.
클레이오는 부친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있었다.
알비온과 브룬넨의 대립은 열전으로까지 격화되지 않았다. 적국이 없다면 내통자도 없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클레이오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블라드와 기디온의 사이는 결국 틀어지고 말았다. 아세르 상사가 조합 회사로 전환되며 창업자 일가의 지분이 줄어들었던 탓이다.
대량 살상과 대전쟁의 기폭제를 터트리는 일에 비하면, 상속 문제로 부자가 빚는 마찰 정도는 일어나도 될 일이다.
클레이오는 기디온의 사업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자신의 벌이로도 캔튼 부인과 미라에게 넉넉한 봉급과 휴가를 약속할 만큼은 됐다.
캔튼 부인은 다시 만나서도 여전히 클레이오를 지극히 헌신적으로 대해 주었다. 공사 양면으로.
부인이 주관하는 아세르 저택의 만찬은 수도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은근한 호평이었다.
자주 열지 않고 인원도 많이 들이지 않기에, 아세르 저택에 초대되는 일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저택의 만찬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마도구나 소매품들은 늘 인기를 끌어서, 호사가들 중에선 아들 둘 중 모친을 닮은 건 차남이라고 평하는 자가 적잖아 있었다.
클레이오는 그러한 평가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는 새로움을 모르는 자이고, 있었던 일을 다시 되풀이하는 자일 뿐이다.
만일 그레이어 가문의 조카가 해외 사업에 전념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다른 일을 찾아봐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복잡한 신들의 가계도 속에서 자신과 가까웠던 선대의 선례를 따르는 건,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살았던 세월을 반복할 때가 있었다.
연원이 사라졌는데도 존속되는 버릇들.
한 면에 마광석 철을 발라 풀리지 않게 만든 헌터 그린 색 리본, 알비온 남성으로선 이례적으로 길게 기른 머리, 흰색에 가까운 회색빛 케이프 코트.
황홀한 광휘를 발하는 서클도, 오연하게 꼬리깃을 늘어뜨리는 황금 공작도 없었지만 클레이오 아세르는 고집스레 이전 생의 모양새를 유지했다.
친구들이 그러는 것이 좋다고 말했던 모습을.
더 이상 그의 외견에 말을 얹는 목소리들은 없는데도, 그는 종종 따스한 벽난로 앞에서 과거의 목소리를 들었다.
과연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조차 없었다면 클레이오는 사람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여러 모로 달라졌다.
이 세상에서 룬데인의 부동산은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지 못했다. 테오필라는 섭정기의 최후에 하원과 손을 잡고 룬데인 토지 대부분을 국유화하는 일에 성공해, 민간에선 매입 자체가 어려웠다.
룬데인 동역 앞의 복합 상업 지구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사업을 하는 임차인들은 국가에 토지 임대료를 냈다.
룬데인은 데르니에 대륙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각광받았기에 세수가 상당했고, 그 덕에 공교육과 보건 의료의 질이 놀랍도록 상승됐다.
전통적으로 자선의 주축이 되던 교회는 무신론자 섭정과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베스나 드리스콜 룬데인 대주교는 외곬으로 느껴질 만큼 정의감이 강한 인물이며, 테오필라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 불의 기질과 종교적인 열정은 방향이 바뀌면 지렛대 같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가히 세상을 들어 올릴 지렛대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테오필라가 섭정직에서 물러나고 아서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왕세자로서 직무를 시작했다.
선거법 개정과 징세권 조정으로 왕가는 자연스레 권력에서 멀어졌다. 아서 개인에 대한 개인숭배 경향은 약했다. 아서는 테오필라가 기반을 닦은 대로 통치를 승계했다. 이제는 단독으로 입법할 권한이 없는 국왕 대리로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라고 했고, 깃발의 사람들은 그것을 수십 년간 전개한 투쟁의 결실이라 불렀다.
어쨌든 1895년 평민원 선거에서 조지나 하웰과 로버트 루스워스는 모두 하원의원직을 얻을 수 있었다.
한때 장 로베르라 불리던 남자는 작위 반납 소송에 승소했고, 이제 알비온에서 상속 작위는 상속자 스스로 국가에 반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작위 반납자는 하이드-와이트 백작의 자녀가 될 것이란 사실을 수도의 사람이면 누구나 알았다.
또한 로버트는 인민당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며 하원 의장이 되었다.
대량 학살과 독재가 이어지지 않은 카롤링거의 젊은 통령은 혁명 원년의 원로에게 축전을 보내왔다.
현재의 통령은 혁명 당시 여섯 살이었으며, 그 직위를 맡은 다섯 번째의 인물이었다.
비슷한 시기, 알비온 공중타격대가 결성되었다. 대장은 기젤라 클라인, 부대장은 아이샤 데왈리였다.
두 사람은 훈련을 마친 후 비행단의 활주로에 비행기를 대놓고 뛰어내려 서로 삿대질을 할 만큼 사이가 나쁜가 하면, 훈련 중에는 그렇게나 서로를 잘 보조한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비행단원들의 사진을 살피던 클레이오는 그들 중 절반의 얼굴과 이름은 알 수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얕은 한숨을 흘린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소녀들의 것이고, 그건 필시 천공의 여신 가호가 그녀들에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리라.
왕세자가 된 아서는 이제는 자신의 곁에 없는 친구들의 뜻을 이루어 주려는 듯 행동했다. 대체로는 해맑고, 늘상 밝아 보이는 왕세자는 보기보다 사려 깊은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건 클레이오가 명확한 이유 없이도 여전히 리본을 초록색으로 골라서 사는 것과 비슷한 행태일지 몰랐다.
과거는 영혼에 새겨진다. 반복은 그들을 다르게 행동하게도 만들지만 꼭 같이 행동하게도 만든다.
이곳은 역사적인 세계이면서 역사 없는 세계이다.
므네모시네의 문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대량의 에테르 파동이 없어서인지 마수들 역시 마석으로 잠든 채 지층 속에 머물렀다. 클레이오가 사업을 시작한 이래 마석 시세는 큰 변동이 없었다.
세상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토대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것을 클레이오는 끊임없이 되새기지만, 세상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기만 해서 그는 제 불안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 자신만이 불안하고 세상이 평화롭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클레이오는 쭉 사업을 이어가며 세금을 잘 납부하고, 분기별로는 특별 기부금도 추가로 냈다.
그렇게 상당한 액수를 정부에 희사한 덕에 아서 왕의 대관식에서, 왕의 홀 2층 끄트머리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기디온 아세르의 자녀로서라면 좀 더 앞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겠지만 클레이오는 그냥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다.
왕실 신년회에서 한 번, 항공대 비행 시연식에서 한 번 마주쳤던 아서와 이시엘, 항공대원들은 모두 홀의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클레이오의 자리에선 그들의 측면 뒷모습만 빼꼼이 보였다.
1899년은 맥 빠진 듯 평화롭게 흘러서, 대관식 역시 간소했다. 필리프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지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테오필라는 섭정으로서 왕실의 모든 의전을 간략화했다.
레오니드의 석관 앞에 선 베스나가 약식의 의례를 집전한다.
“축복이 그대와 함께할지어다.”
부서지지 않은 왕관이 아서의 금빛 머리 위에 얹혔다. 레오니드의 석관은 기적을 선보이지 않고 사자의 검은 몇 세기 전의 전설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소드마스터는커녕 이제야 겨우 상급 기사가 된 아서는 찬찬히 무릎을 꿇는다. 그의 얼굴엔 티없는 웃음만이 어려 있다.
일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낮은 여전히 밝다.
다시 반복되는 세상에서는 일식의 전승이 흐려져 있었다. 사자의 검이 실체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레이오는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뱉는다. 수도방위장을 받지 못해서 베헤못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고양이를 데리고 눈을 붙일 것이다. 1899년의 봄 내내 클레이오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반복의 두려움 속에서.
아서는 물려받은 관용구를 낭독하고 대관식은 손쉽게 끝났다.
인파에 섞여서 왕의 홀 밖으로 나온 클레이오는 손날로 그늘을 만들며 이전처럼 환하게 세상을 밝히는 오월의 해를 올려다보았다. 대성당과 수도방위대 학교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렸다.
이것이 끝인가? 이로써 세계는 지속되는가?
답이 없어서 속이 허했고,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샜다.
클레이오가 태양에 긁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던 그 순간, 아무런 전조 없이 하늘이 찢겨 세상의 틈새를 드러낸다.
디디고 섰던 바닥이 꺼지고 리오그난 왕자들의 초상이 걸리지 않은 왕의 홀 벽이 모래무지로 화해 흐른다.
미리 쓰인 정교한 복선 없이도 멸망은, 세상의 남은 낱장의 좁은 틈새로 맥락 없이 새어 나온다.
길을 벗어난 주인공의 심장을 찌르지 않아도 멸망이 다시 온다는 자각은, 아무런 방도 없이 모래 속에 파묻힌 클레이오를 웃게 했다.
눈물조차도 너무나 오래 가는 것이라서, 불멸하지 않는 웃음밖에는 지을 수 없다. 그는 폐허가 된 테헤란로를 달리던 어떤 여름을 떠올린다.
태어남에 이유를 두는 세계의 원칙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도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취약한 지반 역시.
십 년간의 유예 끝에야 아둔한 자신은 알게 되었다. 막아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는 버텨내야만 하는 노정이다. 새로운 세기를, 끝나지 않을 세계를 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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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남은 세계는 떠나간 신이 남긴 구조 속에서 반복을 거듭한다.
다시 물에서 나온 클레이오는 1890년을 아홉 번째로 겪은 이후로 더 이상 반복의 횟수에 대해서 꼽아보지 않게 되었다.
균열은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히드라의 독은 다시는 발명되지 않았으나, 이페리트 가스는 기어이 발명되기도 했다. (티플라움 방독면은 가스탄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회귀로부터 고작 이 년을 더 살기도 했고, 팔십삼 년을 살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인간은 항상 이전보다는 나은 존재가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가 거듭해서 되풀이될 때 비극적인 진지함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사랑도 비극도 유일무이할 때에만 경건할 수 있다.
당신이 다시 없으리라고 믿을 때 우리는 고백을 한다. 평생을 함께해 달라고. 당신과 함께 살다가 죽겠다고.
하지만 당신이 다시 태어나고 내가 또다시 태어난다면 결심과 고백의 무게는 하찮아진다.
여기서 ‘당신’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세계를 비유하는 단어이다. 사랑이 죽은 세계에선 사랑의 언어를 흉내 낼 수밖에 없으니까.
1) ‘같은 자리에서(ibidem)’의 약어. 동일한 문헌을 연속해 재인용할 때 출처를 표시하는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