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490화 (489/489)

#490

시간 이후

제비꽃 클럽의 대의원이자 스위프트 거리 기자 모임의 회장, 그리고 한때 <룬데인 스탠더드>의 사회부 기자로 종군하여 명망이 높았던 실라 홀링워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완전히 무너진 아르크 거리에다가 아예 새로운 양식으로 지은 사무실 현관에는, 몇 번의 이사 동안 내내 가지고 온 소박한 동판 <루치올라>가 달려 있었다.

“그럼 취재 다녀올게요!”

온 룬데인이 복구공사로 한창이었다. 가로 양쪽 곳곳에 비계가 세워져 있고 도로도 영 성한 곳이 없었다.

튼튼한 부츠를 신은 실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패고 휘어진 도로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가 <루치올라>의 기자로서 맡은 첫 업무는 교회령 호수보존회의 호위 마법사 인터뷰였다.

실라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루치올라>는 작은 주간지만 발간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일간지뿐 아니라 첫 사설 라디오 방송국을 가지게 될 언론사였다.

클레이오 아세르의 대규모 투자금이 흘러들어오며 사세를 확장했고, 각 보도국도 인원을 확충했다. 사회국이 인원을 늘릴 때 실라도 흐름을 타고 루치올라로 이직했다.

베테랑 기자인 그녀는 처음부터 큰 건수를 맡은 셈이었다.

교회령 호수보존회 파견 마법사와의 인터뷰는 최근 <루치올라>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특집 기획의 일부였다.

기획의 골자는, 신세기의 초입에 알비온인 100명의 인터뷰를 모아 주간지에 게재하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거부하면 거부한 대로 그 사실을 그대로 실었다.

특집의 제목은 사내 투표로 정했다.

<1900년의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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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라 세르게프(교회령 호수보존회 파견 기사, 신수 마법사)

《그렇죠? 전 호수를 지키는 유니콘이거든요! 개멋진, 개근사한, 세계 최고의 유일한 신수 마법사! 짜잔!

어떻게 한 거냐고, 아니 이거 다들 물어보는데, 물어본다고 따라 하지도 못하면서. 힝.

바로바로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농담 아닌데… 아, 교회요. 교회령에 있다고 교회 얘기 다 아는 거 아닌데요. 그래요, 많이들 싸우긴 하던데, 뭘 신이 있네 없네, 사자네 뭐네. 그 뭐 신의 사자가 떠나갔다고, 대성당 임시로 닫은 거는 알죠.

‘계시가 완전히 끝났고, 신은 다시는 공현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 사랑하고 이타심을 가지라?’ 야아~, 역시 기자라 그런가, 엄청 잘 외우시네에~!

뭐 나도 외우는 건 쫌 하는데. 한 번만 말할게요, 잘 들어봐요. ‘신의 사자에 의한 구원이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그건 최종적이며 반복될 수 없는 것. 아세르 공작은 신이 아니고 개인숭배의 대상도 아니며 그저 아주 긴 임무를 맡은 사람일 뿐이다.’라고 하던데요. 응 뭐 나는 호수보존회의 공식 입장 말곤 더 해줄 말 없는데. 뭘 숨기는 게 아니고오 진짜 그때 거기 없었단 말이야! 차라리 디오네한테 물어봐! 나 말고!

아, 라라 기자님도 디오네랑 말해보고 싶었다고. 걔가 자주 못 일어나는 거는 어쩔 수 없죠. 일어나면은 찾아오겠단 사람이 기자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넹, 라라 아니고 실라요? 암튼 보존 결계 땜에 아무나 못 들어오니깐 교회령 바깥으로 줄을 세 바퀴는 섰는데, 아… 요새 좀 덜하네요. 시끄럽고. 안 왔으면.

아니, 기자님은 괜찮은데 헛소리 써 갈기는 놈들 많아갖고!

어어. 그건 맞거든. 디오네는 정오의 태양이 룬데인의 정중앙에 올랐을 때만 깨어날 수 있고 나는 그녀가 잠들었을 때만 사람이 돼.

나는 생명을 태웠고 디오네는 존재를 태워 엮인 거니까.

엑, 뭐요? 아서 왕이랑 레이, 아니, 그니까, 아세르 공작 구할라구 유니콘이랑 내 몸을 냅다 합쳤다고요? 위험천만한 건 사실이고. 네, 맞아요. 보통은 죽죠. 따라 하면 안 되긴 함요. 아니, 근데 걔네 땜에 먕먕이 되기를 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나는요, 디오네가 바라는 걸 이뤄주고 싶을 뿐이었다고요. 먕먕이가 되는 것도 물론 좋았고.

생각해봐요, 기자님. 내가 내 세계의 신을 사랑하는 건 합당하고도 자명한 일이에요. 디오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여신이었다고요.

여신처럼 예쁜… 아니, 진짜 여신님이라니까! 내참. 기자님, 말 잘 통할 거 같더니 이상한 데서 딱딱하게 굴고.

여, 신, 적으세요. 여신요.

글고 이게 나쁜 점만 있는 거도 아니거든요? 신수는 정~말로 오래오래오래 살아요. 종류에 따라서는 천 년 정도도? 또 요요 먕먕이 거느린 디오네는 잠든 동안엔 나이 안 먹는단 말이에요.

좋은 거냐고? 말도 마. 좋은 거지, 당연히?

사랑하는 상대와 천 년을 함께 보낼 수 있단 건 축복이에요. 그녀는 호수와 신전을 지키고, 나는 그녀를 지키지요. 그건 영광된 임무예요.

항상 깨어있지는 못하지만, 종종 깨어나서 그 미소를 보여주고, 또 타박도 하고, 어, 너 같은 대가리로 무슨 선물 거래에 손을 대냐, 거래소에 못 가게 형에게 전화해두겠다고 하고, 어, 그건 그냥 마석을 먼저 사면 싸다고 해서 주문 넣어본 건데, 힝.

아, 네, 선물 거래 위험하다고요… 알겠어요. 다신 안 해요.

어차피 디오네 건 다 기디온 아세르 씨가 관리한다구요. 나한테 있는 건 내 월급 정도지, 감히 그 재산에 손을 어케 댑니까.

디오네가 호수보존회 상근 직원으로 신녀 대우받으면서 그 므네문 지키는 건 괜찮은데, 맞아요, 아! 이 이야기도 꼭 하랬는데.

그냥 이 편지 읽으세요. 난 몰라. ‘나 디오네 그레이어는 예비 신녀의 대우를 받습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업의 규모를 줄이기는 했으나 공방은 유지 중입니다.

기존 그레이어 상회의 무역 부문과 클레이오 아세르의 상업용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자산은 국가에 기부했으며, 자산의 운용은 특별 경제 고문인 기디온 아세르 씨가 맡은 형태입니다. 무료로 자문해주시고 있음을 필히 고지해 주십시오.’

보도 자료로 이미 돌린 내용이라고… 그럼 뭐, 두 번 보세요.

아아아니, 나한테에 그런 게 답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질문지 섞인 거 아닌가요? 그런 거는 나중에 저 말고 다른 사람, 그래, 첼에게 물으세요~! 마석이나 신수만 물어보기!

라리마요?

오케이. 그건 안다. 약속이죠!

무슨 약속이냐고? 약속이 약속이지. 그게 말이에요, 그때….》

(메모1: 이하는 해독되지 않아 인터뷰 내용을 기재하기 어려웠습니다. 존칭을 제마음대로 섞어 써서 정리하기 난해합니다. 이 인터뷰는 빼는 게 좋을 것같아요. 최대한으로 정제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실라)

(메모2: 그 에즈라 세르게프를 상대로 이렇게 사람 말 같은 소리를 길게 뽑아낸 것도 실라 당신이 처음이니 자부심 가져도 좋아요. -베아트리체)

레티샤 안젤리움(주 세리카 하이샹다오 주재 알비온 대사관 수석 무관)

《세리카에 부임하게 되어 물론 영광이죠. 너무 이른 승진이라는 말이 뒤에서 나오면, 눈물의 칼이라는 칭호가 왜 생겼는지 친절하게 알려줄 용의가 있고 말예요.

하하, 제가 이 나이에 중령인데 작위까지 가지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 않나요?

안젤리움 자작위는 처음부터 제가 아니라 제 자매의 거였어요. 리피는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위엄 있으며 신실한 기사이죠. 오죽하면 교회령 호수보존회의 수호 기사가 됐겠어요?

인터뷰, 에이, 리피까지 해야 해요? 내가 하잖아요.

남은 일생을 바쳐서 교회령을 지키기로 한 기사의 맹세를 가벼이 여기지 마세요.

그거 뭐, 근데요, 아주 재미없는 직업만은 아녜요. 우리가 자작가의 자식으로 태어나가지고 전 공작을 꼬붕으로, 아니아니, 하급자로 거느리게 될 일은 별로 없으니까. 수호기사 노릇도 나름의 재미는 있는 것 같던데?

그래요. 전 아르모리크 공작은 기억이 불완전한 사람이긴 하죠. 자기도 까닭을 모르면서 교회령을 지키고 싶다고. 그가 지킬 건 거기에 하나도 없는데. 지도 안다면서 그러고 있는 게 에즈라보다 덜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뭐, 그릇 깨진 기사가 대단한 일은 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너그러우니까요.

남말이 아니네. 저는 항상 남의 너그러움에 기대서 제멋대로 살아왔죠. 때로는 내 영혼의 명령을 거부하고서도, 아무튼 내키는 대로 해왔으니까.

사실은 수석 무관도 부담 백밴데요! 난 그냥 좀 월급 도둑질하면서 딤섬이나 먹고, 또 감응자 협회 핑계로 류 아저씨 따라다니며 민물 게랑 죽순이랑 실컷 먹을 생각으로 지원한 건데, 그냥 주재무관도 아니고 진급까지 시켜서 수석 무관이 뭡니까. 암만 봐도 개짓하지 말라고 목줄 건 거 같아요.

아서, 이 자식은 이제 무슨 권한도 내려놓고 저것도 내려놓고 이럴 거라더니, 외교관 임명권 갖고 마지막에 날 꽂으면서 특진시키는 게 말이 돼요? 어휴어휴, 남 보기 부끄러워!

아무튼지간에요, 리피가 착실히 우리 가문 이름 높여주고 있으니깐, 쌍둥이로서 균형을 위해서라도 난 사고 좀 쳐도 돼요.

음. 그렇게 물어보시면. 나도 마지막으로 본 건 꽤 예전인데. 아세르 저택을 퇴직한 캔튼 부인이  근사한 티룸을 열었을 적에요. 맞다, 기자님이 여성 사업가들에 관한 그 멋진 기사를 썼군요! 하긴 기자님은 동남 전쟁 때도 항상 우리 편이었지. 실라, 당신에게만 말해줄게요. 우리가 헤어지는 때, 리피 걔가 그러더라구요.

‘너는 계속 세상을 살아가도록 해. 우리가 맞이한 이 새 세상을.’

그러니까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면서, 요란스럽게 지금을 살아갈 생각입니다.》

이시엘 키시온(백작, 에테르 감응자 국제협력기구 알비온 부문 책임자, 변경 경비 총책)

《‘교회령 호수보존회 산하 건축물은 레이디 디오네의 기부로 지어졌음을 알립니다. 수도방위대 학교는 최종 대결 당시 시계탑과 연구제자 연구실 일부, 도서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상태였습니다.

현재 수도방위대 학교의 입학생이 네 배로 늘어난 관계로 기존의 부지에는 수용이 불가, 브리스텔의 넓은 부지로 이전하는 편이 학생의 복지를 위해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이전은 재학생과 교직원, 직원 일동의 투표를 거쳐 동의된 사안입니다. 나머지 질문지는 차차 시간이 날 때 답변하겠습니다.’》

(메모1: 감응자 협회와 변경 경비대를 함께 통솔하는 키시온 백작은 지나치게 바쁩니다. 친분이 있는 제게도 도무지 시간을 내어 주질 못하더군요. 계속 연락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서면 답변 먼저 첨부합니다.

그리고 만난다고 해도 1899년 항공 사고 이야긴 안 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입을 다물면 절대로 열지 않는 양반이니 다른 쪽으로 접근해보려 합니다. -실라)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전 항공대장, 모험가, 비행사, 사진사)

《오, 이런 세상에! 나 하나 보자고 바다를 건넌 거예요? 여기 메리디에스에서 당신을 보다니, 맙소사! 실라, 달링, 당신 멀미하잖아. 이 사랑을 어쩌면 좋지? 당신의 기자 정신이 오늘은 빛을 보는군요. 당신의 안색을 바래게 한 폭풍이, 내 발을 묶었는걸. 당신은 운이 좋아요, 실라.

아하하하. 하하하. 먕먕이 그 새끼에게서 그런 고차원적인 답을 얻으려 하면 안 돼요. 우리 용감한 종군 기자님께서도 이 세상에 불가능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할 때군요.

그 부분은, 아세르 상사가 조합 회사로 전환한 덕에 가능했던 기적이랄지? 어머니가 꽤 배 아파했죠. 국가에 기부할 거면 그냥 팔라고 할 때 팔지, 라고. 하지만 동편의 지가가 그 정도로 상승했으니 국유화는 꽤 괜찮은 방안 아닌가요? 지금 나 너무 어느 회색 머리의 열정 분자처럼 말했죠? 오, 이 기사 나가면 어머니가 또 뒷목 잡겠어. 광장에 걸린 에텐셀 왕실 가문의 수급이랑 가로등 이야기 또 나옵니다. 그래요, 카롤링거의 새 통령은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죠? 공포와 테러는 유행이 지난 거예요. 세대는 지나가고 새 시대는 오니까.

맞아요, 기디온 아세르로 돌아가야죠. 그는 공공기관 자문을 하기엔 오히려 지나치게 고급 인력 아닙니까. 룬데인 동편의 부지가 그렇게 막대하지 않았던들, 그를 부르기엔 그릇이 작았겠죠. 어쨌든 그가 적임자란 건 변치 않을 사실입니다. 디오네와 클레이오의 어마어마한 자산으로 보통 교육과 공중 보건에 기여하는 재원을 마련해주다니. 훌륭한 처신이죠.

친구들이요?

에이, 실라, 눈치 없게 왜 이러시나. 난 1900년 이후 알비온에 머물렀던 날이 일주일이 채 안 되는걸. 당신이 나보다 그 애들을 더 자주 만났을 것 같은데. 더 최근에 봤을 테고. 나도 읽고 있어요, <1900년의 시대정신>. 너무나 베아트리체다운 기획이고, 마음에 들어요. 당신과 베아는 잘 맞을 줄 알았어.

하하. 설마요. 평생 안 보다니 무슨 말씀을. 우린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음, 약속된 귀환의 날에는요? 하지만 지금은 이제껏 탐험된 적 없는 메리디에스 남방 군도 비행이 조금 더 기대되는군요. 거기 연중 360일 폭풍우가 이는 무인도 어딘가에 천지조화의 라리마가 있다는데, 찾아낸다면 더 좋고요. 프란 화이트 씨가 꽤 큰 값을 치러준다고 하니 기대됩니다.

아니, 내 앞에선 그 날 선 기자 정신을 조금쯤 무디게 해 줘도 좋은데, 실라, 오, 실라.

그래요.

레이가 떠나가는 순간에 나도 깨어있었어요. 그 애가 역사의 책임을 지고서 지난 세계로 돌아갈 때에.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죠.

아니, 그런 아픈 질문까지. 너무 하는데요, 실라. 우린 오랜 친구인데 꼭 그러고 싶나요? 글쎄. 엘은… 잘 해나갈 걸 알아요. 이것도 기사로 쓸 건가요? 펜 뚜껑 닫아요. 그러지 않으면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나는 말이죠, 이 세상 어딘가에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가 생생히 존재해 빛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을 축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어쨌든, 이 두 손으로 클레이오의 등을 떠밀어 보내면서 적시에 환송조차 못 한 건 내가 감당해야 할 후회입니다. 그러니 나는 다시 한번 그 애에게, 우리에게로 잘 왔다고 말해줄 날을 기다립니다.

한때 황금의 기수로 불렸던 우리 977기는 역사의 기묘한 곡절에 휘말려서, 모두가 소드마스터가 되었지요. 9레벨의 그랜드 마스터만큼은 아니라도, 소드마스터는 정말로 지겹도록 오래 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평생이, 우리의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그때까지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있겠습니다. 돌아와서 그가 볼 수 있도록. 언젠가 다시 만날 친구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그나저나, 하늘에서 보는 풍경이 어떤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실라?》

프란 화이트(활동가, 발명가, 교사, 주간 루치올라 객원 기자, 작위 반납 소송 진행자, 전 장관)

(메모1: 장관직 사임 후 작위 반납 소송 진행 중인 프란 화이트 씨 인터뷰를 따오는 건 제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베아, 절 시험하지 마세요. -실라)

(메모2: 루치올라 소속 모든 기자를 한 번씩 보내고 있고, 이번이 실라 당신의 차례였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도대체 프란은 언제까지 출근 안 하고 버티려고 그러는 건지. -베아트리체)

(메모3: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결혼하자는 말을 볼 때마다 하지 않으시면요…. -익명 요청, 사회부)

***

지금 이곳, 멸망 직전의 8 세계.

신을 안아 든 천사는 날개를 접고 지상에 섰다. 고양이는 그의 날개 속깃에 파묻혀 있다가 툭, 하고 굴러 나왔다.

허리를 굽힌 정진은 멈추어야 하는 시계 아래에 우리 세계의 여신을 바로 앉혀주었다.

무거운 잠에서 깬 어린아이는 애틋한 눈으로 세계를 굽어보았다. 그녀가 창설했으나, 결국 자멸의 여정을 걷고 만 여덟 번째 세계를.

방문객의 걸음에 닳은 나지막한 계단 옆, 사암으로 지어진 천문대로 들어가는 입구, 검은 철창과 붉은 벽돌 벽 사이, 사람의 머리께 높이로 끼워진 원형의 24시간 시계는 바늘이 제멋대로 돌아가 낮인데도 0시 3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자리 잡은 언덕에서는 멀리 강변 주위로 솟은 마천루들이, 절반쯤 부서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대로 멈춘 모습이 보였다.

역사가 정지된 풍경을 보라. 조수와 간만이 멈추고 천체가 순환하지 않으며 지상에 선 어떤 인간도 날숨을 내쉬지 않는 순간의 모습을.

두 개의 대륙이 침수되었고, 여든아홉 개 도시의 상공에는 수많은 종류의 살상 무기가 대량의 생명을 겨누고 있는 찰나를.

목적지를 가진 무수한 탄두가 고도를 낮추며 대도시의 상공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습을.

그럼에도 이 적벽돌 벽에 매달린 세상의 시계는 종언을 향해 느린 바늘을 움직여가는, 그 막을 수 없는 종말을 받아들여야만 순간을.

바깥의 빛에 매료되어 건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어린아이와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 자식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던 어머니의 손을.

막 요격되어 파편을 흩트리는 상호 확증 파괴의 증거품들을. 평화로운 여름의 오후, 그리니치 공원의 언덕에 앉아 연인과 함께 창공을 주시하던 젊은이들의 눈에 서린 공포를.

여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사는 큰 키로 손쉽게 시계에 손을 뻗는다. 세상의 안위에 무관심한 어린 고양이만 꼬리를 클레이오의 정강이에 감는 데에 열중한다. ‘놀자, 놀아.’

고개를 끄덕여준 클레이오는 움직임을 좀 더 빨리한다. 신의 힘을 차용한 사자의 손길이 시계를 건드리자 멈추어있던 분침이 움직인다.

맨 처음 돌아오는 것은 소음이다. 재난 방송, 자동차 경적, 분주한 비명이 여름날의 오후를 삼킨다. 폭격. 폭발. 공격.

마법사는 너무 늦지 않게, 남아 있는 모든 에테르를, 9세계로부터 담아온 최후의 마법을 다 모아서 단번에 펼쳐낸다.

널리 퍼지는 목소리에 담아서.

“[시간은 더 이상 없으리라]1)”

0시 3분 전.

신의 사자는 세상의 시간이 시작되는 시계를 완전하게 멈추었다. 우리 세계의 마스터 클락, 표준시의 시발점, 그리니치 시계를 철저하게 정지시켜서.

낙하 궤도에 올랐던 살상 무기들이 중력에 반해 멈춰 선다. 천 년이 지나도 만 년이 지나도 제염(除染)되지 않을 재앙의 근원이 정지된다. 앞으로 영원히, 그 누구도 해치지 않도록.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테지만, 태어난 세대들만은 평화로운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지상의 마지막 한 사람이 눈을 감을 때까지 이 유예는 지속된다.

그것이 클리오가 고통 속에서 모진 생명을 이어가야 했을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자비였다.

언젠가 사람들이 살다 죽으면, 이곳 8세계는 물에 잠겨서 사라질 것이다. 물에서 시작된 세계는 물에서 끝날 테니까.

재회는 약속되어 있고, 세월은 길지 않다.

―끝

1) 『King James Bible』, 「Revelation」 1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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