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이 아빠, 뭐 하는 사람이야?2021.08.19.
하준이를 잠시 방으로 들여보내고 지안은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 목이 타는지 단숨에 물을 모두 삼키고 컵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힘들었을 텐데 왜 그걸 혼자 다 참았어.”
자초지종을 알게 된 윤희는 눈가가 빨개진 얼굴로 울먹였다.
“나도 있고, 우리 엄마도 있었잖아…….”
윤희의 엄마는 지안에게도 친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미안.”
덩달아 발개진 눈가가 보이지 않게 지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주헌 씨는 하준이가 아들이라는 걸 어떻게 안 거래?”
이에 지안의 입술이 힘없이 움직였다.
“나도 모르겠어.”
“이 상황에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나라도 알겠는데, 뭐.”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지안이 눈을 들자 윤희가 앞에 놓여 있던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데칼코마니처럼 너무 똑같잖아.”
지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윤희는 하준의 아빠가 강주헌이 아닐까, 하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그 사람한테 하준이가 친자라는 증거는 분명히 없을 거야.”
유전자 검사를 위한 하준이의 DNA를 그가 손에 넣을 방법은 없을 테니까. 눈썰미가 예리하고 직감이 뛰어난 그가 그저 넘겨짚어 본 걸 수도 있다. 틀림없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증거가 뭐가 필요해. 하준이 얼굴이 그 증거 자체인데.”
제 바람을 쉽게 부수는 윤희의 말에 지안은 눈을 끔뻑거리며 떨리는 숨을 뱉었다. 역시 못 숨길만큼 닮은 거구나. 제3자인 윤희가 봐도 닮은 두 사람이니, 눈썰미가 예리한 주헌이 제 아들을 알아보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걱정 어린 얼굴로 윤희가 말했다.
“여기 사는 거 강주헌한테 들켰으니까 일단 당분간만이라도 머무르는 곳을 옮기는 건 어때?”
이번엔 윤희가 두 팔 걷고 돕겠다고 나섰다.
“그 남자가 찾기 어려운 곳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 부모님 댁이나……. 아니면 내가 지내기 마땅한 곳 알아볼게.”
“……그래도.”
“민폐라는 둥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지안의 속내쯤이야 훤히 들여다 보인다는 어투로 윤희가 말했다.
“그럼 난 이제 갈게.”
윤희가 가방을 챙겨 들었다.
“벌써 가게? 저녁 먹고 가지.”
못내 아쉬운 듯 지안이 따라 일어서며 윤희를 붙잡았다.
“아냐. 대충 빵으로 끼니 때웠어. 그리고 오늘 밤 12시 이전에 원고 넘겨야 해서.”
“그럼 나 간다. 하준아 이모 간다?”
윤희가 하준의 방을 향해 목소리를 키웠다.
“이모, 안녕히 가세요!”
한달음에 쪼르르 달려 나와 싹싹하게 허리까지 굽히며 인사하는 하준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윤희가 아이 뺨에 제 뺨을 대고 한참이나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아유, 정말 예뻐 죽겠다니깐.”
하준과 열심히 안녕하며 현관문을 열던 윤희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문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나나 우유, 여기 있는데?”
“……!!!”
순간, 지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분명 자신이 떨어트린 봉지가 다소곳이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 안엔 하준에게 사주기로 했던 바나나 우유며, 온갖 종류의 맛 나 보이는 과일들, 그리고 저녁 찬 거리가 들어 있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강주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안과 윤희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거 위험한데.”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윤희가 봉지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아파트 동, 호수까지 다 안다는 거잖아.”
윤희의 말에 지안은 더럭 겁이 났다. 천하의 강화 그룹 황태자인 강주헌에게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말 같아서.
“주헌 씨가…… 절대 못 찾을 만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
입술 사이로 여린 숨이 흘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지안과 하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을 거였다. 그렇다면 당장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가 정말로 모든 걸 다 알아버리기 전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내 아들 발목 붙잡는 것밖에 더 있느냔 말이야.’
그날의 말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사람이 적어도 염치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네가 주헌이 곁에 있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니?’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주헌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떠나. 나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약속은 지키리라 믿는다. 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 절대 용서 못 해. 혹여라도 다시 한번 주헌이 눈에 띄었다가는, 네 배 속에 든 그 아이. 두 번 다신 얼굴 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리 알고.’
하준이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의 전부인 이 아이를.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이 크게 휘청였다.
“엄마! 어디 아파요?”
아이가 놀란 눈으로 부리나케 다가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지안의 이마를 만졌다.
“아니야. 엄마 하나도 안 아파.”
하준을 안심시키려 지안이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생긋 웃어 보였다.
“엄마 정말 괜찮아.”
아이의 세상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엄마가 전부인 아이라 지안이 아플 때면 유독 더 크게 반응하고 신경 쓰는 하준이었다. 그것이 늘 마음 아프면서도 미안했다.
‘미안해. 못난 엄마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지 이제 넉 달. 새로운 환경에서 겨우 새 유치원에 마음 붙이고 안정을 찾아가는 아이였다. 아이에겐 너무나 미안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우리 부모님 집으로 가자. 그 이후의 계획은 거기 가서 세우는 거야.”
미세하게 떨고 있는 지안의 손을 윤희가 꼭 잡았다.
“응.”
“일단 간단하게라도 짐부터 챙기자. 나도 거들게.”
“고마워. 좀 부탁할게.”
어둠에 잠긴 얼굴로 지안이 어지러운 머리를 얼음물에 담그듯 빠르게 식히며 말했다. 자신은 여자이기 이전에 엄마였다.
‘떠나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지켜야 했다. 지안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낸 후, 그 안에 옷과 물건을 넣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하준에 관한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빠르게 캐리어를 채웠다.
“엄마, 우리 어디 가요?”
어느새 양손으로 야무지게 바나나 우유를 받쳐 들고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던 하준이 물었다.
“응. 엄마랑 하준이랑 여행 가려고.”
“여행?”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지안이 잠깐 망설인 끝에 전화를 받았다.
ㅡ 집이야?
남자의 목소리가 대뜸 그녀에게 물어왔다.
** 빵ㅡ! 캐리어를 1층으로 옮기고 하준이까지 챙긴 지안을 향해 누군가가 자동차 클랙슨을 울렸다. 이윽고 차에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리며 걸어왔다. 아늑한 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지안의 모습에 남자는 목에 힘을 주었다.
“내가 올라가서 도와주려 했는데. 짐은 이게 다야?”
“응. 이게 전부야.”
긴 머리카락이 뺨에 부대끼자 지안이 이를 귀 뒤로 꽂아 넣으며 말했다.
“엄마…… 나 졸려요.”
어느덧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하준의 두 눈꺼풀엔 졸음이 가득했다.
“뒷좌석에 카시트 설치해놨어. 하준아, 삼촌이 도와줄게. 차에 타자.”
남자가 익숙하게 하준의 손을 잡았다.
“네에, 삼촌.”
잠이 내려앉은 목소리로 하준이 순순히 따랐다. 아마도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리라. 태석과 하준은 가까운 사이였다. 장난기 많은 태석의 성격 덕분에 낯가림 꽤 심한 편인 하준도 금세 그를 따랐다. 능숙한 손길로 하준을 카시트에 앉힌 태석이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에 실었다.
“잊은 물건은 없어?”
그의 시선이 살포시 지안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언제 봐도 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예뻤다. 지안에게 한달음에 달려오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고 지금도 터질 것 같다는 걸 그녀는 알까.
“응, 없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보드라워 보이는 뺨에 닿고픈 충동을 달래며 말했다.
“어서 타.”
“아, 응.”
그제야 지안도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앞에 타. 하준이 옆엔 짐이 있어서 너 못 앉아.”
그의 말대로 뒷좌석엔 짐이 한가득 있었다. 보조석에 오른 지안이 숨을 살짝 고른 후 말했다.
“고마워. 늦은 시간에도 데리러 와줘서.”
“당연히 와야지. 그게 찐 우정 아니냐.”
그가 픽, 웃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웃을 때 한쪽 볼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얼굴은 여전했다. 변함없는 친구의 모습에 지안 역시 그를 따라 작게 웃고 말았다.
“그래도. 지방 촬영 다녀와서 힘들 텐데.”
태석은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다. 탄탄한 연기력과 우월한 외모로 엄청난 팬덤을 가지고 있는 톱스타. 살인적인 스케줄에 제대로 잘 시간도 없는 바쁜 그가 몸소 지안과 하준을 데리러 온 거였다.
“아니야. 이참에 하준이 얼굴도 보고. 이러는 편이 더 좋아.”
그런 태석을 바라보던 지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을 배려하는 말임을 지안은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 친구였던 태석과는 지안이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은 4년 전.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였다. 어느덧 톱스타가 되어 영화 해외 로케 촬영을 위해 맨해튼을 찾은 태석은 내내 그리웠던 사람을 만났다.
“근데 무슨 일이야. 하준이 아빠라니.”
태석이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며 하준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물었다. 하준의 아빠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지안은 일절 침묵했다.
“……우연히 마주쳤어.”
지안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집까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데.”
오늘만큼은 하준의 아빠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 그걸 또 찾아냈더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내 소속사도 모르는 아파트가 있어. 일단은 거기로 가자.”
태석이 말했다. 주헌이 강화 그룹의 후계자인 걸 태석은 아직 몰랐다. 지안이 하준이를 혼자 낳아 기르는 부분만큼은 설명해야 할 것 같아 몇 마디 짧게 설명한 게 전부였다. 그냥 평범한 상대와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 후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미혼모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 일부러 헤어진 후 임신한 걸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는 편이 더 캐묻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것이 태석이 아는 전부였다.
‘아이 아빠가…… 하준이 존재를 알아버렸어.’
지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에 이대로 있다가는 아이를…… 데려갈지도 몰라.’
그녀는 하준이를 빼앗길까 봐 불안해했다. 아이 아빠와 우연히 재회했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단숨에 모자가 사는 집을 알아내고, 아이까지 빼앗아갈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상대. 대단한 집안의 남자라는 거겠지.
“아이 아빠……. 뭐 하는 사람이야?”
창밖을 향해 있던 지안의 얼굴이 태석을 향했다. 굳게 다물어져 있던 붉은 입술이 짓씹히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 내 짐작이 맞아?”
눈동자에 망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해봤자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는 이야기인걸. 그녀가 느릿하고 뻑뻑한 고갯짓을 하며 끄덕였다.
“대체 누군데.”
체념한 표정을 짓는 지안의 입술이 잘 익은 과실이 톡, 터지듯 벌어졌다.
“강화 그룹, 강주헌.”
“뭐?”
저도 모르게 순간 목소리를 높인 태석은 아차, 하며 다시 하준을 살폈다. 다행히 눈 감은 채 잠에 빠진 아이였다. 태석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지안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그 강화 그룹? 강주헌이면 차차기 총수가 될 거라는 황태자 말하는 거지?”
지안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짙은 숨과 함께 태석이 읊조렸다.
‘왜 하필이면!’
** 다음 날 이른 아침. 주헌은 지안과 하준이 사는 아파트를 찾았다. 평일이니 아이가 유치원을 가기 위해서 곧 집을 나설 터였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안과 하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모자가 사는 집 현관문 앞까지 다다랐을 무렵, 문을 열고 나오던 옆집 여자가 서슴없이 물었다.
“하준이네 찾아오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