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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렇게 또 도망가셨겠다 (7/103)

#7화. 그렇게 또 도망가셨겠다2021.08.23.

16549797384293.jpg“네. 그렇습니다만.”

16549797384303.jpg“아마 집에 없을 거예요. 어젯밤에 큰 캐리어 들고 나가는 거 보니까 멀리 가는 것 같더라고요.”

옆집 여자의 말에 주헌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밖으로 나온 주헌의 고개가 아파트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혹시 자신이 놓친 건가 싶어 하준의 유치원을 찾았다. 주변을 빠르게 살폈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하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주헌의 얼굴이 살얼음처럼 굳었다.

16549797384293.jpg“오늘 유하준 등원했습니까?”

유치원 원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가 물었다.

16549797384303.jpg“저…… 죄송하지만 아이 보호자 분이 아니시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원장이 주헌을 경계하면서도 그 특유의 위압감 넘치는 분위기에 눌려 눈치를 보았다.

16549797384293.jpg“아이 보호자입니다.”

그가 명함을 건네며 원장에게 말했다.

16549797384293.jpg“석연치 않으시다면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해보셔도 됩니다.”

명함에 이어 인터넷 검색이라니. 그보다 확실한 신원 정보가 어딨을까. 하도 흉흉한 세상이라. 원장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러자 그의 이름과 이미지가 들어 있는 결과값이 드러났다.

16549797384303.jpg“어? 강화 그룹이라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강화 그룹의 [대표] 직함에 원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49797384293.jpg“제가 유하준 아빠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 두 사람.”

‘아빠’라니. 이 단어가 이다지도 뭉클한 거였었나. 그 스스로도 제 모습에 픽, 웃음이 났다.

16549797384303.jpg“하준이 아버님이시군요!”

실은 원장도 두 사람이 찍어내듯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16549797384303.jpg“하준이 어머님께 연락 못 받으셨나요?”

원장이 경계를 풀며 슬쩍 주헌의 눈치를 살폈다.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등원할 수 없게 되었다며 아이 어머니가 연락을 넣었다고 했다. 보나 마나 이렇게 또 유지안은 도망가려는 거였다.

16549797384293.jpg“하.”

주헌이 헛숨을 뱉었다. 옆집 여자 말대로 두 사람은 도망친 거였다. 도둑고양이처럼 야밤에.

16549797384293.jpg“누구 마음대로.”

그의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날카롭게 빛났다.

16549797384293.jpg“그렇게 또 도망가셨겠다.”

짙어진 눈동자가 그의 기분이 비틀려졌다는 걸 말해주었다. 네 입으로 떠난 이유를 말하는 대신 또다시 도망치는 길을 선택한 거라면. 이젠 내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난 알아내야겠어. ** 청담동 고급 단독주택 단지. 그 앞에 빨간색 스포츠카가 멈춰 섰다. 잠시 후, 단정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의 최 집사가 정원을 향했다. 꽃의 가지를 자르고 다듬느라 여념 없는 중년의 여성에게 다가가 다소곳한 음성으로 여인을 불렀다.

16549797384303.jpg“사모님.”

부르는 목소리에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16549797384303.jpg“세은 아가씨 오셨는데요. 어디로 모실까요?”

이에 익숙한 듯이 최 집사는 용건을 꺼냈다.

16549797420775.jpg“……이쪽으로 오라고 해요.”

중년 여성의 시선은 여전히 꽃을 향해 있었다.

16549797384303.jpg“네.”

최 집사가 사라지고, 그제야 손에 들려 있던 정원용 가위를 내려놓았다. 기르스름한 눈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동안 외모. 김 여사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뿜어내는 분위기는 사나운 이빨을 숨기고 있는 거친 맹수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아들이 꼭 닮아 있었다.

16549797420784.jpg“어머님, 저 왔어요.”

살랑거리는 플로랄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세은이 웃으며 나타났다. 그런 그녀의 말에 김 여사는 시선을 움직여 세은을 쳐다봤다.

16549797420775.jpg“왔구나.”

한 성격 하는 세은이지만 이상하게도 김 여사 앞에선 유순해졌다. 주변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는 자꾸만 세은을 위축되게 만들곤 했다.

16549797420784.jpg“네. 아 참, 이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 사 왔어요.”

세은이 내민 쇼핑백엔 달콤한 다쿠아즈가 담겨 있었다.

16549797420775.jpg“나는 단 거 싫어한다.”

기껏 사 온 사람의 성의도 한순간에 무색하게 만드는 김 여사의 말에 세은의 입술이 슬그머니 뒤틀렸다.

16549797420784.jpg‘뭐가 저렇게 까다로워?’

하지만 곧 제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주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뜻이기도 했다. 주헌은 모친인 김 여사에게 약하니까.

16549797420784.jpg“그럼 어머니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제가 잘 기억해놓았다가 다음번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걸로 사 올게요.”

방긋 웃으며 세은이 말했다. 이 정도쯤의 애교면 아무리 무뚝뚝한 김 여사라 해도 넘어오겠지, 싶었다.

16549797420775.jpg“여긴 왜 온 거니?”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이유가 뭐냐는 뉘앙스가 마치 면박같이 느껴졌다. 착한 며느리가 되려 노력하던 세은은 폭발하려는 성질머리를 가까스로 죽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16549797420784.jpg“어머님. 주헌 씨가 저한테 약혼 파기하자고 연락 왔었어요.”

그제야 평정을 유지하던 김 여사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16549797420784.jpg“도대체 제가 얼마만큼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약혼식까진 주헌 씨, 마음 고쳐먹고 제 옆에 서 있게 만들어주시겠다면서요…… 흑.”

물론 처음부터 주헌에게 마음을 빼앗겨 일방적인 구애를 하고 쫓아다니던 건 세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은에게 강화 그룹 며느리 자리를 제안한 건 자신이 아니라 김 여사였다. 그래놓고 파혼이라니!

16549797420784.jpg“지난번에 약혼 드레스 피팅하러 간 날도 저 혼자 버려놓고…… 흑…… 가 버렸어요……. 같이 밥 먹기도 싫대요. 저 어쩌면 좋아요? 주헌 씨는…… 흐읍…… 절 싫어하나 봐요…… 흑흑.”

눈물을 쥐어짜느라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세은은 김 여사의 동정심을 부추기려 열심히 눈물을 끌어모았다.

16549797420784.jpg“전 이제 어떡해요, 어머님? 흡…… 전 어머님만 믿고 있었는데……. 저희 아빠 귀에 주헌 씨가 이런 행동 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면 무척 실망하실 거예요. 강화 그룹과 세광 건설의 관계도 악화될 거고요.”

일부러 강화 그룹과 세광 건설의 관계 부분을 강조하듯 목에 힘주며 말했다.

16549797420784.jpg“그렇게 된다면 주헌 씨의 입지도 흔들리게 되겠죠. 아, 물론 강화 그룹은 굳건하고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계시니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지만요…… 흑.”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누르며 힐끔 김 여사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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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날아든 근심에 날카로이 올라간 김 여사의 눈꼬리가 한층 더 매섭게 휘어져 있었다.

16549797420775.jpg“눈물 거둬라.”

김 여사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16549797420775.jpg“강화 그룹 안 자리는 눈물이 많아서도 나약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세은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김 여사를 쳐다보았다.

16549797420775.jpg“주헌이에겐 내가 알아듣게 단단히 일러두마. 그러니 넌 너무 걱정 말고.”

16549797420784.jpg“정말요……? 정말 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로 세은이 물었다.

16549797420775.jpg“그래. 그러니 아버님껜 굳이 불필요한 언사는 삼가도록 해라. 굳이 걱정 안겨드릴 필요 있겠니?”

주헌이 약혼을 파기하고 싶어한다는 걸 비밀로 하라는 김 여사의 회유였다.

16549797420784.jpg‘당연하지. 이 아줌마도 은근 바보네.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걸 아빠한테 말 하겠어? 강주헌은 무조건 내 걸로 만들 거야. 내가 못 가지면 부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세은의 입꼬리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16549797420784.jpg“그럼요. 커플들이 결혼 준비하면서 다투는 건 종종 있는 거니까 아빠는 걱정 마세요. 제가 중간에서 더 잘할게요.”

김 여사가 주헌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아는 세은이었다. 집안의 치부를 세은이 알고 있다는 걸 김 여사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16549797420784.jpg“그럼 전 어머님만 믿고 있을게요.”

강주헌을 제 남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세은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1654979747759.jpg“아무래도 계속 출근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16549797477595.jpgㅡ 무슨 일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건너편에서 상대방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지안의 심장에 물감처럼 번졌다.

1654979747759.jpg“죄송해요, 대표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릴게요.”

죄송하단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하지만 그 말 외엔 내뱉을 수 있는 게 없었다.

16549797477595.jpgㅡ 그래, 알겠어. 깊게 묻진 않을게. 그래도 언제든 마음 바뀌면 돌아와. 알겠지?

1654979747759.jpg“그럴게요. 고마워요…… 언니.”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가. 어쩌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이연이 고마워서 그럴지도. ‘언니’라는 말이 작게 흘러나왔다. 그만큼 자신이 이연을 의지하고 늘 고맙게 생각한다는 걸 그녀가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해서.

16549797477595.jpgㅡ 약았어, 지안 씨. 이럴 때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주다니 말이야.

이연은 내내 자신을 ‘언니’라고 편히 부르라고 했다. 결혼한 남동생 하나를 둔 이연은 늘 여동생이 갖고 싶었다면서. 실제로 이연은 지안을 친여동생처럼, 하준을 친조카처럼 챙기고는 했다.

16549797477595.jpgㅡ 일단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당분간 휴가 중이라고 생각할게.

이연과 통화를 끝내고 지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이스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만큼 차가운 얼음을 오도독 씹으면서 수첩에 적은 할 일 목록을 훑어보았다. * 부동산에 연락해서 집 내놓기. * 하준이 새 유치원 등록. * 대표님께 연락드리기. * 태석에게 계좌 이체하기. 알뜰살뜰하게 모은 돈으로 구한 전셋집이었다. 하준과 처음으로 한국에서 단둘이 시작하는 첫 집이라 정말 열심히 고르고 정한 집이었는데. 2년 기본 계약에 4개월만 채우고 나가게 될 줄이야.

1654979747759.jpg“부동산은 전화했고.”

펜으로 목록 위에 줄을 쭉 그었다.

16549797384303.jpg‘일단 집은 인터넷에도 올려놓을게요. 근데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가, 집을 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그래도 빨리 나갈 수 있게 우리도 노력해볼게요.’

마음씨 좋은 부동산 아주머니가 최대한 힘써보겠다고 안심시켜주었다.

1654979747759.jpg“하준이도 새 유치원 찾았고.”

또 한 번 수첩 위에 줄이 그어졌다. 유치원에 들어가려면 이름을 올리고 한참이나 기다려야 한다던데. 운 좋게도 하준은 곧장 입소할 수 있었다.

1654979747759.jpg“대표님이랑 통화도 끝냈으니까 다음은…….”

태석에게 돈을 보낼 차례였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지내라고 했지만, 지안의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자신과 하준이 지내는 아파트는 전세도 엄청나게 비싼 곳이었다. 월세도 억 소리가 나올 만큼 어마어마했다. 시세만큼 맞춰서 주진 못 하겠지만……. 은행 어플을 켜고 차근차근 계좌번호와 금액을 눌렀다. 이체 완료 알림 문구가 뜨자마자 지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태석]

1654979747759.jpg“응.”

지안이 천천히 말했다.

16549797534637.jpgㅡ 지금 보낸 돈 뭐야. 이거 왜 보낸 건데.

1654979747759.jpg“미안. 내 형편에서 최대로 보낸 건데도 너무 조금이지?”

너무 적게 보냈나.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전세금이라도 돌려받았으면 이것보단 훨씬 더 많이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겸연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해보려는데 태석의 목소리는 어두컴컴했다.

16549797534637.jpgㅡ 너, 내가 이런 거 하지 말랬지.

1654979747759.jpg“미안. 그래도 낯짝 두껍게 네 집에 공짜로 얹혀살 순 없잖아.”

16549797534637.jpgㅡ 후우.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는 게 네 마음이 더 편하다면야.

빚지는 걸 싫어하는 지안의 성격을 잘 아는 그였다. 결국 태석이 한발 물러서자, 지안이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16549797534637.jpgㅡ 밥은. 먹었어?

1654979747759.jpg“응. 너는?”

16549797534637.jpgㅡ 난 아까 먹었지. 아, 내가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아트 디렉터가 있는데 요즘 디자이너 새로 뽑는다고 하더라. 네 생각나서 잠깐 얘기해봤는데 관심 있어 하더라고.

태석의 말에 지안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16549797534637.jpgㅡ 만나 봐. 아마 나를 통한 거라 해도 인터뷰는 약식으로라도 해야 할 거야. 여러 나라에 지사가 있어서 원하는 곳으로 배치해주는 것 같아. 어때?

너는 늘 주기만 하고, 나는 늘 받기만 하네.

16549797534637.jpgㅡ 내가 너무 주제넘게 나선 거면 미안.

1654979747759.jpg“아니야.”

시무룩해진 상대방의 목소리에 지안이 재빨리 축축한 분위기를 걷어내려 한층 밝게 대꾸했다.

1654979747759.jpg“신경 써줘서 고마워. 만나볼게. 근데 그 아트 디렉터라는 사람, 이름이 뭐야?”

16549797534637.jpgㅡ 존 오웬스(John Owens).

삽시간에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4979747759.jpg“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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