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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난 주헌 씨 약혼녀라고요 (30/103)

#30화. 난 주헌 씨 약혼녀라고요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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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803566834.jpg“이 여자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16549803566838.jpg“그렇다고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또 말해줄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취미 따위 없는 그지만, 오늘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의향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게 좋으니까.

16549803566834.jpg“그럼 세광건설이랑은…….”

16549803566838.jpg“애초에 그쪽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든 거란 소리고.”

의외의 이야기에 남자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런 반면, 주헌은 침착해도 너무 침착했다. 더군다나 보란 듯이 다가오는 남자를 예의주시하고 지안의 곁에서 단단한 벽처럼 경계하며 서 있는 모습이라니. 설령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주헌이 지안에게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이성을 공식 석상에 대동한 채 나타난 적 없던 그가. 온갖 유혹을 해오는 여자들을 돌보듯 하던 그가. 제 옆에 여자를 가까이 두고 바짝 경계하고 챙기는 모습에 아마도 한동안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할 거였다. 천하의 냉혈한 강주헌이 지독한 사랑에 빠져 얼간이가 되었다고.

16549803566838.jpg“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

보란 듯이 지안의 허리를 슬그머니 끌어안으며 말했다.

16549803566834.jpg“그, 그러네요.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 하하…… 그럼 이만 먼저 실례.”

주헌을 당황하게 하려다 도리어 본인이 당황해버린 남자였다. 강주헌이 언제부터 저런 사랑 운운하는 캐릭터였던 건지. 남자가 빠르게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슬쩍 지안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가감 없이 그의 소유욕을 드러낼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지안을 향하는 온갖 거슬리는 시선들을 다 차단할 수 있으니. 할 수만 있다면 지안을 제 안에 꽁꽁 가둔 채 제가 주는 사랑만 받게 하고 싶었다. 그 정도로 유지안을 사랑하고, 지독하게 빠져 있으니까. 같잖은 다른 놈들의 눈에 담기라고 그녀에게 드레스를 선물한 게 아니었다.

16549803566857.jpg“저, 저기…….”

지안이 얼굴을 붉히며 주헌을 밀어내려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다 못해 폭죽처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16549803566857.jpg‘이제 좀 놔줘도 되잖아요.’

16549803566838.jpg‘싫어.’

주헌은 완강했다. 이렇게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어봤자 쓸모없는 가십만 생성한다는 걸 아는 지안은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떼어냈다. 마음 같아선 옆에 가까이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의 옆에 ‘연인’으로서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확실하게 전하는 게 우선이었다.

16549803566834.jpg“아, 두 사람 모두 여기 있었군요.”

때마침, 존 오웬스가 주헌과 지안을 발견한 후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그 옆에 다른 중년의 남성도 함께였다.

16549803566838.jpg“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헌이 예의를 갖추자 지안도 옆에서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16549803566857.jpg“파티가 굉장히 멋지네요. 이렇게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16549803566834.jpg“오늘 굉장히 아름답네요. 큰 자부심 가지고 있는 우리 브랜드지만, 유지안 씨의 미모 앞에선 맥을 못 추는데요?”

분명 예의상 건넨 사탕발림일 텐데도 주헌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16549803566834.jpg“아, 오늘은 두 사람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서.”

존 오웬스가 함께 있던 중년의 남성을 소개했다.

16549803566834.jpg“마크 초이(Mark Choi). 한국계 미국인으로, 에뚜왈의 회장님입니다. 내 보스이기도 하고요.”

주헌과 지안이 동시에 눈꼬리를 올렸다. 중후함이 느껴지면서도 세련된 외모. 탄탄함이 느껴지는 몸과 예리하게 빛나는 눈빛. 굉장한 미남이었다.

16549803566838.jpg“처음 뵙겠습니다. 강화 그룹 대표, 강주헌입니다. 회장님이 한국과 연이 깊으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16549803566834.jpg“나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16549803566857.jpg“안녕하세요. [YEON]의 디자이너, 유지안입니다.”

16549803566834.jpg“아아. 존이 굉장히 탐내는 디자이너가 바로 그쪽이었군요. 그나저나 두 분이 굉장히 잘 어울려서 혹시 부부이신가 했습니다.”

순간,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주헌의 팔을 파고들었다.

16549803624088.jpg“어머나. 그렇게 보셨다니, 제가 섭섭해지려는데요?”

16549803624095.jpg“……!!!”

탐스러운 싱그러움을 무기로 나타난 여자. 주헌의 (전) 약혼녀, 세은이었다. **

16549803624088.jpg“뭐야. 저 드레스를 어떻게!!!”

세은이 노리던 에뚜왈의 신상 드레스. 주헌이 먼저 선수 치는 바람에 놓쳤다던 그 드레스였다.

16549803624088.jpg‘그걸 저 여자가 왜 입고 있는 거야?’

더군다나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16549803624088.jpg‘이래서는 누가 약혼녀인지 모르겠잖아.’

굴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일 테지. 두 사람을 보며 세은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주헌의 탄탄하고 듬직한 팔이 지안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제게는 단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그의 온기를 낯선 여자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처참하게 짓뭉개졌다. 굳이 캐내지 않아도 주헌의 옆에 있는 여자가 바로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그토록 노력했어도 누려 볼 수 없었던 강주헌의 옆자리. 당장에라도 달려가 두 사람을 찢어놓으려 했다. 톡, 하고 부러질 것 같은 높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16549803566834.jpg“보는 눈이 많으니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늘은 주헌을 따라 구 비서실장도 모처럼 동행했다. 그가 세은을 발견하고서는 슬그머니 다가와 조용히 조언했다.

16549803624088.jpg“지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거야?”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훑으며 세은이 앙칼지게 맞받아쳤다.

16549803624088.jpg“저 여자가 내가 찾던 여자 같은데. 맞지?”

강주헌을 홀린 여자. 제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 눈엣가시. 미치도록 신경질이 나는 건 그런 거슬리는 존재가 제가 원하던 최고의 드레스를 걸치고 최고의 남자 옆에 서 있다는 거였다.

16549803566834.jpg“맞습니다.”

16549803624088.jpg“누구야, 저 여자.”

16549803566834.jpg“[YEON]의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유지안 씨입니다.”

16549803624088.jpg“뭐? 그 유지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약혼식과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를 저 여자가 만들고 있던 거였다니. 그러면서 뒤로는 제 남자를 유혹해서 주헌의 입으로 파혼하자는 말까지 나오게 만든 게 분명했다. 세은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16549803624088.jpg“이건 나를 제대로 가지고 논 거야, 저 여자가.”

견딜 수 없는 치욕에 몸을 부르르 떨며 세은이 눈꼬리를 한껏 위로 끌어 올렸다.

16549803624088.jpg“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구 실장, 당신이 이제야 저 여자의 정체를 나한테 말했다는 거고.”

16549803566834.jpg“저도 오늘 보고 받은 사항이라 지금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16549803624088.jpg“그럼 뭐 해? 남들 다 알고 난 후에 알게 되는 건 쓰레기지 정보가 아니야.”

16549803566834.jpg“죄송합니다.”

저놈의 죄송하단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건지. 붉게 칠한 세은의 입술이 비틀렸다.

16549803624088.jpg“구 실장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이렇게 짜증 나는 상황을 대면해야 하는 게 매우 언짢을 뿐이고.”

김 여사가 입막음을 잘 해놓은 탓인지 주헌과 세은의 파혼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주헌이 파혼을 원한다고 한들, 그게 정말 현실화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단 얘기. 파티장 안의 사람들이 자신과 주헌 쪽을 번갈아 가며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어느 쪽 여자가 진짜인지, 강화와 세광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하이에나 같은 족속들. 이곳에 ‘진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16549803624088.jpg“그래도 이 모멸감은 받은 만큼 되갚아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해야지. 당하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기도 하고. 이 거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타파하면 좋을까.

16549803624088.jpg“저기, 있지.”

세은이 고개를 들며 구 실장에게 말했다.

16549803566834.jpg“네.”

16549803624088.jpg“전에 내가 물어봤을 땐 주헌 씨 만나는 여자 없다 그랬던 말, 기억해?”

2년 전에 약혼 이야기가 처음 나온 이후, 세은이 구 비서실장에게 제일 먼저 은밀히 물어봤던 거였다.

16549803566834.jpg“네. 그땐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랬다니. 그럼 언제 다시 만난 거야?

16549803624088.jpg“헤어졌다가 다시 감격의 재회라도 한 거야?”

16549803566834.jpg“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16549803624088.jpg“언제부터?”

16549803566834.jpg“지난번 [YEON]으로 약혼식 의상 가봉하러 가셨을 때부터입니다.”

그 말은 내가 드레스 갈아입는 동안 저 두 남녀가 희희낙락했다는 거야?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16549803624088.jpg“저 여자에 대해서 알아낸 거 또 뭐 있어?”

한동안 연락도 뜸했으니, 분명 더 알아낸 게 있지 않으냐고 따지는 어조로 물었다.

16549803566834.jpg“5년 전까지 대표님과 연인관계였고, 지금은 아이가 하나 있는 미혼모입니다.”

구 비서실장은 묘하게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16549803624088.jpg“남편도 없이 애를 낳았다는 소리야?”

그제야 늘 궁금했던 부분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5년 전에 갑자기 주헌이 두문불출하며 망가졌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었다. 그때 세은은 이탈리아에 있었던 터라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주헌에 대해 관심은 늘 있었기에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픈 내색 하나 없을 것 같은 그를 와르르 무너뜨린 게 뭔가 했는데.

16549803624088.jpg‘저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애를 가져서 충격을 받았나 본데?’

아니면.

16549803624088.jpg‘저 여자가 주헌 씨 애를 가졌다고 발목 잡고 한 몫 크게 뜯어내려 한 거야?’

아니. 그렇다면 저렇게 주헌의 옆에 멀쩡히, 그것도 다정하게 서 있을 수는 없다.

16549803624088.jpg‘뭐야. 그럼 애 딸린 미혼모라도 좋다는 거냐고? 저 눈물도 피도 없을 것 같은 강주헌이?’

그래서 집안도, 나이도, 외모도, 누가 봐도 훨씬 잘난 내가 저런 아줌마한테 밀린 거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16549803624088.jpg“개망신 좀 줘 볼까나.”

대외적으로는 착하고 수줍음 많은 아가씨. 표독스럽고 거친 실제 성격을 감추는 이중생활을 남몰래 이어온 세은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런 수모 따위, 제 쪽에서 잔뜩 짓밟아주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여자가 상대이니. 더군다나 김 여사는 아무 걱정 하지 말랬으니, 자신은 당당하게 주헌의 약혼녀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거였다. 세은은 주헌과 지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형형하고 냉기 흐르는 주헌의 눈빛이 저렇게나 부드러워질 수 있는 거였다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세은이 주헌에게로 향했다. 대화 소리가 들릴 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 세은의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주춤했다.

16549803566834.jpg“아아. 존이 굉장히 탐내는 디자이너가 바로 그쪽이었군요. 그나저나 두 분이 굉장히 잘 어울려서 혹시 부부이신가 했습니다.”

하! 지금 누구랑 누구를 ‘부부’로 엮는 거야?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세은이 주헌의 팔짱을 쓱 꼈다.

16549803624088.jpg“어머나. 그렇게 보셨다니, 제가 섭섭해지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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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803624095.jpg“……!!!”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지안 역시 화들짝 놀라며 주헌에게서 급히 몸을 뗐다.

16549803624088.jpg‘그럼 그렇지. 네 주제를 알라고, 이 늙은 아줌마야.’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세은이 생긋 웃으며 주헌을 올려다보았다.

16549803624088.jpg“나, 많이 기다렸어요?”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주헌의 시선이 걷잡을 수 없이 냉랭해진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세은은 개의치 않았다. 세광건설 회장의 장녀.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아무리 주헌이라 한들 이목이 집중된 곳에서 제 손을 쳐내진 못할 거였다. 그때였다. 탁-! 주헌이 매섭게 세은의 손을 쳐냈다.

16549803566838.jpg“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화를 억누르느라 눈매가 날카롭게 길어졌다. 하지만 세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6549803624088.jpg“내가 너무 늦게 와서 화났어요? 정말, 미안해요.”

일부러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그 위로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헌이 여지없이 또 한 번 손으로 툭, 세은의 얼굴을 밀어냈다.

16549803566838.jpg“그렇게 하면 다 받아주는 집에서 컸나 본데.”

시린 음성이 세은의 머리카락을 뻣뻣하게 서도록 만들었다.

16549803566838.jpg“빤히 보이는 수라서.”

남들 앞에서 자신에게 이토록 큰 창피를 준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세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16549803566838.jpg“유치해서 못 봐주겠어.”

그러자 세은이 버럭 소리쳤다.

16549803624088.jpg“너무해요! 난 주헌 씨 약혼녀라고요!!!”

웅성웅성.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세은의 외침에 많은 인파가 점점 모여들었다. 그때, 주헌이 한쪽 눈썹을 구겼다.

16549803566838.jpg“다시 말해 봐.”

그가 세은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16549803566838.jpg“누가 누구 약혼녀라고?”

주헌에겐 세은의 체면 따위,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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