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나한텐 유지안밖에 안 보여2021.11.15.
“다시 말해 봐. 누가 누구 약혼녀라는 건지.”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구멍이 짓눌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내, 내가 주헌 씨 약혼…….”
“온갖 문자와 전화로 성가시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날 더 화나게 만들고 싶은가 본데.”
힘주어 말하는 주헌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심장에 쿡쿡 박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때문에 머릿속까지 뒤죽박죽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무례하게 약혼을 파기하려 하고 날 두고 저 여자랑 바람을 피운 거잖아?
“아무리 주헌 씨가 무시한다고 해도 난 당신 약혼녀예요. 어머님도, 아버님도, 그리고 할아버님까지도 인정하신 관계라고요.”
일부러 지안에게 제 목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내가 그쪽과의 약혼을 동의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약혼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주헌은 철저히 거부해왔다.
“약혼자로서 동행하거나 함께 나란히 선 적은?”
원하지 않는 약혼이었으니, 세은과 무언가를 함께 할 리도 없었다.
“내 의사 없는 약혼은 하지 않겠다는 뜻도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이조차도 주헌은 김 여사와 세은에게 여러 차례 밝혔다.
“그걸 그쪽이 알고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고.”
그리고 오늘. 도 넘은 세은의 행동에 주헌의 인내심 또한 한계치에 다다른 거였다.
“그래도 당신은 내 남자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은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주헌이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제대로 파혼 의사 전달했을 텐데. 그랬는데도 못 알아먹으면 어쩌라는 거지?”
차가운 바람을 가르듯이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몰라요! 그런 말 들은 적 없다고요!”
세은이 완강하게 우겼다. 주헌만 반대하는 약혼이니 자신만 파혼을 모른다고 발뺌하면 이건 온전히 그의 거짓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박세은.”
그의 음성에 세은이 움찔하며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러더니 세은의 귓가에 들릴락 말락 한 크기로 읊조렸다.
“나는 사업상 기록할 게 많아서 모든 통화는 자동녹음되도록 설정을 해놔서.”
너에게 파혼을 고하던 통화 내역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이었다.
“그날 음성 파일, 찾아서 들어보면 되겠네.”
아오. 요즘 들어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저 통화 내역을 그대로 재생했다간 자신만 망신당할 건 뻔했다. 우기는 게 통하지 않으니 이젠 고전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 주헌 씨. 나는 그저…….”
울먹거리는 세은의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까지 매단 채 세은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세은의 눈앞에 누군가 내민 손수건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분이 울고 계시니 제 마음이 다 아프네요.”
눈을 들자 그곳엔 한류스타 현태석이 근사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이에 세은은 몰래 입술을 휘었다.
‘이것 봐. 꽃미남 대세 배우 현태석도 내 눈물에 넘어오잖아.’
주헌의 옆에 서 있는 지안의 난처한 모습이 보기 싫어 태석이 끼어들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세은은 혼자만의 상상에 깊숙이 빠졌다. 세은을 두둔하는 반응이 주변에서 일어나자 주헌도 동요할 거라 생각했다.
‘여자한테 눈물은 확실한 무기라고. 고전적이긴 하지만.’
그런데 주헌은 세은을 철저히 무시한 채 지안을 향해 몸을 틀었다.
‘뭐야. 이래도 저 여자가 중요하다는 거야?’
제게서 멀어지는 주헌을 보자 욱한 마음에 얼굴 위에 꾹 씌웠던 가면이 와장창 깨졌다.
“미혼모인 주제에.”
“……!!!”
“당신 이러는 거, 애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봐?”
순간, 커다래진 지안의 눈동자와 세은의 원망 어린 눈이 맞부딪쳤다.
“다른 남자 애까지 낳은 주제에, 가진 것도 없으면서! 겨우 봐줄 만한 얼굴로 남의 남자를 꼬셔?”
세은이 지안에게 달려들 기세로 따졌다.
“도둑년!!! 강주헌은 내 남자야. 내 거라고!!!”
하얀 손이 날카롭게 지안을 공격하자 주헌과 태석이 동시에 이를 막으려 몸을 틀었다. 타악-! 그러나 정작 세은의 손을 막아낸 건 그 누구도 아닌 지안이었다.
“뭐야! 이거 안 놔?”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다 들을 수 있어.”
속이 문드러지고 심장이 짓밟히는 기분을 참아내며 지안이 말했다.
“당신 심정,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니까.”
세은이 지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지안은 파르르 떨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 아들은 건들지 마.”
여자이기에 앞서 지안은 엄마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 하준의 엄마. 제 아들을 이런 식으로 입에 올리는 세은을 지안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이거 놔!”
그제야 지안이 움켜잡았던 세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손목이 자유로워지기가 무섭게 세은이 다시 한번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지안은 영락없이 맞겠거니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뺨이나 몸의 다른 곳에서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질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슬그머니 뜨자 제 앞에 널따란 주헌의 등이 있었다. 그가 쌩한 소리와 함께 이를 중간에 쳐낸 거였다. 미처 세은의 손을 막아내지 못한 태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딜 감히.”
주헌의 눈동자에 분노로 인해 붉은 기가 깃들었다.
“그 같지도 않은 입에 내 아들을 올려.”
내 아들이라니.
“아……아들?”
충격받은 세은의 눈동자가 쓰나미처럼 거칠게 휘청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세은은 지안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주헌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저 여자를 지키고 싶은 거야?’
더더욱 지안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멋대로 꾸며낸 사랑 놀음에 나한테까지 맞장구쳐달라 강요하지 마.”
쌀쌀맞은 주헌의 모습이 너무하다 느껴졌다.
“성가시고 민폐야.”
제게는 강화그룹과 주헌뿐인데. 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와의 결혼밖에 없는데. 그는 한없이 매정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는 유지안이 전부니까.”
너 같은 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아, 그리고 말은 바로 하지.”
깊은숨이 폐에 꽉 찬 채 빠져나오지 못하는 뻐근함이 느껴져 미간을 구겼다.
“유지안과 나 사이에 끼어든 건 당신이야. 어머니랑 당신이 멋대로 약혼을 꾸며내놓고서 날 그쪽 남자라고 말하는 거, 창피하지 않나?”
“…….”
“양쪽 집안 체면 생각해서 내가 이 정도까지 눈 감고 참아줬으면, 정도껏 해야지.”
나도……. 나에게도 당신이 전부란 말이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한텐 유지안밖에 안 보여.”
애초부터 눈독 들인 건 주헌이었다. 비슷한 집안의 결혼적령기 남자들이야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강화가 탐난 것도 강주헌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락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열심히 치장을 하고. 먹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는 법 연습을 하고. 나의 세상이, 모두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주헌이 지안의 허리를 감싸며 등을 돌리려 했다.
‘왜 다들 날 무시하는 거야.’
목이 불에 덴 듯 탔다. 손을 다친 후로 딸의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 여기는 아버지. 대외적으로는 딸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아버지인 척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쓸모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욱신.
“나한테 등 돌리지 마…….”
손가락뼈가 으스러지던 고통이 아직도 잔여하는 것처럼 마디 마디가 아파왔다.
‘나한테서 등만 보이는 이유가 뭔데!’
단 하나뿐인 가족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도. 자신이 사랑을 갈구하는 상대는 늘 등만 보였다.
‘다 저 여자 때문이야.’
이 원망의 화살은 모두 지안에게 향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세은은 음식을 서빙하기 위해 마련된 테이블 위의 날카로운 스테이크 나이프를 덥석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지안에게 질주했다.
“꺄아악!”
세은의 근처에 있던 여자가 이 광경을 보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부우욱-! 무언가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벌어진 상황에 지안이 옅게 눈동자를 떨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지안의 드레스가 일자 모양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주헌의 마음이 담긴 옷이란 걸 아는 지안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린 드레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너 같은 것 따위가 입을 옷이 아니야.”
세은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보다 못한 태석이 주헌에게 말했다.
“제가 대신 나서죠.”
태석은 조심스레 세은에게 다가갔다. 손수건을 건넨 호의 때문인지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잘못 쓰면 그쪽이 다쳐요. 위험하니까 이리 내요.”
조심스레 태석이 손을 움직여 세은에게서 스테이크 나이프를 앗았다. 세은 역시 지안에게 달려들던 매서운 기세와는 달리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저를 바라보는 주헌의 눈이 부친의 것과 겹쳐져 보였다. 질렸다는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은 무미하고 건조한 시선이 진절머리가 났다. 지안의 드레스가 찢어짐과 동시에 제 마음에도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저 여자가 잘못한 거야. 유지안, 저 여자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초조함을 감출 수 없으면서도 세은은 필사적으로 이를 숨겼다. 그 와중에 지안은 멍하니 제 드레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타까움을 느낀 태석이 지안에게 다가가려 하자 그 앞을 주헌이 슬그머니 가로막았다.
“뭡니까. 왜 막아요?”
답답한 마음에 태석이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현태석 씨까지 나서면 상황은 더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이 와중에 세은을 감싸고 도는 건가 싶어 태석이 얼굴을 더욱 크게 일그러뜨렸다.
“지안이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습니다.”
그러자 주헌이 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신 눈엔 유지안이 손 필요한 공주님으로 보여?”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주헌이 느른하게 말했다.
“유지안은 위기에 강한 여자야. 저 눈빛은 공주님이 아니라 전사의 것이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안이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더니 이내 기이한 행동을 했다. 부우우욱!
“……!!!”
**
“지안아!”
뒤늦게 세은이 벌인 소동을 알게 된 이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안에게 달려왔다.
“어쩜 좋아! 엉망이 됐네.”
지안은 난감한 얼굴로 터져 나오려는 숨을 삼켰다. 구석으로 몸을 좀 피해 볼까 하고 얼굴을 들었지만,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지안의 다음 행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리를 피한다면…….’
보는 시선이 줄어드니 부담은 사라지겠지만 자신은 세은에게서 주헌을 빼앗은 불륜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거다. 혹은 주헌의 숨겨진 여자, 유희를 위한 세컨드 정도로 여겨지겠지.
‘하지만 이 위기를 잘 이겨낸다면…….’
자신의 저력을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정·재계를 주름잡는 상위계층만 참석한 파티였다. 강화그룹과 주헌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래처나 교류하는 사람들이 있을 확률도 컸다. 제겐 호의적이지 않은 그들이 하나의 계기로 생각이 달라진다면. 그렇다면 주헌의 위신도 높아지게 되는 거였다. 피하지 않아.
“저…… 가위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칵테일을 서빙하는 남자에게 작게 부탁하자 그가 흔쾌히 가위를 가져다주었다. 가위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는데, 잠시 존 오웬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끄덕. 지안의 속내를 꿰뚫어 본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이에 그녀 또한 화답하듯 살짝 웃어보인 후 가위로 거침없이 제 드레스를 자르기 시작했다.
“……!!!”
파티장 내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과감한 가위질로 허리부터 아래로 쭉 떨어지는 레이스 겹단을 잘라내고, 세은이 길게 찢어놓은 안쪽 단을 더 길고 과감하게 잘라버렸다. 그러자 아까의 우아함을 보여주던 드레스가 단숨에 요염하고 몸의 실루엣을 돋보이게 해주는 디자인으로 탈바꿈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안과 주헌을 번갈아 보던 눈들에 놀라움이 들어찼다. 난데없는 치정 싸움에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에뚜왈 드레스가 망가지는 걸 보고 경악한 것도 잠시, 지안의 손에 또 다른 매력을 품은 드레스로 바뀌는 걸 보자 그녀를 보던 눈빛들이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주헌이 입술을 길게 늘이더니 말했다.
“이러니 내가 유지안한테 안 반할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