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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잘 지냈어? (54/103)

#54화. 잘 지냈어?2022.02.03.

며칠 후.

16549810084247.jpg“대표님, 저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될까요?”

오늘 해야 할 일정을 모두 소화한 지안이 커피를 이연의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하준과 다시 단둘이서 하는 생활로 돌아온 지 5일이 흘렀다.

16549810084254.jpg“당연하지. 어서 들어가. 그나저나 나도 하준이 못 본 지 오래됐네. 다음에 유치원 쉬는 날 있으면 데리고 와. 얼굴 좀 보게.”

이연이 지안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16549810084247.jpg“고맙습니다.”

지안이 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고객 응대가 아닌 드레스 디자인 및 제작을 맡고 있는 지안은 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웠다. 기한 내에 드레스만 완성하면 된다는 것. 이연이 지안을 한국으로 스카우트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라. 지안의 퇴근 시간에 맞춰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자 이연이 굳게 닫힌 문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16549810084254.jpg“응? 오늘은 혼자야? 강 대표님이 데리러 안 온대?”

16549810084247.jpg“네. 오늘은 바쁘다고 해서요.”

싱긋 웃으며 지안이 답했다.

16549810084247.jpg‘대표님한테도 주헌 씨가 이젠 익숙한 모양이야.’

최근 들어 주헌이 [YEON]에 수도 없이 드나든 탓이었다. 마냥 어렵게 느껴지던 주헌이 이젠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16549810084254.jpg“나도 덩달아 매일 강 대표님 얼굴 보다가 안 보니 괜히 아쉬운데?”

이연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옆에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 실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16549810084339.jpg“어머. 대표님, 강주헌 대표님이 아니라 이 비서님 얼굴 못 보셔서 아쉬운 거 아니에요?”

16549810084254.jpg“뭐? 아니야.”

자칭 연애 고수라 불리는 윤 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16549810084339.jpg“에이. 아니긴요!”

16549810084254.jpg“정말이라니까.”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이연은 여유로운 기색을 드러내려 애썼다.

16549810084339.jpg“두 분 사이 좋아 보이시길래 저는 썸 타시는 줄 알았는데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윤 실장이 다시금 물었다.

16549810084254.jpg“억측이야. 전혀 그런 사이 아닌걸.”

그래. 그런 사이 아니라고.

16549810084339.jpg“이 비서님, 굉장히 근사하게 생기셨는데. 호감 같은 거 전혀 없으세요?”

16549810084254.jpg“없다니까 그러네.”

없어야만 하는 사이였다.

16549810084254.jpg‘나는 사랑 같은 거 할 자격 따위 없는걸.’

옆에서 지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감추었다.

16549810084339.jpg“그 말씀 진심이세요?”

윤 실장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16549810084254.jpg“진심이고 아니고 할 게 뭐 있어. 이경훈 씨는 유지안 선생이랑 강주헌 대표랑 함께 만나면서 몇 번 말 섞은 것뿐이야.”

따끔. 제 입으로 내뱉은 말에 제 왼쪽 쇄골 아래가 따끔거리는 건 무슨 경우람.

16549810084254.jpg‘늑골신경통일 거야.’

브레이크 없이 직진으로 다가오는 경훈과 ‘친구’가 되기로 했지만, 굳이 윤 실장에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윤 실장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16549810084339.jpg“그럼 저 이 비서님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도 될까요?”

윤 실장은 진심이었다. 초밥을 사 들고 주헌과 경훈이 함께 [YEON]을 찾았을 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걸 그가 붙잡아주었고, 느닷없이 그때부터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16549810084339.jpg‘운명이었어.’

경훈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싶은 윤 실장이 본심을 드러냈다.

16549810084247.jpg“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지안이 끼어들었다.

16549810084339.jpg“저번에 살짝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모든 확인을 마쳤다는 얼굴로 윤 실장이 뺨을 붉혔다.

16549810084247.jpg“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연과 경훈 사이에 오묘한 분위기가 오가고 있다는 건 지안도 진작에 눈치챈 부분이었다. 특히 경훈이 이연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틀림없는 그린라이트라는 걸 확신했다.

16549810084339.jpg“사귀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십 대의 아름다운 순정이었다. 이에 지안과 이연은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16549810084339.jpg“이 비서님 완전히 제 취향이라서요.”

똑똑하지. 과묵한데 은근 자상하지. 지덕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근사한 남자라며 윤 실장이 경훈에 대한 핑크빛 감정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16549810084339.jpg“아, 그거 아세요? 이 비서님도 미국에서 유학한 수재라고 하더라고요. 강주헌 대표님이랑은 같은 대학 동문이고요.”

이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자신은 대부분 모르는 걸 윤 실장은 어떻게 아는 걸까 싶었다.

16549810084247.jpg“윤 실장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어색하게 굳어버린 이연을 보고는 지안이 살짝 나섰다.

16549810084339.jpg“강주헌 대표님이랑 함께 오셨을 때 몇 번 차 대접하면서 물어봤었거든요. 어, 그러고 보니 유 쌤도 같은 대학이셨겠네요! 그럼 이 비서님 학부생 때 사진도 갖고 계신 거 있으세요?”

16549810084247.jpg“아마도요. 찾아보면 몇 장 있을지도 몰라요.”

지안의 대답에 윤 실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6549810084339.jpg“혹시 찾으시거든 저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16549810084254.jpg“자, 자.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유 쌤은 어서 하준이 데리러 가야 하잖아. 갈 사람은 빨리 가고, 남아야 하는 사람끼리 다시 열심히 일하자고.”

자꾸만 길어지는 대화를 끊어내며 이연이 파고들었다.

16549810084254.jpg“어서 가. 갈 때 저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워지는 차도 같이 가져가 주면 더욱 좋겠는걸.”

주헌이 지안에게 선물한 자동차를 말하는 거였다.

16549810084247.jpg“너무 부담스러워서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두 손으로 모시고 다녀도 부족할 것 같아서요.”

조금만 찌그러지거나 작은 스크래치가 나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16549810084254.jpg“그래도 저렇게 언제까지고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능력 있는 남편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그냥 편하게 타.”

이미 주헌을 지안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이연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16549810084247.jpg“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 봬요.”

16549810084254.jpg“응. 운전 조심하고.”

손까지 흔들며 배웅을 끝낸 이연이 몸을 돌리자 정면에 웨딩드레스를 정리하고 있는 윤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싹싹하고 제 감정에 언제나 솔직한 밝은 그녀였다.

16549810084254.jpg‘이경훈 씨한테는 윤 실장 같은 사람이 더 잘 어울려.’

자신처럼 칙칙하고 어둠을 끌어안은 사람보다는……. 그때, 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잉-. 힐끔 액정을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경훈이었다.

16549810084254.jpg‘양반 되기는 글렀네.’

손톱으로 액정을 톡 건드리자 그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내용을 드러냈다.

16549810126377.jpg[오늘 저녁에 돼지 껍데기랑 목살, 어때요?]

흐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활기차게 웨딩드레스 정리에 몰두한 윤 실장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연은 이내 답장 버튼을 눌렀다.

16549810084254.jpg[좋아요. 지난번에 만났던 그 집에서 만나는 걸로 할까요?]

경훈의 마음에는 응해줄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빼앗아선 안 되는 거였다. 위이잉-. 또다시 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16549810126377.jpg[좋습니다. 저녁 8시 30분, 어때요?]

16549810084254.jpg[네. 좋아요.]

이연도 짧게 답을 보냈다. 윤 실장이라면 경훈을 웃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16549810084254.jpg“윤 실장.”

이연이 생긋 웃으며 윤 실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닌데. 어째서 입가에 엷은 경련이 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16549810084339.jpg“네, 대표님.”

햇살을 닮은 상대가 너무도 눈부셨다. 자신 같은 어둠은 더욱 짙게 느껴질 정도로. 이연은 더욱 입가에 힘을 주며 물었다.

16549810084254.jpg“오늘 저녁에 혹시, 시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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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유치원] 외부 디자인부터 고급스러움이 넘치는 초고가의 자동차가 유치원 앞의 주차장에 섰다. 엔진 시동을 끈 지안의 입에선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16549810084247.jpg“흐아. 겨우 도착했네.”

차가 저를 태우고 온 건지, 자신이 차를 신줏단지 다루듯 모셔온 건지. 이연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YEON] 앞에 세워둘 수 없어 가지고 온 건데 너무 객기를 부렸나 싶었다. 오는 내내 사고라도 날까 얼마나 심장이 떨리던지. 자신이 다치는 것보다 차가 다치는 게 더 마음 아프고 속이 쓰릴 것 같았다.

16549810084339.jpg“어머. 저 차, 우리나라에서도 몇 대 없는 차 아니에요?”

16549810084339.jpg“우리 남편 드림카인데. 저런 차가 유치원까지 무슨 일이래요?”

16549810084339.jpg“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네.”

아이들의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온 학부모들의 호기심이 온통 지안이 타고 있는 자동차에 꽂혔다.

16549810084247.jpg“판단 미스였어. 여기 오면 시선 집중될 거라는 걸 간과했네, 내가.”

너무 안일한 행동이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어찌 생각할지.

16549810084247.jpg“아니지. 주눅 들 필요는 없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주헌이 선물한 차량을 언제까지고 가만히 세워두기만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하준을 위한 카시트까지 준비해줬는데. 그러지 않아도 하준과 더 많은 곳을 보고 구경하기 위해 자동차를 구매할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고급 수입차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해봤자 남는 건 두통밖에 없다.

16549810084247.jpg‘에라 모르겠다.’

지안은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결심한 후 자동차에서 내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들이 다닥다닥 들러붙는 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16549810084339.jpg“어머. 저 여자는…….”

16549810084339.jpg“그 아이, 엄마 맞죠?”

16549810084339.jpg“저 사람이 누군데요?”

16549810084339.jpg“왜, 그, 있잖아요. 얼마 전에 해바라기반에 새로 들어온 남자애요.”

16549810084339.jpg“미혼모 자식이라던 그 애 말하는 거예요?”

거슬리는 소음이 순식간에 지안의 주변을 에워쌌다. 미혼모. 사생아. 지안과 하준을 두고 사람들이 일컫는 말이었다. 말이 좋아 싱글맘이고 한부모 가정이지,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거북하고 날카로웠다.

16549810084247.jpg‘나는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다고.’

그럴수록 지안은 보라는 듯 고개를 높게 들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16549810169604.jpg“엄마아ㅡ!”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차더니 작은 발 두 개가 빠르게 지안을 향해 달려왔다.

16549810084247.jpg“하준아!”

아침에 봤는데도 가슴이 벅차도록 반갑고 소중한 아이였다. 두 팔 벌려 하준을 맞이하는 지안을 향해 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달려와 안겼다.

16549810169604.jpg“엄마아ㅡ! 하준이가 저기 구름만큼 보고 싶었어요!”

16549810084247.jpg“엄마도. 엄마도 하준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16549810169604.jpg“엄마! 엄마! 오늘 하준이 유치원에서 공룡 그렸어요.”

요즘 들어 공룡에 푹 빠져 있는 하준이었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지안이 작은 복숭앗빛 뺨을 살포시 감쌌다.

16549810169604.jpg“엄마, 근데, 있잖아요. 오늘 태석이 삼촌이…….”

1654981016963.jpg“그 삼촌, 여기 있다!”

하준의 등 뒤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16549810169604.jpg“삼촌ㅡ!”

얼굴에 마스크를 낀 태석을 향해 아이가 와락 목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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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810169604.jpg“삼촌! 최고! 정말 정말 하준이랑 약속 지켰어요!”

약속이라니. 지안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짓자 태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4981016963.jpg“오늘 유치원 끝나면 만나기로 며칠 전에 하준이랑 약속했었거든.”

16549810084247.jpg“아…….”

지안의 낯 위에 난처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16549810084247.jpg‘아직은 어색한데.’

에뚜왈 파티 이후로 처음 보는 태석의 얼굴이었다. 가지 말라던 그의 말을 외면하고 뒤돌아섰던 게 내내 목에 걸린 가시 같아서 먼저 연락도 못 했다.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만나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맞닥뜨려버릴 줄은……. 그러나 태석은 고맙게도 평소와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1654981016963.jpg“그동안 촬영이 바빠서 연락도 잘 못 했네. 잘 지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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