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저씨랑 엄마랑 같이 사는 거 좋아요2022.02.17.
아이의 눈에 뽀글뽀글 기대감이 차올랐다.
“아저씨 튼튼해요?”
“꼬맹이 너라면 하루종일 안아줄 수도 있어.”
아이의 입에서 작게 우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할래. 안길 거야?”
이에 하준이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의 모습에 주헌이 픽,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이고는 팔을 내밀어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태석 삼촌이 안아준 것보다 훨씬 높았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높은 높이에 하준의 눈동자에 무지갯빛이 들어찼다. 하준은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키 크고 잘생긴 엄마 친구가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렸던 그 날을. 어째선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하준의 심장은 콩콩콩 뛰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어른 남자’에게 안겨서 높이 올라가 본 적은 태석 삼촌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전부 인사할 때밖에 없었는데. 그 외에는 엄마의 품에 안겨본 게 전부였다. 안락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과는 다른 크고 단단한 안정감. 자신의 등에 딱 달라붙어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함. 엄마 친구인 아저씨가 나타나 안아준 게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자꾸만 응석 부리고 싶어지는 품에 어째선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준이 얼굴을 폭, 하고 주헌의 목덜미에 묻었다.
그러자 마음까지 싱그러워지는 좋은 향기가 났다.
“……아……빠.”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하준이 앗, 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뭐?”
이를 놓칠 리 없는 주헌이 고개를 내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하준이 시선을 회피하며 그의 목을 꼭 안았다. 아저씨. 하준이는 아무 말 안 했어요.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그에게 닿았는지, 주헌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마음이 안정된 하준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저씨이-.”
“응.”
“나 안 무거워요?”
“전혀.”
“아저씨. 실은 나, 안아주는 거 좋아해요.”
“근데 왜 엄마한테는 말 안 해.”
“하준이는 무거우니까.”
아이의 눈에도 남자보단 여자가 약하다는 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몸이 가는 지안에게 안기는 게 하준으로선 좋으면서도 어째선지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안아 달라 조를 수가 없었다. 주헌의 품에 안긴 채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는 아이는 신이 났는지 뺨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엄마는 꼬맹이 안아주는 거 좋아할 텐데.”
“그러면 엄마 팔 아프잖아요. 엄마 아프면 안 돼요. 그런 거 하준이 슬퍼서 싫어.”
그 말에 주헌은 가슴이 시큰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후우-. 보나 마나 유지안 닮아서 혼자 걸을 수 있다, 다리 안 아프다 그랬겠지. 꼬맹이 주제에.’
한창 응석 부리고 떼를 쓰며 자랄 나이에 타인을 살피고 걱정하는 마음부터 배운 것만 같아서. 제 목을 꼭 끌어안으며 벙싯 웃는 아이의 미소가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품 안의 아이가 어찌나 가볍고 연약하게 느껴지는지. 조금이라도 세게 잡았다간 아이가 다칠까 봐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유하준.”
꼬맹이가 아닌 아이의 이름.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의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음성은 봄볕처럼 따스했다.
“원할 때마다 안아줄게.”
“……정말?”
신이 난 아이의 엉덩이가 주헌의 팔 위에서 들썩거렸다.
“가고픈 데도 다 데려가 줄게.”
“아저씨이. 진짜예요?”
제 아이는 원하는 걸 말하는 법보다 참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괴롭히는 못된 녀석들은 다 혼내 줄게.”
사람들의 무분별한 말들이 아이의 가슴을 할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갖고 싶은 장난감도 다 사줄게.”
작은 가슴이 상처보다 사랑으로 들어차길 바라는 마음에.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이 상처 주려 해도 마음이 단단해져서 모두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까닭에-.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사는 거 어때.”
아이를 더욱 옆에서 지켜주고,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지금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라면 하준도 받아들여 줄 것만 같았다.
“주헌 씨?”
그때, 일을 끝마치고 온 지안의 목소리가 뒤에서 흘렀다.
“왔어?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어?”
지금 막 왔는데 자리를 비켜달라니. 눈꺼풀을 한껏 밀어 올린 지안의 눈이 커졌다.
“남자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남자들끼리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지안의 입이 살짝 작게 벌어졌다.
“다 큰 형아들은 종종 그렇게 하거든.”
하준이 ‘형’에 꽂혀 있다는 건 주헌도 진작에 간파했다. 약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하준의 ‘형’ 로망을 슬쩍 자극했다.
“엄마. 나 아저씨랑 얘기할래요. 형아들끼리!”
이야기하면 형아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알겠어요. 나는 저쪽에 앉아 있을 테니 편히 이야기해요.”
어느덧 두 사람이 부쩍 친해진 모습에 지안은 가슴이 뭉클거렸다. 자신만 혼자 남겨두어 소외감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다정하고 오붓한 부자의 모습에 심장이 벅찰 만큼 행복했다. 지안의 모습이 멀어지자 주헌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가 두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데.”
아이의 까만 눈동자와 주헌의 진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맞닿았다.
“엄마 다친 게 다 낫지 않아서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아이를 향해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여느 때보다도 신중했다. 그 어떤 계약 체결할 때도 긴장하지 않는 그인데.
“나는 꼬맹이, 네가 마음에 들어서 같이 살고 싶거든.”
하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긴장이 된 나머지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싫다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아저씨, 나는요…….”
아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아이스크림 때문이 아니라. 저에게 다 사준다는 장난감에 심장이 부풀어 올라서가 아니라. 자꾸만 끌리는 ‘아저씨’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아이는 주헌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준이는, 아저씨랑 엄마랑 같이 사는 거 좋아요.”
. . . 하준과 의기투합한 주헌의 다음 행동은 바람보다 재빨랐다. 아이를 경훈과 잠시 두고 주헌은 지안을 따로 불러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 아예 같이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 관계까지 다 밝혀버린 마당에 애랑 둘이서만 지내는 모습 보면 그 학부모들은 또 있는 말, 없는 말 떠들어댈 것 같은데.”
“너무 빠르지 않아요?”
주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한 번 벌이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신중하고 싶었다.
“이미 5년 전에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을 일이야.”
주헌의 말은 지안을 욱신거리게 했다.
“그리고 어차피 곧 그렇게 될 거, 조금 앞당긴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나.”
그러나 지안은 무엇보다 하준의 마음이 걸렸다. 아이의 생각과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런 지안의 마음을 읽은 듯 주헌이 말했다.
“오늘 당장부터 같이 사는 건 아니니까 둘이 얘기해 봐.”
“……고마워요.”
참는 것, 기다리는 것에 약한 주헌인데 저와 하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다림을 자청하는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말이야.”
무언가 골몰하던 주헌이 입술을 열었다.
“……?”
“하준이가 혹시…….”
하준이? 다음에 이어질 말을 듣기 위해 지안이 그의 붉은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말을 아끼는 모습에 하려던 말이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이제는 주헌과 깊은 신뢰로 맺어진 사이니까. ** 주헌과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안과 하준이 나란히 신발을 벗었다. 지안의 발이 신발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무섭게 하준이 지안의 신발을 집어 옆쪽에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신발도 나란히 내려놓았다.
“우리 하준이, 이젠 척척 알아서 잘하네.”
“엄마 아들이니까-!”
유독 하준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밥도 먹었겠다, 눈 감기기 전에 우리 씻을까?”
“네! 엄마아- 하준이 버블 놀이 하고 싶어요.”
아이들용으로 나온 버블 색소 스프레이 놀이. 욕조에 물을 받은 후 스프레이를 뿌리면 형형색색의 거품이 생겨나는 것으로 하준의 최애템이었다.
“그래? 알겠어. 엄마가 물 다 받으면 부를게.”
“엄마! 하준이 샤워캡도!”
“응. 그럼 오늘 입은 외출복 하준이 혼자서 벗을래?”
“네에-! 그리고 벗은 옷은 빨래통에!”
아이가 쪼르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야무지게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지안도 행복한 얼굴로 미소를 띤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엄마아-. 하준이 이제 들어가도 돼요?”
얼마 후,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묻는 아이가 귀여워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넘어지니까 엄마 손 잡고 들어가. 잡아줄게.”
신이 나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아이가 지안의 손을 잡으려다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아. 여기 아야 한 거 아직도 아파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화상 자국이 아이에게 걱정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아니. 하준이가 걱정해준 덕분에 이젠 거의 안 아파.”
“그럼 아직 조금 아픈 거예요?”
“아주 조금.”
아이가 엉덩이를 욕조 바닥에 붙이고 앉자 물이 첨벙거리며 큰 너울을 만들었다.
“하준아.”
“……?”
버블 색소 스프레이를 손에 쥔 채 하준이 지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저씨랑 같이 사는 거, 어때? 엄마는 하준이 생각이 제일 소중해. 그러니까 우리 하준이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솔직하게?”
“응. 하준이 마음이 가지고 있는 진짜 생각. 엄마한테도 들려줄래?”
그러자 하준이가 몸을 지안이 있는 욕조 모퉁이 쪽으로 바짝 붙여오며 소곤거렸다.
“엄마아-. 하준이는…….”
“응.”
“아저씨가 좋아요.”
하준의 말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던 지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니까…… 하준이는 좋아. 아저씨랑 같이 사는 거.”
아이의 뺨과 귓등이 붉어진 모습을 보자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엄마는?”
하준이 제게도 같은 질문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엄마는 아저씨랑 같이 사는 거 좋아요?”
질문을 하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아이를 보는 지안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엄마가 싫으면 하준이는 엄마랑 둘이 사는 게 좋아.”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말하면 될 텐데. 엄마인 지안의 마음까지 헤아리려 하는 아이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하준이도 엄마 마음 듣고 싶은데. 솔직하게.”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안 예쁜 곳이 없는 자신의 아이를 향해 지안이 화답하듯 마음을 드러냈다.
“엄마도, 하준이랑 아저씨랑 같이 살고 싶어.”
솔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