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행복하게 지내요2022.02.24.
서로의 숨결이 뒤엉킬 만큼 좁아진 거리에 이연의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물었잖아. 그게 정말 당신 마음이냐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라면 괜한 희망을 주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미안하다, 말하며 그를 거절하면 되는 건데.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친구로 시작하자고 했어도 일말의 희망쯤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
이연의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으니까.”
조소하듯 경훈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해놓고, 결국엔 조급해져 이연의 집 앞까지 찾아와 그녀를 몰아세우는 스스로가 가소로웠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나 봐요.”
상대는 처음부터 쭉 아니라고 했다.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 따윈 없다고. 홀로 짝사랑하면 그만이니, 반드시 이어지는 사랑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니 혼자서라도 굳건히 그녀를 사랑해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윤 실장을 약속 장소에 대신 보낸 건 그에게 있어 상처였다. 차라리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차라리 같이 밥 먹기 싫다고 말하지. 경훈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윤 실장을 그 자리에 대신 나오게끔 만든 건 거절보다 더 지독한 처사로 다가왔다.
“친구, 없던 이야기로 하죠.”
담담하게 이어가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눈동자에 눅눅한 어둠이 언뜻 스쳤다. 상처. 이연은 경훈에게 상처를 준 거였다.
“경훈 씨…….”
내내 막혀 있던 목구멍을 겨우 뚫고 자그마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나락으로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숨조차 마음 편히 내쉴 수 없었다.
“행복하게 지내요.”
그 말이 마치 너 혼자 고독하게 잘살아 보라는 저주처럼 들렸다. 등을 돌려 멀어져 가는 경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연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눈가가 뜨거워져 소맷부리로 눈언저리를 꾹 누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고급 아파트 및 빌라들이 즐비한 서울의 부촌. 작은 조각 하나까지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해 온 고급 대리석을 사용했을 만큼 해외 유명 건축가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세를 탄 한 고급 주상복합 건물 앞에 검은색 세단 차량이 멈춰 섰다. 보조석에서 누군가와 나오더니 곧장 뒷좌석의 문을 열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긴 다리가 차에서 빠져나와 땅을 딛고, 곧 몸을 밖으로 빼내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트러짐 없이 고정된 머리카락. 햇빛마저 기죽일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이목구비. 움직일 때마다 매끄러운 고급 슈트 위로 드러나는 다부진 근육의 실루엣.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의 흐름마저 바꾸는 독보적인 압도감을 가진 남자, 강주헌이었다. 경훈과 또 한 명의 남자가 주헌의 뒤를 따랐다. 주헌이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건물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머. 오셨어요, 이사장님.”
“오늘은 강화그룹 대표로 온 거니 이사장이란 호칭은 생략해주시죠.”
반갑게 맞이하는 여자의 말을 가로채며 경훈이 정색하듯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이윽고 여자가 카드 명함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로얄 부동산의 제나 매니저입니다.”
[Zena(이승희) 010-xxxx-xxxx] 외국인 투자자들을 많이 접하는 중개업자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한국식 이름 대신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 아들을 격 떨어지는 ‘사생아’라고 부르던 여자에게 음성으로 대답을 하는 것을 포함한 고개를 까딱거리는 예의까지 차릴 생각은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매물부터 보죠.”
경훈이 대신해서 중개업자에게 말했다.
“아, 네네.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하기엔 겁이 날 만큼 매서운 주헌의 눈빛에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 아래쪽에 입주자 전용 카드를 터치하면 거주하는 층을 인식하고 자동으로 해당 층 버튼에 불이 들어옵니다. 오늘 보여드릴 집은 제일 위에 있는 PH(펜트하우스)이고요.”
거주하는 층이 아니고서는 내릴 수 없게끔 설정해놓은 시스템은 방범을 위한 것 중 하나였다.
“…….”
주헌은 가만히 듣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영 반응이 시큰둥하잖아? 이러면 안 되는데.’
중개업자의 속은 애가 탔다.
‘강화그룹 대표라고 해도 일단 올라가서 실내 레이아웃이랑 뷰를 보고 나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그만큼 자신 있는 매물이었다. 주헌에게 선보인 매물은 단순히 방문을 희망한다고 해서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미리 신청을 한 후, 방문객의 인적사항, 사회적 위치, 인지도 등을 고려해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 이곳을 둘러보는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거였다. 마음에 들어 매매를 희망할 경우에는 여러 심사를 거쳐 입주민을 고르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을 만큼 까다롭고 복잡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강화그룹 강주헌이 입주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 이 주거 건물은 더 높은 인지도를 얻으며 ‘강주헌 프리미엄’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목이 뻐근해질 만큼 높은 건물에 전 세대는 겨우 25세대. 그중에서도 가장 높고 실내 인테리어도 가장 공을 들인 펜트하우스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현관문을 열며 여자가 말했다.
“지문인식 시스템은 물론 홍채인식을 통해 보안 관리가 가능하게끔 되어 있어요. 세대마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 물론 화물용 엘리베이터, 비상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설치되어 있고요.”
문이 열리자 빛에 반짝거리는 샹들리에가 걸린 높은 천고가 돋보였다.
“방 5개, 욕실 6개로 이뤄져 있으며 부엌과 다이닝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요. 거실과 마스터 배드룸에서 파노라마 한강 뷰를 볼 수 있고 드레스룸에서도 보여요. 아, 펜트하우스에 걸려 있는 샹들리에와 크리스털 등은 모두 바카라사에서 스페셜 오더메이드한 제품입니다.”
곳곳을 설명하는 여자의 눈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여기 있는 다이닝 테이블과 거실의 한쪽 벽면은 스페인산 소딸리따 대리석을 사용했어요. 소딸리따가 굉장히 희귀한 광물이라는 건 아시죠?”
신이 나서 설명하는 여자는 자랑스러운 듯 다이닝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피스라줄리와 비슷한 블루 색상인데 훨씬 더 오묘하고 근사해요. 이 건물 전체에 사용된 대리석은 모두 천연 대리석인 데다가 비싼 제품으로 시공해서 건물 자체를 예술품으로 만들어버렸을 정도예요.”
열심히 설명하는 중개업자의 소리가 전부 같잖게 들렸지만 주헌은 내색하지 않았다.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여자의 설명을 듣고 있던 주헌이 천천히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리며 경훈과 함께 나란히 서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러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음. 전반적으로 괜찮다고 생각은 됩니다만 구매를 권유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에 여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지금 여기에 들어간 제품들이 얼마나 고급인데……!”
“다 천연 대리석을 사용했다고 아까 말씀하셨죠?”
남자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네. 장담할 수 있어요.”
그 말에 남자가 눈썹을 뾰족하게 세웠다.
“아무래도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중개업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메인 현관에 사용된 대리석은 천연 대리석과 흡사해 보이는 인조대리석입니다.”
“뭐, 뭐라고요?”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인조대리석을 천연 대리석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속이는 경우도 많죠. 네로마퀴나라는 대리석인데 그 제품은 스페인산이 아닌 중국산입니다. 스페인산이 강도가 훨씬 높고 가격도 더 비싸죠. 소딸리따 대리석에 비하면 그렇게 비싼 대리석도 아닌데 고급 차별화를 전략으로 세운 매물 치고는 사용된 자재가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그쪽이 잘못 안 거겠죠. 그럴 리가 없어요!”
당황한 여자의 목소리가 한껏 달아올랐다.
“저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은 것일 뿐,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더러 틀렸다고 말하는 남자의 언행에 중개업자가 앙칼지게 따져 물었다.
“그러니까! 잘못된 정보를 말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라고! 당신 누구야? 누군데 부동산 거래하는 데까지 쫄래쫄래 따라와서 훼방을 놓는 거냐고!”
“이분은 저희 다이나 호텔을 디자인한 분이십니다.”
경훈의 말에 여자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저 남자가 그럼 크리스 강이라고?’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경훈의 옆에 서서 한마디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에 또 다른 비서인가 싶었다. 그랬는데 세계 굴지의 건축가 크리스 강이라니! 온갖 건축상을 휩쓸며 찬사를 받는 남자를 눈앞에서 보고도 여자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내가 아는 게 맞아요. 그쪽이야말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는 거죠! 내가 이사장님 댁 아드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지금 제게 일부러 망신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끝까지 바득바득 우기는 여자는 구질구질했다. 겨우 이까짓 걸로 망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여자의 말은 주헌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그럴 리가.”
주헌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겨우 이까짓 걸로 망신이라고 할 수나 있나?”
가시 돋친 음성에 여자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내가 사적인 감정을 이런 데까지 끌어들일 사람으로 보여요?”
주헌의 말에 여자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승희 씨.”
절제된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오자 여자가 움찔하며 뒤로 주춤거렸다.
“모든 걸 있는 사실 그대로 보는 안목부터 키우시죠. 내 아이도, 내 여자도, 이 펜트하우스에 대해서도.”
허를 찌르는 주헌의 목소리는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매물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 분과 거래하기는 무리입니다.”
이미 오늘 이곳에 오기 전, 경훈으로부터 해당 매물에 대해 떠도는 잡음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은 주헌이었다.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가격이 더 적게 나가는 대체 자재를 사용하고 실제 예상했던 시공 기간보다 1/3이나 단축되어 완공되었다는 것까지. 부실공사를 했다는 근거였다.
“나와 내 가족들이 편히 있을 수 있는 주거공간을 찾는 중요한 일인데 귀하는 신뢰할 수가 없어서.”
자존심을 짓밟힌 여자는 입술만 짓씹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고급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성북동. 오랜만에 집을 찾은 강 회장은 아끼는 난 화분을 정성 들여 닦는 중이었다.
“허허. 올해는 꽃 좀 피우려나.”
10년째 난을 키우는데, 꽃을 본 것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식이나 꽃이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똑같구먼.’
그때, 최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때가 왔음을 눈치챈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 방으로 오라고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