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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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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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2022.05.16.
순간, 고요가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등장한 태석은 주변을 쓰윽 둘러보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시선을 만끽하는 듯 태석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태석을 바라보는 김 여사와 세은의 표정은 약속이나 한 듯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단상 가까이 다가가 섰다.
지안 또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태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태석은 어색함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그 와중에도 지안이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워 조금만 더 눈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실례 좀 해도 될까요?”
태석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릴 줄 알았던 주헌은 흔쾌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계단을 밟고 단상에 오른 그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현태석입니다. 갑자기 제가 나타나서 아마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놀라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놀란 건 김 여사였다.

‘저 아이가 여긴 어떻게.’
쿵. 쿵. 쿵.
심장이 가슴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에 김 여사가 떨림을 감추려 양손을 꼬옥 맞잡았다.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에 묻혀 태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제 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 여사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윤환 역시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김 여사는 굳어 있는 세은을 그대로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세은은 초조함을 애써 감추며 태석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태석이 고개를 돌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찰나였지만 세은은 보았다.
소름이 돋을 만큼 살벌한 그의 눈빛을.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갑자기 나타난 현태석은 세은의 속을 긁어놓았다.
태석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유지안 씨와 저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입니다.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고요.”
태석은 마이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유지안 씨는 제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소꿉친구. 가족.
사실이면서도 태석에게는 언제나 걸림돌 같은 단어였다.
유지안 앞에선 오직 ‘남자’이고 싶었으니까.
그때, 한 기자가 물었다.

“가족 같은 사이라면 결혼을 약속한 연인 관계라는 겁니까?”

“아뇨. 저와 유지안 씨는 절대로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세은의 말에 불신이 생겨 태석의 말을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유지안 씨와 저는 말 그대로 진짜 ‘가족’일 뿐입니다.”
진짜라니.
모두의 낯빛은 떨떠름했다.

“저와 강주헌 대표님은 형제니까요.”

“……!!!”

제 입으로는 내뱉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한번 떠나고 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나는 결국 너를 이렇게 포기하는 수밖에 없게 됐네.’
씁쓸했지만 다행이었다.
이렇게라도 지안을 지킬 수 있어서.
이를 지켜보던 세은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비겁하게!!! 이런 식으로 먼저 밝혀버리겠다고? 미친 거 아니야?’
몇 년 전, 김 여사를 만나러 갔던 세은은 우연히 서재에서 흘러나온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현태석은 주헌이 인생에 걸림돌밖에 안 돼. 둘이 이복형제라는 건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 특히 주헌이가 모르게 각별히 유의하고.’
김 여사의 목소리였다.
이를 계기로 세은은 따로 조사한 끝에 태석이 주헌과 이복형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태석이 주헌의 부친 윤환과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서 태어난 혼외자라는 것도.

“그 말이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강주헌 대표님과 전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형제입니다. 유지안 씨는 저의 친구이자 강주헌 대표님과 결혼 약속을 한 사이이고요. 아이 또한 두 사람의 친자가 맞습니다. 그러니 유지안 씨는 저의 형수……님이자 가족이 될 사이입니다.”
형수라는 말을 언급할 때 태석은 잠시 목이 멨다.
하지만 홀가분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 잠자코 듣고 있던 김 여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헌에게 줄곧 숨기고 싶었던 남편의 혼외자.
이런 식으로 강화그룹의 치부가 밝혀지게 되자 허탈함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제가 유지안 씨와 가까이 지낸 건 우정과 가족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억측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가족이 소중하기에 다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태석은 옆에 서 있는 주헌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자신의 역할은 다 했다는 의미였다.
이에 주헌은 태석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 현태석 씨가 한 말이 맞습니다. 더불어 박세은 씨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였다.
꽉 닫혀 있던 볼룸장 문이 또다시 벌컥 열리더니 이번엔 열 명 가까운 블랙 슈트 차림의 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들 중 가장 앞서 있던 남자가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러 앞까지 다가오더니 세광건설의 박 회장을 향해 하얀 종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박대웅 씨.”
회장님 소리만 들어오던 박 회장은 몹시 거슬린단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뭐야?”

“현 시간부로 특경법 사기, 횡령 등의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남자가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체포영장이었다.

“하! 내가 누군 줄 알고!!!”

“잘 압니다. 세광건설 회장 박대웅 씨.”

“야! 늬들이 뭔데 감히 나한테!!!”

“검찰입니다.”
남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박 회장을 보며 말했다.

“탈세, 비자금 조성, 상당한 포탈세액 포착, 대암동 개발 의혹.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많아 읊을 수가 없으니 이쯤하고 이만 같이 가시죠.”

“너희들!!! 이거 단단히 실수하는 거야!!!”

“아. 이미 박대웅 씨의 비상 이중장부, 분식회계도 모두 입수한 상태입니다.”

“뭐? 아니, 그걸 어떻게 당신이…….”
조금 전까지 당당하게 소리치던 박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대암동 개발 의혹, 경제 가중 처벌법상 탈세 혐의 비자금 조성, 세금 포탈 정황 포착, 비상 장부, 분식회계 모두 입수했습니다. 정 억울한 부분이 있으면 가서 말씀하시죠.”
남자는 주저 없이 수갑을 꺼내 박 회장의 손목에 빠르게 채웠다.
이를 본 세은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를 막아섰다.

“이봐요! 우리 아빤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댁들이 뭔데 지금……!!!”
나는 강화그룹 차기 안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어머님!”
세은은 도움을 청하듯 가까이 앉아 있던 김 여사를 쳐다봤다.
하지만 김 여사는 그녀에 대한 신경을 끈 것처럼 행동했다.
이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은은 주헌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최대한 불쌍한 척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달고서.

“주헌 씨. 우리 아빠 좀 구해줘요. 응? 빨리요! 우리 아빤 주헌 씨 장인어른이잖아요!!!”
모두의 시선이 세은의 등 뒤로 쏠렸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일 리 없는 그녀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마 제 손을 뿌리칠까 싶어 세은은 급기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주헌 씨밖에 없어요. 제발요.”
그가 손을 뻗어 제 팔에 들러붙어 있는 세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러고는 허리를 기울여 세은의 얼굴과 거리를 좁혔다.
이에 세은은 벌써부터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희망을 품었다.

‘아, 역시. 주헌 씨는…….’

“내가 왜.”
왜냐니. 세은을 향한 그의 음성은 한겨울의 시베리아 한복판처럼 차디찼다.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비틀린 입술로 그가 세은에게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이라니 그게 무슨…… 설마……. 주헌 씨가 우리 아빠를…….”

“제대로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 성심껏 준비했는데.”

“어, 어떻게 주헌 씨가. 나한테.”
세은의 눈동자가 배신감과 충격으로 얼룩졌다.

“그러게 정도껏 건드렸어야지.”

“……읏.”
세은의 손등을 움켜쥔 손이 강하게 조여왔다.

“내 아들과 내 여자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지금은 당신 아버지만 잡아가지만 당신도 준비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주, 주헌 씨.”
두려움과 공포에 세은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난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응징할 생각이거든.”
파앗ㅡ!
강한 힘에 주헌의 팔에 닿았던 세은의 손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매섭게 내친 거였다.
황망한 얼굴을 한 세은은 주헌의 곁에 있는 지안을 쳐다보았다.

‘다 저 여자 때문이야. 저 여자만 없었어도……!’
모든 원망의 화살이 지안에게로 향했다.
그때, 태석이 주헌 못지않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튼 생각 말고 가시죠.”
움찔.
잘 다듬은 손톱을 세웠던 세은이 손가락 힘을 쭉 뺐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박 회장을 뒤따라 볼룸장을 빠져나갔다.
박 회장을 체포한 남자가 걸어오더니 강 회장에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회장님, 좋은 날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강 회장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게. 오히려 우리가 고맙지.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들 하시게.”
한바탕 혼을 쏙 빼놓은 사람들이 멀어졌다.
워낙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 터라. 모두가 하나같이 어안 벙벙한 표정을 띠었다.
경훈이 슬며시 다가와 지안과 태석에게 샴페인이 든 잔을 하나씩 건넸다.
뽀글뽀글 기포를 머금은 황금빛 샴페인은 마치 밝은 해 같았다.
그가 또 하나의 샴페인 잔을 주헌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 진행 계속하시죠.”
주헌은 다시금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많은 소란으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강화를 믿고 지지해주신 만큼, 앞으로 더 이상의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 약속드립니다.”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기자님들께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단 한 줄의 거짓 없이 써주시길 부탁드리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프러포즈도 했고.
다소 어색하지만 새로운 가족도 생겼고.
못된 놈에게도 혼쭐을 내주었으니.
이젠 축하할 차례였다.

“다 같이 건배하시죠.”
완벽한 승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