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한 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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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한 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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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한 번쯤은
2022.06.09.

김 여사는 남편 윤환이 지내는 평창동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이는 이곳은 등 돌리며 집을 떠났던 때와 한결같은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이 풍성하게 잎을 달고 있는 거랄까.
그뿐이었다.

“여긴 변한 게 없네.”
엄밀히 말하면 부부 두 사람을 위한 집이었지만 김 여사는 이곳이 언제나 숨 막혔다.
늘 밤늦게 들어왔다가 일찍 나가는 남편.
공부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얼굴 보기 힘든 아들.
이 집에서 김 여사는 언제나 고독했다.
온기 따위 느낄 수 없는 집에서 혼자 기다리는 게 지겨워 재경은 이 집을 떠났었다.

“그러고 보니 20년이 넘었네.”
금수강산이 두 번은 족히 바뀔 만큼의 시간.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재경은 윤환과 별거 생활을 했다.
윤환은 평창동에. 김 여사는 청담동에.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옛 기억이 솟아나 기분이 자꾸만 떨어졌다.

“어머, 사모님.”
집안의 대소사를 거들며 챙기는 양 집사가 빠르게 걸어 나오며 김 여사를 마중했다.

“오랜만이네요.”
양 집사는 김 여사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였다.

“오신다고 연락을 주셨으면 미리 마중 준비를 했을 텐데요.”
양 집사의 말에 김 여사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 말이 마치 양 집사가 안주인이고 본인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이를 그냥 넘길 리 없는 김 여사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팔짱을 꼈다.

“이봐요, 양 집사.”

“네, 사모님.”
날카로운 김 여사의 눈빛에 양 집사가 공손히 두 손을 포개며 대꾸했다.

“나, 이 집 손님 아닌데.”
아무리 제 발로 이곳을 떠났어도 ‘부부의 집’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엄연히 이 집에 사는 사람이고 아직 강윤환 씨 와이프가 나인데 벌써부터 객 취급하는 거, 웃기지 않아?”
고용인답게 선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냉큼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양 집사의 얼굴은 난색이었다.

“양 집사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도 나한테 그렇게 들려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지 못하도록 콱 밟아주어야 한다니까.
김 여사가 양 집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두 번의 관용은 없을 테니 그리 알아요. 내가 없다고 본인이 이곳 안주인 행세하려 드는 것까진 좋은데 그래도 내가 있을 땐 조심해야지. 안 그래요?”

“네…….”
김 여사의 서늘한 웃음이 양 집사의 목덜미에 닿았다.
사실 안주인이 늘 부재중인 탓에 양 집사가 제멋대로 집 안을 휘젓고 다니며 다른 고용인들을 마음껏 부린 건 사실이었다.
그런 시간이 오래된 탓이었을까.
보기 좋게 김 여사의 앞에서 실수를 하고 만 거였다.
20년이 넘게 이 집에서 버텨온 만큼, 수습하는 능력도 남다른 양 집사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그이는?”
윤환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양 집사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2층에 계십니다.”
허리를 숙인 양 집사를 그대로 지나쳐 김 여사는 2층으로 향했다.
2층엔 주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과 김 여사의 작업실이 있었다.
미술 전공을 한 김 여사는 이곳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마저도 별거 생활을 하면서 모두 정리했지만.

‘그나저나 희한한 일이네.’
생전 윤환이 2층으로 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2층에 다다르자 넓은 다이닝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넓고 큰 벽엔 김 여사의 작품을 종종 걸어두곤 했다.
그리고…….

“이게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김 여사가 정원을 보고 그렸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분명, 이 집을 떠나면서 제 흔적은 다 없애겠다며 버린 거였는데.
어째서 이게 여기에.
왜.
항상 굳게 닫혀 있는 주헌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끌리듯 그곳으로 향한 김 여사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건장한 풍채를 가진 그녀의 남편이었다.
사교 모임에서 우연히 그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김 여사는 줄곧 그의 너른 등을 눈으로 좇곤 했다.
그게 평생의 일이 될 줄도 모른 채.

‘이젠 다 끝난 일이야.’
김 여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목에 힘을 주었다.

“저기.”
그제야 윤환이 뒷짐을 풀고 김 여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류 가지러 왔어요.”
이미 몇 차례나 비서를 통해 이혼 서류를 요구했지만 윤환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래서 결국 김 여사가 평창동까지 걸음한 거였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만 주면 내가 가져갈게요. 어디에 있어요?”

“…….”
윤환의 얼굴은 부쩍 거칠어 보였다.
무엇보다 김 여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윤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자고 산 송장처럼 저러고 있는 건지.’
이미 그를 향한 김 여사의 마음은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서재에 있어요? 나 잠깐 들어가도 되죠?”
그가 침묵으로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물러설 김 여사가 아니었다.
내놓지 않겠다면 자신이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주헌의 방을 나서려는 그때.
윤환의 음성이 김 여사의 고막으로 흘러들어 왔다.

“기어이 해야겠어?”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혼 말하는 거예요?”
김 여사가 되물었다.

“…….”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변하는 윤환의 낯빛은 오묘했다.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건 피차 원했던 일일 텐데.
왜 저리 어두운 표정을 짓나 싶었다.

“말했잖아요. 창립기념 행사까지만 당신 아내로 있겠다고.”
진심이었다.
어차피 주헌도 저를 두 번 다시 보려 하지 않을 테고.
강화그룹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은 다 완수했다.
남은 건 윤환과의 관계 청산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윤환의 말에 하마터면 김 여사는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
또다시 입을 꾹 다무는 윤환의 모습을 보며 김 여사는 모난 제 기분이 더욱 뾰족해지는 걸 느꼈다.

“이혼하려니 본인의 그 잘난 삶에 흠집이 나는 것 같아 싫어요?”
언제나 제멋대로인 남편에게 휘둘리는 건 이제 사양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윤환과 부부를 유지하는 건 더 이상 용납이 되질 않았다.

“나는 강화그룹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평생 다른 여자를 사랑한 남편, 내 아들에겐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운 아빠, 그 와중에 다른 여자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 이만하면 나 많이 참았잖아요.”
하고 싶은 말도.
성격에 맞지 않는 기약 없는 기다림도.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에서 김 여사가 터득한 건 그저 참고 또 참는 것뿐이었다.

“그 여자랑은 정말 하룻밤뿐이었어.”
윤환에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였다. 술 접대를 했고, 거하게 취한 상태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하룻밤을 보내게 된 거였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서 태석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땐 그 누구보다 당황했던 게 다름 아닌 윤환이었다.

“아버님이 그 애한테 주헌이 몫의 일부를 물려주셨어요. 유언장까지 고쳐가며 그 애한테 강화그룹 지분을 남겨주실 거라는 거,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 여사는 강 회장에 대한 배신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바쳐가며 지켜온 자신과 어엿한 후계자인 주헌에게 와야 할 지분을 남편이 멋대로 낳아온 혼외자식이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이후, 김 여사는 주헌이 흔들림 없는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마땅한 혼처를 물색하고 또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그 실수로 태어난 아이 때문에!!! 내 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빼앗기게 되었다고요.”
태석의 존재가 주헌에게 걸림돌이 될까 노심초사했다.

“그럴 일 없다는 거 알잖아. 강화그룹을 이어갈 사람은 주헌이뿐이야.”

“…….”
윤환의 말에도 김 여사는 고개를 돌렸다.
팔을 교차시켜 끼고 있는 김 여사는 최대한 강해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스물셋의 어린 아가씨는 어느덧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을까.
윤환의 눈에 김 여사가 입고 있는 긴 블라우스와 팬츠가 들어왔다.
불길을 뚫고 주헌을 구하느라 그녀의 몸엔 큰 화상 흉터가 남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못나게도 아내의 팔과 다리에 난 상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피했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미안해서.
그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염치가 없어서 줄곧 외면하기만 했다.
그가 좀 더 ‘미안하다’는 말을 빨리 건넸다면 지금의 두 사람은 달라져 있었을까.
아주 조금쯤은……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당신이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
김 여사가 언성을 높이느라 살짝 더워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냉기로 가득 찼다.
그녀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주헌이가 사랑한다는 그 아이, 당신이 반대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고.”

“…….”

“하지만 그건 한때뿐인 감정이었어. 지금은 그런 감정 같은 거, 남아 있지도 않고.”

“이제 와서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아요.”

“재경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음성.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그가 필요할 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었다.
지금에야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한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깊게 파인 골을 메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당신, 나한테 남편으로서 제대로 해준 거 아무것도 없었던 거 알아요?”

“…….”

“마지막쯤은 남편으로서 제대로 마무리해 줘요.”
그를 향한 미움도 원망도 모두 이곳에 놓고 가겠노라고.
그녀의 인생에서 강화그룹은 물론 강윤환 이름 석 자도 모조리 지워내겠노라고.

“한 번쯤은 남편 노릇 해 줘도 되잖아요.”
흔들림 없는 김 여사의 표정에 윤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김 여사는 윤환의 서재에서 이혼 서류를 찾아냈다.
이를 접어 가방 안에 넣고 화음 갤러리로 돌아오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관장님. 아까부터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는데요…….”
직원의 말에 김 관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은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기다린다고? 나를?”

“네.”

“누가?”

“……유지안 씨요.”
주헌과 결혼하기로 발표하고 나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싶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표독스러운 눈빛을 띤 김 여사가 곧장 지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살짝 허리를 숙였다.

“네가 여기엔 무슨 일이야.”

“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모친인 이영원과 똑같은 눈을 가진 지안이 언제나 거슬렸다.

“해.”
그러자 지안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김 여사에게 내밀었다.

“이거,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