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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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좋습니다
2022.06.30.
방금 전에 그건 뭐였지?
경훈을 바라보는 이연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맞닿은 남자의 눈동자는 잔잔한 바다처럼 온유했다.
들이쉬는 숨에 그의 향기가 섞여 폐부로 흘러들어왔다.
줄곧 잊을 수 없던 남자의 향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
조금 전에 우리가 한 게 키스였어요?
물으려던 입술이 입만 뻐끔거리며 다시금 침묵했다.
움직이다가 일어난 단순 사고였을까 싶다가도 그가 일부러 제게 키스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제 마음속에서 사고였다고 인정하기 싫은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경훈이 아직 저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이제 그만 비켜주시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소와 똑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경훈이 말했다.

“아…….”
이연이 재빨리 옆으로 몸을 물렸다.

“정말 죄송해요! 많이 다치셨어요? 제가 미쳐 못 봐서…….”
스태프가 경훈과 이연에게 다가와 살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킨 경훈이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연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넘어졌으니 도와주려는 것뿐일 텐데.
이게 뭐라고 심장이 널을 뛰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경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 잡아요.”
평소 같았다면 괜찮다고 거절했겠으나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 때문에 혼자 일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눈앞에 내민 손을 향해 팔을 뻗는 순간,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가듯 몸이 순식간에 위로 들렸다.
쑤욱.

“고마워요.”

“네.”
용기 내어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이연을 향해 그는 짧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또다시 제게서 멀어져 가는 남자의 등이 망막에 맺혔다.
붙잡지 못해 놓쳐버린 그 날의 기억은 줄곧 후회로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재회했을 때에도.

‘더 이상 후회만 하는 건 싫어.’
이연의 웨딩드레스를 다시 예쁘게 펴 주러 다가오는 스태프에게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잠깐만요. 1분이면 돼요.”
그러고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경훈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경훈 씨!”
공간을 크게 울릴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올곧았다.
무거운 웨딩드레스 자락에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경훈 씨, 잠깐만요!”
그제야 이연의 목소리를 들은 경훈이 걸음을 멈추며 뒤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그의 표정이 이연의 시선에 걸려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경훈의 시선이 흐르듯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자신이 먼저 붙잡아 놓고.
갑자기 고백에 가까운 말을 하려니 목이 꽉 조여왔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이내 숨을 고른 이연이 말했다.

“……좋아해요.”
어차피 후회하게 될 거라면.
적어도 최소한 자신의 마음만큼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었다.
그래야 차여도 후련할 것 같아서.
그래야 미련은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요.”

“…….”
느닷없는 이연의 고백에 경훈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심장이 떨려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이를 모두 최대한 숨기며 웃으려 애썼다.

“그래도 좋아해요.”
미안해요.
뒤늦은 고백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살짝 눈을 들어 경훈의 낯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그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망하지 말자.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한 거 아니잖아.’
아마도 그는 갑작스러운 제 고백에 떨떠름해하고 있을 거였다.

“정 대표님! 촬영이요!!!”
멀리서 스태프가 이연을 찾았다.

“붙잡아서 미안해요. 그래도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여전히 상대에게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 거겠지.
이연은 눈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그럼 잘 가요.”

**
촬영이 시작됐다.
찰칵. 찰칵.
포토그래퍼의 셔터 누르는 움직임은 쉴 새 없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시선은 조금 더 멀리! 손끝은 조금 더 오므리고!”
촬영 모델들을 향한 주문 또한 하염없이 지속됐다.

“지안 씨랑 태석 씨는 좀 더 붙어볼래요? 달달한 느낌 제대로 묻어나게!”
지안은 태석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기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진 속에서도 긴장한 게 느껴지니까 둘이 편안하게 대화라도 좀 해 봐요. 옛날부터 친구 사이라면서요?”
어색해하는 지안의 모습에 보다못한 포토그래퍼가 크게 말했다.

‘어떻게 편안히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요.’
원망스러운 눈으로 지안이 그를 쳐다봤다.
포토그래퍼의 뒤에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시선에 지안은 카메라 렌즈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양팔을 접어 스스로 팔짱을 낀 채 지안과 태석을 쳐다보고 있는 주헌의 살벌한 모습에 온몸이 소름으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지안과 무람없이 밀착해 있는 태석을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강주헌 씨, 질투심이 엄청나네.”
태석이 지안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픽, 하고 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 눈빛에 나 죽는 거 아니야?”

“미안. 신경 많이 쓰이지? 주헌 씨는 굳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데.”
미안한 얼굴을 하는 지안의 뺨을 태석이 손으로 감쌌다.

“괜찮아. 난 좋은데, 뭐. 대놓고 너한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뺨에 닿은 손길은 따스하고 다정했다.
태석의 마음이 어떨는지 지안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그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난 오늘 촬영 마음껏 즐길 거야. 그러니까 너도 강주헌 씨 신경 쓰지 말고 오늘만큼은 내가 네 남편이라고 생각해.”
사심이 깊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태석은 진심이었다.
아마도 지안과 가까이 닿을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러니 최후의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뭐?”
지안이 어안 벙벙한 얼굴을 했다.

“화보 촬영도 연기라고 생각하면 더 잘 나오거든. 내가 신랑, 네가 신부니까 날 사랑하는 상대라고 생각해 봐.”
그렇게라도 지안의 눈에 담길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지안의 곁에 가까이 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일이니까 제대로 하자고.”
결국 제 본심은 숨기고 그럴싸한 말로 지안이 그에게 열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 일은 제대로 해야겠지.”
주헌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하던 지안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전과 달리 훨씬 적극적인 모습으로 태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 포즈 아주 좋아요! 자, 거기서 조금만 더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 볼까요? 키스할 듯 말 듯 한 느낌으로.”
포토그래퍼의 말에 주헌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지안과 태석은 어색함을 지우며 입술을 열었다.

“촬영이니까.”

“응. 키스하라는 게 아니라 하는 듯한 느낌인 거니까.”

“내가 남자니까 리드할게.”
태석이 지안의 등허리에 팔을 두르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오밀조밀한 지안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주헌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 걸까.
지안의 얼굴은 그 어느 때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주변에 촬영 소품으로 쓰이는 꽃들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미모 앞에선 그 아름다움도 빛을 발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얼굴을 내린다면…….
그렇게 한다면 지안과 입맞춤을 할 수 있을까.
무방비한 상태로 그의 눈앞에 보이는 여자의 붉은 입술이 마치 금단 열매 같았다.
먹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지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친구로서의 자리도 상실하게 되겠지.’
그녀와의 입맞춤은 당장 죽어도 여한 없을 만큼 달콤할 게 분명했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제 사랑이 이뤄질 수는 없어도 지안의 입술을 한 번쯤 탐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녀를 강주헌에게 보내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때였다.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불쑥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
지안과 태석이 동시에 움찔거리며 거리를 띄웠다.
꽃?

리시안셔스 한 송이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 거였다.
그리고 이를 들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주헌 씨……?”
질투를 인내하는 데 한계에 다다른 주헌이 험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까워.”
수컷은 수컷이 알아본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태석이 지안에게 키스하려는 걸 감지하고 재빨리 옆에 있던 꽃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그였다.

‘어딜.’
감히 누굴 넘보냐는 듯한 주헌의 눈빛은 매서웠다.

“촬영하는 것뿐인데 강주헌 씨는 굉장히 독점욕이 강하네요. 그래서는 지안이가 많이 갑갑해할 텐데.”
일부러 주헌에게 들으라는 듯, 태석이 비꼬았다.

“남의 걸 훔치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주헌도 이에 맞서 태석의 속을 긁었다.

“제3자는 촬영에 방해되니 좀 비켜주시겠어요?”
태석이 지안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만큼은 자신과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거였다.
주헌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도 그럴 게, 태석과 지안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누가 보아도 행복한 신랑, 신부처럼 보였다.
톱스타 특유의 오라와 함께 태석은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날 만큼 절륜했다.

‘거슬려.’
태석이 거슬렸다.

“촬영을 재개하지 않으면 끝나는 것도 늦어질 텐데요.”

“…….”
태석의 목소리에 주헌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그저 날카로운 시선이 태석에게 닿았다가 멀어지기만 할 뿐.
그때, 포토그래퍼가 말했다.

“저기, 강 대표님!”
주헌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신경이 포토그래퍼에게 옮겨갔다.

“혹시 오늘 바쁘세요? 아, 제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나요?”
순간, 주헌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건 바빠도 안 바쁘다고 말해야 하는 거라고, 그의 직감이 소리쳤다.

“아니. 오늘은 한가한 편입니다만. 무슨 용건이라도?”
일부러 태연스러운 얼굴로 주헌이 물었다.

“여기에 서 계신 걸 제가 몇 장 찍어봤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요. 혹시 시간 되시면, 오늘 촬영에 함께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앵글에 담긴 주헌은 태석에 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였다.
태석이 부드러운 잘생김이라면, 주헌은 강렬하고 거친 잘생김이었다.

“좋습니다. 하죠, 그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