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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동생 갖고 싶어요 (102/103)


#102화. 동생 갖고 싶어요
2022.07.21.


경훈은 이연의 얼굴에 집중한 표정이었다.


“윤 실장이랑 사귀고 있잖아요.”

“그 사람이 그래요?”

경훈의 물음에 이연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둘이 자주 만나는 듯했고, 친근해 보여 당연히 사귀겠거니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윤 실장에게선 경훈과 사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사귀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답답하다는 듯, 경훈은 맨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윤 실장님과는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윤 실장은 경훈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지만, 그는 거절을 한 터였다.


“어째서…….”

“어째서냐니. 당신 바보야? 내가 당신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머릿속이 멍해진 기분을 지워내지 못한 채 경훈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그때 아무런 말도…….”

안 했어요?

이연이 고백했을 때, 경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야 놀랐으니까.”

경훈은 여전히 이연을 품에서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정이연 씨가 돌직구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 또한 이연의 고백이 생시인지 꿈인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요.’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무얼 뜻하는 걸까, 생각하던 중 이연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올까, 메시지가 올까,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며칠을 흘려보냈다.

그런데도 이연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자, 결국 경훈이 그녀의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좋아합니다, 정이연 씨.”

이연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심장이 벅차올라서.

이 순간이 꿈만 같아서.


“나도 좋아해요. 이런 나라도…… 괜찮아요? 죽은 옛 연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구질구질한 사람인데…….”

“난 정이연 씨한테 그 사람 잊으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게 또렷하게 들려왔다.


“우리 나이에 지나간 연애사 몇 개쯤은 일반적이고, 정이연 씨의 경우엔 안타까운 이별을 한 것일 뿐. 헤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걸 깨끗이 잊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는 정이연 씨의 그런 부분까지도 좋아하는 거니까.”

비로소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 그만 밀어내고 연애해요.”

이연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경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많이 좋아해요.”

“알고 있어요.”

경훈은 설핏 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내림과 동시에 입을 맞춰왔다.

머릿속을 아득하게 채워오는 달콤함.

이연의 심장이 질주하듯 빠르게 뛰었다.


 

**

유승호는 하준을 납치하려 했던 미수 사건에 세은을 수차례 폭행하고 살해하려 한 혐의까지 더해져 징역 30년을 구형받았다. 그는 너무 길다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의식을 찾은 세은은 다시금 조사를 받게 되었고, 유승호가 녹음해둔 음성 파일이 발견되어 징역형을 면하기엔 어렵게 되었다.

또한 구정모는 서류 조작, 기밀 누출, 납치 동조 등의 건으로 역시 구속되었다.

김 여사는 화음갤러리 관장직에서 물러나 제주도로 내려갔다.

조용히 자연에 파묻혀 살겠다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들은 차근차근 정리되어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하준의 생일이 되었다.

주헌은 끊임없이 시계를 곁눈질하며 시간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유치원 친구들이 올 예정이었다.

주헌은 과감히 회사까지 쉬며 생일 파티 준비를 했다.

정원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에어바운스부터 방방이, 야트막한 높이에 해먹까지 설치해 두었다.

너무 과하다는 말에 주헌은 한마디로 응수했다.


“나한테는 우리 하준이 첫 생일이야.”

백일도, 한 살을 기념하는 돌잔치는 물론 두 번째 생일, 세 번째 생일, 네 번째 생일까지 모조리 놓쳐버린 그였다.

그렇기에 이번 생일에 더더욱 지극정성이었다.

지안에게는 부엌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허리에 반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주헌이 가감 없는 실력 발휘를 하는 동안, 하준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찾아왔다.

덩달아 하준도 그 어느 때보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작고 예쁜 꽃 같은 아이들은 하나 같이 눈을 반짝거리며 우와-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알록달록한 풍선, 아이들의 취향 저격인 정원의 놀이터, 그리고 긴 테이블 위에 놓인 엄청난 종류의 음식들까지.

아이들의 마음도 알록달록하게 물들어갔다.

다 같이 고깔모자를 쓰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런 근사한 생일파티는 처음인 터라.

아이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하준의 어깨가 단숨에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며 으쓱거렸다.

주헌이 멋지게 차린 음식도 열심히 먹은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너희 집 되게 넓다. 우리 집보다 커!”

“우와! 여기 이층집이야!”

“너희 집은 방 몇 개야? 세 개보다 많아?”

아이들의 연이은 물음에 하준이 한껏 뿌듯해진 얼굴로 말했다.


“하준이가 우리 집 소개해 줄까?”

“응!”

이에 하준이 쪼르르 달려와 주헌의 바지춤을 흔들었다.


“아빠아.”

“응?”

“빨리빨리. 하준이한테 귀 좀 주세요.”

할 말이 있다며 아이의 두 손은 이미 동그랗게 말아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주헌은 허리를 숙이며 귀를 가까이 댔다.


“뭔데.”

“아빠아. 친구들한테 집 구경시켜줘도 돼요?”

“2층에도 올라갈 거야?”

“네! 거기에 있는 하준이 장난감 보여 주고 싶어요.”

2층에는 강일도 회장이 보내온 장난감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다 강윤환 부회장까지 엄청난 선물을 공세한 덕분에 아예 2층 거실 공간을 하준이의 플레이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공간을 하준은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좋아. 대신 뛰지 말고 조심히 올라가야 해. 알지?”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닌 터라. 주헌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네에!!! 아빠 너무 좋아!”

하준이 주헌의 목을 꼬옥, 하고 끌어안았다.

달콤한 포옹이었다.

.
.
.

하준은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장난감을 보여 주며 신나게 자랑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때, 하준이 친구 소은이가 한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긴 무슨 방이야?”

“엄마 방.”

“엄마 방?”

“응. 여긴 엄마 방. 저긴 하준이 방. 저-어기 있는 방은 아빠 방.”

하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소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집 이상해.”

이상하단 말에 또 다른 친구 재훈이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맞아. 왜 아빠 방이랑 엄마 방이랑 따로 있어?”

“너희 아빠랑 엄마는 같이 안 자?”

하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빠랑 엄마는 항상 같이 자는 건가 싶어서.

우물쭈물하던 사이, 소은이 물었다.


“하준이, 너네 아빠 엄마 이혼해?”

“이혼이 뭐야?”

하준이 물었다.


“아빠랑 엄마랑 따로 사는 거야. 어, 그러면, 어, 아빠랑 엄마 중에서 누구랑 살지 골라야 해.”

이번엔 재훈이 대꾸했다.


“우리 집은 아빠랑 엄마랑 같이 안 살아. 맨날 싸웠어. 으휴.”

또 다른 친구 도현이 한숨을 푹 내쉬자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너는 누구랑 사는데?”

심각해진 얼굴로 하준이 도현에게 물었다.


“난 엄마랑. 근데 가끔 아빠도 만나.”

하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겨우 만난 아빠인데 또 헤어지는 건가 싶었다.


“아빠랑 엄마랑 같이 방 쓰면 이혼 안 해?”

어떻게든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준이 또다시 물었다.


“응. 이혼 안 해.”

“이혼하면 어떡해?”

“바보야. 넌 그것도 몰라?”

답답하다는 듯, 소은이 새초롬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살고 싶은데…….”

급기야 하준이 울먹거렸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봐.”

소은이가 작은 손을 동그랗게 모은 후 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정말? 그렇게 말하면 이혼 안 하는 거야?”

“응. 우리 아빠 엄마도 맨날맨날 따로 잤는데 지금은 같이 자.”

하준의 눈동자에 한 줄기의 희망이 드리웠다.

**

저녁까지 배불리 먹은 하준은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까지 보았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생일.

어느덧 잘 시각이 다가오자 하준의 눈동자가 주헌과 지안을 번갈아 보느라 바빠졌다.

지안이 잠시 씻으러 간 사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하준이 주헌을 불렀다.


“아빠아.”

작고 짧은 팔이 주헌의 다리에 감겨왔다.


“하준이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한 개 더 있는데에ㅡ.”

몸을 비비 꼬며 말하는 걸 보니 부끄러운 듯했다.


“뭔데.”

“말하면 아빠가 해 줄 거예요?”

“들어보고.”

“싫어. 하준이가 말해서 아빠 마음에 안 들면 안 해 줄 거잖아!”

오늘따라 고집을 부리는 아이였다.


“알았어. 말해 봐.”

“정말? 하준이랑 약속?”

성질 급한 건 누굴 꼭 빼닮아서 벌써부터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동생 갖고 싶다고 말하면 돼. 그러면 아빠랑 엄마랑 친하게 지낼 거야.’

 
소은이 해 준 말이었다.


‘근데 밤에 혼자 자야 해. 동생은 깜깜한 밤에 아기가 별 타고 내려오는데 아빠랑 엄마가 그 별을 잡아야 해서 바빠. 근데 너어- 혼자 잘 수 있어?’

 
하준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준이 동생 갖고 싶어요.”

“뭐?”

예상치 못했다는 듯, 주헌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아빠아. 하준이 혼자 씩씩하게 잘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빠랑 엄마랑 맨날맨날 같이 자요. 네?”

주헌의 눈매가 길어졌다.


“아들. 진짜 동생이 갖고 싶은 거야?”

“네에. 하준이 진짜 형아 되고 싶어요.”

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던 하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빠도 노력해 볼게.”

아들이 이렇게 원한다는데.

조금 붉어진 주헌의 눈이 힐끔 욕실을 향했다.


“아빠아. 하준이는 혼자 잘 테니까 아빠랑 엄마는 빨리 별 잡아요.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짧은 다리를 바지런히 움직이며 하준이 문까지 꼭 닫고 순식간에 나가 버렸다.

딸칵.

욕실 문이 열리고 촉촉하게 젖은 지안이 나이트 가운을 걸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주헌의 옆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자 지안이 물었다.


“하준이는요?”

“자.”

“하루종일 들떠 있더니 피곤한가 보네.”

“하준이가 생일 선물로 원하는 게 있다더군.”

“선물이요? 이미 한가득 받았는데 무슨…….”

“사나이끼리 약속한 거라 난 들어줘야 해.”

“그게 뭔데요?”

지안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헌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앗! 뭐 하는 거예요?”

“약속 실행 좀 해 볼까 하고.”

순식간에 지안의 몸이 침대로 쓰러졌다.

굽혀져 있는 작은 무릎을 주헌이 벌리며 들어왔다.


“동생 갖고 싶대.”

그가 물기를 머금고 있는 지안의 입술을 단번에 머금었다.


 
턱을 벌리며 아찔하게 휘몰아치는 주헌을 느끼기도 전에 온몸을 떨게 할 만큼 뜨거운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뻐근할 만큼 저릿해졌다.

당장에라도 지안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압도감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주헌의 손이 가운 속을 파고들며 헤집었다.

몸 곳곳에서 작은 불꽃이 팡팡 터지기 시작했다.


“하준이 동생 만들자.”

솔직한 주헌의 말에 지안의 입술 사이로 놀란 숨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내 지안은 스륵 눈을 감으며 주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좋아요.

명백한 허락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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