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공녀는 오늘도 무료하다 1권
○ 프롤로그
잠시 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단테 레나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산 어느 황제의 이야기를.
* * *
나는 버림받았다.
황태자였던 아버지는 한낱 불장난을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의 외면에, 악사였던 어머니는 끝내 날 외딴 도시에 버리고 홀로 떠났다.
결국 나를 키운 건 도시의 거지들과 창녀들, 그리고 부랑아들이었다.
어릴 땐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으며 연명했고, 조금 커서는 시장의 물건을 훔치며 살아갔다.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 아니, 살아남았다.
* * *
열두 살이 되던 해.
가끔 기웃거리던 검술 학교의 담벼락 밑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너, 매일 찾아오는구나. 그리 신기하면 너도 검 한 번 쥐어 보련?”
어느 날 한 노교수가 내게 제안했다.
얼마 전 수도의 유명 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왔다는 사람이었다.
“전 돈이 없는데요.”
“혹시 아니. 한번 해 보고 잘한다 싶으면, 내가 널 제자로 받아서 공짜로 가르쳐 줄지.”
노교수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남는 게 시간밖에 없는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마 반쯤은 농담이었을 거다.
그러나 그 여유는 곧 사라졌다.
담벼락 너머로 보고 배운 풍월도 도움이 됐는지, 난생처음 잡아 본 검임에도 나는 금세 능숙하게 휘둘렀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이것저것 시켜 보던 노교수는, 점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명망 있는 교수였다고 하니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알아본 거겠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나의 눈부신 재능을.
“얘야……, 정말로 나에게 검을 배워 보지 않으련?”
그때 나는 강렬하게 깨달았다.
아, 빌어먹고 사는 삶이 드디어 끝이 나는구나, 하고.
“이름이 뭐냐?”
“없는데요.”
“그래. 그러면 앞으로는 너를 ‘단테’라고 부르마. 앞으로 누구든 네게 스승이 누구냐 묻거든 내 이름을 대거라.”
그날을 계기로, 나는 노교수의 양녀가 되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가르쳤고, 나는 악착같이 배웠다. 이렇게 얘기하면 되게 감동적인 얘기인 것 같다만, 실상은 학대나 다름없긴 했다.
그에게 받는 교육은 혹독하고 힘들었다.
‘제기랄. 내가 먹고 살자고 이 꼴을 당해야 하나.’
정말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 끔찍한 훈련을 견디는 게, 거리의 추위나 배고픔을 견디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 * *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스승이 죽었다.
당연하게도, 유산은 그의 친자식들에게 모두 돌아가고 내게는 한 푼도 떨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말년에 수발은 내가 다 들어 줬구만.
그 후 내 목표는 ‘돈’이 됐다. 다시 빌어먹는 인생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인생, 돈이 최고 아니겠는가.
검투 대회에 참여해 상금을 받고, 마수 사냥을 하여 현상금을 얻고, 용병단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악룡 크루세흐를 봉인한 후로는, 어딜 가든 영웅 대접을 받을 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대륙 최고의 검, 단테 님! 사인해 주세요! 악수도 해 주세요! 결혼해 주세요!”
“우리 상단을 위해 일해 주게! 옆 상단 말고 우리 상단! 옆 상단이 얼마를 불렀든 우린 세 배를 주겠네!”
“내 아들과 결혼하여 내 영지를 물려받지 않겠나! 뭐라? 잘생기지 않으면 싫어?”
……너무 유명해져 있었다.
그냥 먹고 살자고 한 짓이었는데.
‘이 정도 인기면 나라 하나 세워도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스물세 살 되던 해.
제국 황제가 나를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말이다.
* * *
여자 하나 책임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랫도리만 자유로웠던 아버지는 일처삼첩 사이에서 자식을 열댓 명쯤 낳았으나, 양만 많았지 질이 좋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터였다.
내가 황제의 핏줄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알아내는 데 어렵지는 않았을 거다. 더구나 황가의 증표 이딴 걸 내가 멋모르고 간직하고 있었던 탓도 있다. 젠장, 내다 버릴 걸 그랬지.
아버지는 내가 제 자식이라는 걸 알아내자마자 옳다구나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버린 자식이 알아서 훌륭하게 자라났으니, 가성비 최고 아닌가.
“딸이여. 레나투스의 성을 허락하겠다. 황가로 들어오라.”
“보상은요?”
“뭐라?”
“절 원하는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닌데 이렇게 날로 먹으려 하시는 건 좀…….”
“화, 황가의 일원이 된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는 게냐?”
“그런 건 모르겠고요. 그래서, 보상을 하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큭……, 워,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내 너를 황태녀로 책봉이라도 할까?!”
“아, 황위는 별로 관심 없어요. 어디 보자……, 독립된 제 영지랑 저택. 금화 천만금. 말 열 필이랑,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허가를 내려 주세요.”
“그, 그렇게나?!”
“당장은 이 정도밖에 생각 안 나는데…….”
“뭐라? 거기서 뭐가 또 있어?!”
“폐하께서 제 아버지라고 하시니까 싸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도 수지 타산이 맞아야 황가에 이름을 빌려드리죠.”
그때, 부들부들 떨며 욕을 삼키는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게 진작 좀 잘하지.
아버지가 내치면 내치는 대로, 나는 딱히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인심을 잃어 가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꽤 아쉬웠을 거다.
대륙 최고의 검사이자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내가 알고 보니 레나투스가의 핏줄이었다는,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버릴 수야 없었겠지.
“조……, 좋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마!”
“좋습니다. 저도 황가에 제 명성을 빌려 드리겠어요.”
역사에 길이 남겨질 거래는 그렇게 성립됐다.
물론, 레나투스의 체면을 위해 역사서에는 미화되어 기록됐지만.
* * *
나는 황위에 관심이 없었다.
남은 생, 입을 걱정 먹을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멍청한 내 이복형제들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후계자 자리도 마다했건만, 그냥 내 존재가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뭐, 이해는 한다.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능력 좋고 인기 많은 황제의 첫째 자식. 충분히 불씨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거고.
그것들이 감히 날 제거하려 수작을 부리는데, 배알이 틀려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으음. 황제에 관심 없다고 한 주제에 조금 민망하지만.
홧김에 그냥 확 황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쥐뿔도 없던 부랑아 소녀는 수많은 역경을 헤치고 제국 황제가 되어 온갖 호사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완성됐다.
위인전으로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 만큼 기승전결 확실한 삶이었다.
서른셋에 요절하긴 했지만, 뭐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매 순간 치열했고, 최선을 다했다. 많은 경험을 했고, 원하던 것을 다 가졌다.
다시 살아간다 해도 이보다 더 열심히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잘 살았다.
여한 따위는 없었다.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웠다.
그랬는데.
* * *
500년 후.
나는 다시 태어났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페레스카 공작가의 막내딸. 은발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공녀, 헬레나 페레스카로.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이다.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