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자는 용의 비늘을 뽑지 마라
어른스럽다.
다시 태어난 이후 10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또래에 비해 차분하고, 똑똑하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가르친 적이 없는데도 글을 읽고, 말을 타고, 어려운 문제를 푼다.
이만하면 그야말로 가문의 자랑.
……이어야 할 테지만.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내 나이 10살.
나는 벌써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뭘 해도 재미가 없어요. 다 시시할 뿐이야. 하고 싶은 의욕도 없고. 그냥, 인생이 무료해요.”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부모님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린애가 벌써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정말 그런걸요.”
어쩔 수 없다.
난 전생에서 그 이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인생을 또 한 번 살아가라니, 탈력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잖아.
“뭔가……,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지 않겠니? 좀 더 찾아보면 말이야.”
“아버지 말씀이 맞아, 헬레나. 잘 생각해 보렴. 네가 관심 있는 일이 생기면, 우리가 적극 지원해 줄 테니까.”
“아니,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 주셔도…….”
전생에서는 부모의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내게, 두 사람의 관심과 애정은 영 낯간지럽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 두 사람, 분명 크게 좌절하겠지.
“포기하기엔 일러. 헬레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잖아.”
“하지만 오는 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는 법이잖아요.”
실제로 전생의 나는 고작 서른셋에 요절했었고 말이다.
내 말에 두 사람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으음, 방금 말은 10살 어린애의 대사로는 안 어울렸을지도.
“엇, 그렇지만……, 두 분 말씀도 일리가 있으니, 앞으로 의욕을 가져 보도록 노력할게요.”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걸로 두 사람의 걱정을 덜기엔 무리겠지만, 적어도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낼 수는 있겠지.
“어려운 일 있으면 꼭 엄마에게 말해 줘야 한다?”
“네, 어머니.”
절대 말 안 할 것이다.
“관심 가는 것을 찾게 되면 꼭 말해 주렴, 헬레나.”
“네, 아버지.”
그런 것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착한 딸과 같이 모든 말에 긍정했다. 빨리 이 두 사람을 보내고 침대 위를 뒹굴며 잠이나 자고 싶으니까.
하아, 대체 모르겠다.
왜 다시 태어난 거지, 나?
* * *
“그래서 지금 재미있는 일이 뭔지 찾고 있는 거야?”
이튿날, 오후.
나와 똑같이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세 살 위의 오빠 레너드가, 내 이야기를 듣고선 피식 웃었다.
“찾는 척하고 있는 거야.”
“찾는 것마저도 의욕이 없어?”
“뭐, 그렇지.”
“저런. 할 수 없네. 헬레나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와, 그건 진짜 의지가 된다.”
열세 살의 자신만만함이라니 어쩜 이리 귀여울 수가.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레너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 집안의 가장 큰 장점은, 재력도 권력도 아니라 레너드의 귀여움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그나저나 오라버니. 그건 웬 검이야?”
나는 소파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목검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조금 이따가 검술 수업 있거든.”
“검술 수업?”
음, 그러고 보니 한 달쯤 전부터 검술을 시작한다고 했었지.
나는 저녁 식탁에 올라왔던 화제를 다시 떠올렸다. 지인의 추천으로 채용한 선생이, 수도의 어느 유명한 학교 출신이라던가, 그랬는데.
“검술 수업은 재미있어?”
“아직은 잘 모르겠어. 어렵기는 해.”
“어렵다고?”
내 미간이 나도 모르게 슬쩍 찌푸려졌다.
한 달째면 아직 초보 단계일 테고, 한창 의욕이 넘쳐 뭘 해도 재미있을 시기 아닌가?
“어떤 점이 어려워?”
“으음, 아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가 잘 안 돼.”
왜지?
레너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굉장한 노력파라, 모르는 일은 알 때까지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해가 안 된다고?
“진도가 너무 빠른가? 지금 어디까지 배웠는데?”
“어디까지라고 하기가 좀…….”
“무슨 말이야?”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 해서, 계속 대련만 하는 중이거든.”
“뭐? 기초도 모르는 초보자랑 대뜸 대련부터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글쎄, 수도에서는 다들 이렇게 배운다던데.”
아무리 시절이 바뀌었다지만, 그런 막무가내 교육법이 생겼을 리가 없잖아.
“오라버니. 오늘 수업할 때 내가 참관해도 괜찮아?”
아무래도 어떤 놈인지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다.
내가 슬쩍 물었더니, 레너드는 반색을 하며 승낙했다.
“정말?! 물론 와도 되지! 혹시 검에 관심이 생긴 거야?!”
저런. 완전히 오해하고 있군.
유감이지만 내가 가장 흥미 없는 일 중 하나가 검을 다시 쥐는 일이다. 지긋지긋하다고, 검은.
“그냥 좀 궁금한 것뿐이야.”
“그것만으로도 대단한걸? 네가 뭔가 궁금해하는 것도 드문 일이잖아?”
음, 내가 그 정도였나.
그동안 내가 인생 재미없다는 티를 너무 내고 다니긴 했구나.
“그러면 같이 가는 거다?”
“그래!”
어쨌든 지금은 그 수상쩍은 검술 선생의 검증이 먼저다.
사기꾼이기만 해 봐라. 감히 귀여운 내 오라버니를 가지고 논 죄로 혼꾸멍을 내 줄 테니까.
* * *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 공작저 2층 홀에서 레너드의 검술 수업은 시작됐다.
검술 선생이라는 자는 꽁지머리에 펄럭거리는 의상을 입은 기괴한 모양새로 등장했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온 것인지, 파티에서 춤을 추기 위해 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오늘은 귀여운 아가씨도 함께 계시군요.”
“제 동생인 헬레나입니다, 선생님. 오늘 참관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헬레나 페레스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검술 선생이 그런 날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검에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말리고 싶군요. 검은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위험한 무기죠.”
내가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반박했다. 내 대답에 선생이 뜻밖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으쓱했다.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여성에게 검은 어울리지 않아요.”
“단테 레나투스 황제가 남성이었다는 비밀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분은 특이 케이스죠. 그리고 허풍도 좀 있을 거고.”
“허풍?”
“황제의 업적을 기리려고 작은 것도 부풀려서 칭송하는 거죠. 뭐, 아직 어린 아가씨에게 이런 얘기는 좀 어려울까요?”
오호라, 이것 봐라?
이게 지금 내 개고생을 허풍으로 만들어 버리네?
“500년 전 사람을 직접 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런 건 안 봐도 뻔한 겁니다. 검은 남자의 영역이에요. 너무 관심 갖지 마십시오, 아가씨.”
선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10살 어린애와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레너드가 나와 선생 사이에 한 걸음 끼어들어 왔다.
“헬레나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든, 그건 선생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에요.”
“오늘은 공자께서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동생분 앞이라 그렇습니까?”
“그건…….”
“제게 반박하고 싶으시면, 일단 한 번이라도 절 이겨 보시죠.”
선생의 비아냥에 레너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제 한 달 배운 초보자에게 할 소리인가?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너드에게 창피를 주다니. 이건 도무지 용서가 안 된다.
“자, 농땡이는 이쯤 하고 수업 시작할까요?”
선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레너드는 꺾인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선생과의 대련을 시작해야 했다.
대련은 뭐, 안 봐도 뻔했다.
초보인 레너드를, 선생이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것뿐.
‘저게 가르치겠다는 거야, 아니면 초보자 상대로 잘난 척을 하겠다는 거야?’
신중하게 지켜보지 않으면, 우수한 선생이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선생이란 작자는 교육자로서도 꽝이지만, 검사로서도 형편없었다.
어디서 검을 좀 배우긴 배운 모양인데, 자신이 멋대로 이상한 자세나 기술을 추가하여 폼만 그럴싸한 검이 되고 말았다.
오만한 성격과, 오만을 부릴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실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전쟁터에 나가면 저 혼자 날뛰다가 뒤질 상이다.
‘확정이다. 저 인간은 안 돼.’
잠깐의 쉬는 시간.
나는 손짓으로 레너드를 불렀다.
“오라버니. 나 믿지?”
“응? 어, 그야 당연히 믿지.”
“좋아. 그럼 잘 들어. 다음 대련 때에는 저 새……, 아니, 저 선생의 발을 잘 봐.”
“발?”
“응. 왼쪽 발이 이렇게 바깥쪽으로 빠질 때가 있을 거야. 그때 무조건 여길 노리고 들어가.”
나는 레너드의 오른쪽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설명했다. 레너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반박 없이 고갤 끄덕거렸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그 근본 없는 대련이 시작됐다. 결연한 레너드의 표정에, 선생이 비아냥댔다.
“하하, 표정을 보니 동생분께 응원의 말이라도 들었나 보군요? 효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효과, 어마어마하게 있을 거다, 이 사기꾼아.
초반, 여지없이 레너드는 고전했다. 선생은 아예 나와 레너드의 기를 꺾어 놓겠다는 듯, 더 기고만장하여 날뛰었다.
‘기고만장할수록 빈틈은 더 자주 발생하는 법이지.’
그리고 드디어, 기회는 왔다.
“지금이야!”
선생의 왼발이 바닥을 디디기 위해 바깥쪽으로 크게 빠졌다.
내가 외치기도 전에, 레너드는 이미 선생을 향해 과감히 파고 들어갔다.
“무, 뭐?!”
선생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자세를 틀어 막아 보려 하지만,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가는 레너드를 막기엔 너무 늦었다.
결국 레너드의 검이 선생의 옆구리를 힘껏 내리쳤다.
“으아악!”
선생이 추잡한 비명과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나이스. 나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꼴좋다.
레너드가 가르쳐 준 대로 훌륭하게 해내는 걸 보고 있으니, 온몸이 짜릿짜릿해진다. 쾌감 장난 아니네, 이거.
“엇, 드, 들어갔어?”
공격에 성공한 레너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검을 쥐고 멈춰 섰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레너드의 곁에 다가갔다.
“축하해. 오라버니가 이겼어.”
“헉……, 진짜네.”
“우, 웃기지 마세요! 반칙입니다! 무슨 수를 쓰신 거죠?”
선생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꽥꽥 소리를 내질렀다.
“이건 무효입니다! 이런 비겁한 수단은 인정할 수 없어요!”
“전 검을 모르고, 오라버니는 아직 초심자인데, 무슨 수를 써 봤자 얼마나 썼겠어요?”
“아가씨는 빠지십시오! 남자들 문제에 끼어들지 마시고!”
하아. 정말 구제 불능이네, 이 인간.
“오라버니, 검 좀 빌려줘.”
나는 레너드에게서 검을 받은 후, 그 검을 선생에게 겨누었다.
“덤벼요.”
“……네?”
“당신이 왜 오라버니에게 졌는지 알려 줄 테니까, 덤비라고.”
“하! 다쳐도 모릅니다.”
선생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10살 계집애쯤이야 쉽다고 생각했겠지. 아마 나를 호되게 짓누른 후에 자신의 실력을 뻐기고 싶을 것이다.
물론 힘으로는 내가 밀린다. 그러나 굳이 정면으로 공격을 받을 필요는 없다.
난 흥분한 선생의 공격을 적당히 흘려 넘기며 기회를 노렸다.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하아압!”
“크헉!”
선생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 나쁜 습관은 의식해도 쉬이 안 고쳐지는 법이니까.
나는 레너드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게 선생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주저앉은 선생의 가슴팍을 발로 콱 걷어차는 완벽한 마무리까지.
“으아악!”
선생이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나는 그런 선생에게 다가가 코끝에 검을 척 하고 겨눈 채,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너무 쉬워서 하품이 다 나오네요.”
“이, 이게 대체 무슨……!”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검은 어울리지 않네요. 이런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조신하게 자수나 배워 보심이?”
나의 조롱에 선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공녀라 해도 선생을 공경하지 않다니, 안 될 말입니다! 이건 공작님께 필히 고할 문제로군요!”
“선생?”
피식. 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 표정에, 선생이 ‘히익’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이제 선생 아니야.”
“뭐……, 뭐라고요?”
“누가 당신 같은 인간을 쓰겠어? 실력은 고만고만한 주제에 콧대만 높아서는, 교육자의 자질도 없고, 심지어 인성까지 망했잖아?”
나는 검 손잡이를 엄지와 검지만으로 잡았다. 무거운 검날이 뚝 떨어지듯 아래를 향했다.
자신의 코앞에 검날이 겨누어지니, 선생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 상태로 선생의 바로 옆에 검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당신, 해고야.”
덜그럭. 목검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소리를 냈다.
동시에, 선생 –이었던 남자– 역시, 심장이 뚝 떨어진 것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내 사람 건드리는 놈은 망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냈다.
“오라버니, 걱정 마. 앞으로 오라버니의 검은 내가 책임질게.”
나는 그때까지도 벙찐 얼굴로 서 있는 레너드를 향해 선언했다.
그렇다.
이번 생에서 나는, 검을 가르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