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버지인 유시스 페레스카 공작은, 오빠를 가르치겠다는 10살 막내딸의 황당한 선언에도 귀족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으음 하고 신중한 신음을 내뱉었을 뿐이다.
물론 금방 허락이 떨어지진 않았다. 아무리 그동안 나의 비범함을 익히 겪어 왔다고 해도, 검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10살 여자애를 믿을 수는 없겠지.
내가 레너드를 가르치겠다 선언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자신의 서재에 나를 불러들였다.
“헬레나.”
“네, 아버지.”
“실은 사람을 보내 네가 해고한 그 검술 선생에 대해 알아보았다.”
나는 가볍게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아버지의 말을 재촉했다.
아버지는 믿기 어렵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가 졸업한 학교에 사람을 보냈는데, 성적 미달로 몇 번이나 유급을 했었다더군.”
“저런.”
그다지 놀라운 정보는 아니었지만, 민망해할 아버지를 위해 짧게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 이를 소개해 준 지인도 몇 번이나 사과했다. 졸업한 학교의 명성과 화려한 교습 이력을 믿었는데, 우리도 그 허울뿐인 이력에 한 줄 보탤 뻔했어.”
“그렇군요. 일찍 해고해서 천만다행이었네요.”
페레스카는 무인 가문이 아니다. 검에 대한 것은 지인의 소개를 전적으로 신뢰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굳이 관여하지 않았어도 수업 일수가 길어졌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꼬리가 밟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얘길 굳이 절 불러서 들려주시는 건, 제게 오라버니를 가르칠 기회를 주시겠다는 의미인가요?”
10살 딸아이의 당돌한 질문에 아버지의 눈썹이 으쓱 올라갔다.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아니다.”
“저런.”
방금 추임새에는 조금쯤 감정이 섞였을 수도 있다.
“물론 우리 가족은 네가 허튼소리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그러나 상식적으로……, 통상적으로 말이야.”
“이해해요. 10살 여자애가, 검을 배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남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건 아무래도 신뢰가 안 가겠죠.”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버지가 내 말에 격하게 긍정했다.
“하지만 좀처럼 어떤 것에도 의욕을 갖지 못하던 네가, 모처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한 일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세요?”
“다음 주에 우리 영지로 손님이 한 분 오실 거야.”
“손님이요?”
내가 고갤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래. 카이사르 황자가 올해 여름 한 계절 동안 우리 영지에 머물다 가실 것이다.”
“네?!”
황자 방문이라니, 너무 뜬금없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떤 연유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에 황후가 병사했지.’
“황자께서 얼마 전 어머니를 잃어 상심이 크신 모양이야. 여름 동안 공작령에서 지내며 마음을 달랬으면 하는 폐하의 배려겠지.”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갤 끄덕여 동의했다.
아버지의 의견도 틀린 건 아니니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여름 휴가의 진의는 따로 있을 것이다.
‘황후가 죽은 지금, 황성에는 아직 어린 황자를 지켜 줄 세력이 없을 거야. 즉, 이쪽으로 피신을 시키겠다는 거로군.’
한 계절이면, 황성 내의 세력전이 정리되기에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
“그런데 황자가 우리 영지에 오는 것과, 제가 오라버니를 가르치겠다는 게 무슨 관련이 있죠?”
“카이사르 황자는 황성에서 제왕학을 배운 사람이야. 물론 검술 교육도 받아 왔지. 10살 때 처음 검을 잡기 시작해 실력이 상당하다고 하더군.”
나는 거기까지 듣고, 아버지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일지 슬그머니 추론을 해 보았다.
“그 황자와 오라버니가 붙어서 오라버니가 이길 수 있도록 가르쳐 보란 말씀이신가요?”
“그래.”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저쪽은 최고의 교육자에게 교육받았을 테고, 배운 연차도 다른데요.”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나를 지나치게 믿는 건지, 아니면 빨리 실패하고 미련 없이 손 떼라고 하고 싶은 건지 의중을 모르겠다.
“물론 이길 거라는 기대는 안 한다. 다만 실력을 입증해 보이라는 거야.”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자가 공작저에 머무는 한 계절 동안 어디 한 번 네 오라비를 가르쳐 보아라. 네게 레너드를 맡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건, 그 후의 문제다.”
도발과도 같은 그 말에, 나는 뱃속에서 오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여름의 초입, 아버지의 예고대로 카이사르가 공작저를 방문했다.
공작저의 모든 식솔들은 1층 홀에 정렬하여 카이사르를 맞았다. 나와 레너드는 열의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입구에서부터 인사를 받으며 다가오는 카이사르를 느긋하게 관찰했다.
“황자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보여, 헬레나?”
“여기서는 잘 안 보여. 왜?”
“그레이가 사람들은 다 붉은 눈이래. 특이하지 않아?”
붉은 눈? 그랬던가?
나는 500년 전, 나의 친우이자 공작이었던 에레즈 그레이에게 황위를 넘겨주겠노라 선언하던 때를 회상했다.
확실히,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 경외 어린 눈동자는 자색에 가까운 적색이었다.
음, 그렇군. 그땐 그냥 ‘예쁜 색이다’ 하는 감상뿐이었는데, 그게 그 가문 특유의 유전자였던 모양이지.
“그나저나 인상 되게 더럽네.”
나는 전혀 웃지 않는 카이사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긴장한 거 아닐까.”
“아니, 그냥 성격 문제일 것 같은데.”
남의 집에서 한 계절이나 신세를 지게 됐으면 방긋방긋 웃으며 싹싹하게 굴어도 시원찮을 판에, 저놈은 뭐가 불만이라 저렇게 벌레 씹은 표정이란 말인가.
차례는 점점 다가와, 드디어 우리 두 사람은 카이사르와 마주 서게 됐다.
“레너드 페레스카입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너드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뒤이어 나도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인사했다.
“헬레나 페레스카라고 합니다, 황자 전하. 전심(全心)으로 환영합니다.”
거짓말이지만.
‘음, 그나저나.’
나는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카이사르를 살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어두운 붉은색의 눈동자. 어린 나이임에도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건 그 강렬한 색채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너드보다 고작 한 살 많다고 알고 있는데, 무표정이라 그런지 훨씬 어른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에레즈와 닮았다.
‘하긴, 후손이니까 닮는 게 당연하겠지.’
물론 내 오랜 지기와 좀 닮았다고, 오늘 처음 본 이 녀석의 점수가 올라가진 않는다.
“입에 발린 인사라면 됐어.”
카이사르는 빠르게 내 시선을 피해 옆으로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성격이 참 건방지구나. 물론 입에 발린 인사였던 건 맞긴 하지만.
“어떤 인사를 바라셨나요?”
평소라면 못 들은 척 넘어갔겠지만, 나는 말을 보태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내 친우와 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말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날 쳐다보았다.
“뭐라고?”
“입에 발린 인사가 싫다면, 어떤 인사를 바라셨느냐 물었습니다.”
내가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이런 인사면 만족하시겠어요?”
나는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행동에 주변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지금 나를 농락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하지만 이도 싫다 저도 싫다 하시면 어떤 인사를 드려야 하나요?”
“뭐야? 감히……!”
“아이고, 전하. 공녀께서 벌써 이리 격 없이 친하게 다가오시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카이사르의 보좌인 해밀턴 녹트 자작이 재빨리 끼어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떻게든 불미스러운 일을 막으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였다.
해밀턴의 말에 카이사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카이사르는, 곧 ‘훗’하고 코웃음을 치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뭐, 좋아. 몇 달이지만 사이좋게 지내 보자, 공녀.”
응? 뭐야? 왜 갑자기 순순해졌지? 무슨 꿍꿍이길래…….
‘……아야.’
오호라. 힘으로 눌러 보시겠다?
카이사르가 내 손을 꽉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검 좀 쓸 줄 안다더니, 확실히 힘이 셌다.
그러나 악수를 할 때 아플 정도로 쥐는 건 힘만으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쥐는 위치와 관절의 배열.
바로 이렇게 말이다.
“……아악!”
우드득.
내가 정석대로 카이사르의 손을 힘주어 잡자, 카이사르가 대번에 비명을 내지르며 잡은 손을 놓았다.
캬하, 쌤통이다. 어떠냐, 애송아. 골탕은 이렇게 먹이는 거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해밀턴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네? 하지만……!”
“호들갑 떨 거 없어. 별일 아니니까.”
카이사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용케 고자질을 하진 않았다. 뭐, 자기보다 네 살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역공당한 게 창피했던 것일 수도 있고.
“여름 동안 함께할 시간이 몹시 기대됩니다, 전하.”
내가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속뜻은 ‘또 개기면 널 죽이겠다.’였다. 카이사르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는 거 보니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그래, 나 역시 굉장히 기대되는군. 즐거울 거야, 분명히.”
카이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웃었다.
흐음, 방금 말의 속뜻은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하겠다.’라는 의미로군. 말이 통하는 녀석이라 다행이다.
아버지의 제안이 아니었어도, 이 녀석은 어떻게든 눌러 버려야지. 내게 패배하여 한껏 억울해하는 이 녀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해 의욕이 마구 솟구친다.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어.’
실로 기대되는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