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나와 카이사르의 첫 만남이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길었던 황자 맞이가 끝난 후, 나는 어머니에게 끌려가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전하께서 아무리 너희와 또래라 해도 그리 막역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
“네, 명심할게요.”
좋아.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끌고 가서 패자.
“다정하게 대해 드리렴. 어머니를 잃어 분명 힘드실 거야.”
어머니는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리셨다.
나는 한 시간쯤 지나서야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간신히 해방됐다.
방을 나서니, 뜻밖에 카이사르가 복도에 서 있었다.
“전하의 방은 저쪽인데요.”
나는 어머니의 충고대로 다정함을 발휘하여 카이사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만, 애쓴 나의 친절에도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 네. 전 또 길을 잃으신 줄 알고.”
“아까의 일 때문에 부인께 혼난 건가?”
“그렇기는 한데…….”
그건 왜 묻지?
“혹시 제 걱정 하셨나요?”
“아니야.”
“실은 대들었다고 회초리를 맞았지 뭐예요.”
“저, 정말로?!”
카이사르의 눈이 커다래졌다.
“농담이에요. 그냥 주의만 받았을 뿐이에요.”
“뭐야, 놀랐잖아!”
“전하께 함부로 굴었다고 혼난 건 사실이지만요.”
“물론 네 태도가 좀 건방지긴 했지만, 난 그런 거 개의치 않아. 신경 쓸 거 없어.”
“그럼요. 저도 개의치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넌 좀 신경 써! 윗사람에게 그렇게 굴다가는 진짜 큰일 치를 거다, 너!”
“전하께서 제 윗사람인가요?”
“당연하지! 난 황가의 핏줄이야!”
“그래요? 하지만 공작가가 없으면 곤란한 건 전하이시잖아요?”
내 반박에 카이사르가 ‘윽’ 하고 신음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현재 그는 자신을 보호해 줄 공작의 품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공작가보다 ‘위’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음, 그렇지만 방금 말은 좀 심했나?’
고갤 떨구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카이사르를 보며 조금 반성했다. 아직 어린애인데 너무 몰아붙이는 건 좀 그렇지, 역시.
“난……, 난 오해를 풀려고 널 기다렸어.”
한참 만에 카이사르가 고갤 숙인 채로 말을 꺼냈다.
“너희에게 내가 반가울 리가 없겠지. 나를 받아들인다는 건, 곧 발레르와 적이 되겠다는 의미니까.”
발레르? 1황비의 가문인 발레르 공작가?
“나도 알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구귀족인 페레스카에게 난 부담되는 존재일 테지. 그러니 굳이 가식적인 태도로 환대해 줄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
앗, 이런. 잠깐.
분위기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왜 갑자기 순한 양이 되는 거냐. 왜 갑자기 불쌍하게 구냐고.
이러면 몰아세운 내가 아주 몹쓸 인간이 되어 버리는데?
“하려던 말은 이게 다야. 그럼 이만.”
그 말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서둘러 복도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붙잡아서 뭐라고 할 건데? 환영한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건 사실이잖아?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내내 표정이 안 좋다 했더니……, 부담감 때문이었던 건가.”
애먼 녀석을 괴롭혀 버린 기분이다. 어쩐지 양심이 따끔따끔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골탕 먹이지 말걸.
후회가 됐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뭐.
나는 그저, 카이사르가 사라진 복도 저편만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다.
* * *
내가 레너드에게 검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여러 날이 흘렀다.
이제는 레너드도 제법 체력이 붙었다. 그리고 레너드를 가르치며 상대해야 하는 나 역시.
“그러고 보니 헬레나, 전하와는 화해했어?”
후원에서의 검 수업 시간,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레너드의 질문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화해? 무슨 화해?”
“전하와 홀에서 인사 나눌 때, 분위기가 험악했잖아.”
“그냥 어린애들의 치기 어린 신경전이었어. 화해할 만한 일도 아니라고.”
나는 조금 뾰로통한 기분이 되어 그렇게 투덜거렸다.
“왜 오라버니까지 그 녀석을 신경 쓰는 거야? 아버지에게 뭔가 한 소리 들었어?”
“으음, 사이좋게 지내라는 당부? 그리고 나도, 기왕이면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째서?”
“황성에서는 친구를 사귀기 어려우실 거 아냐? 외로우실 거야, 분명히.”
세상에. 뭐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 다 있담.
응, 그래. 오라버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그 순수함에 때 묻지 않게 내가 지켜 줄게.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녀석이랑 화해할게.”
“정말이지?”
“그리고 휘두르기 아직 298회 남았으니까 멈추지 마, 오라버니.”
“윽.”
레너드가 울상이 되어 다시 검 휘두르기를 시작했다.
거지 같던 검술 스승과 싸워 이긴 후, 그는 내 가르침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다. 실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다.
나도 슬슬 카이사르에게 가 보긴 해야지. 화해……, 는 물론 핑계고, 녀석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이지만.
* * *
며칠 지켜본 결과, 카이사르는 주로 해가 저무는 오후 시간에 해밀턴과 함께 2층 홀에서 검 훈련을 했다.
나는 염탐을 위해 카이사르의 훈련 시간에 맞춰 홀을 방문했다. 내가 홀에 들어섰을 땐, 해밀턴과 막 대련을 시작하려는 분위기였다.
“공녀, 어쩐 일이십니까?”
날 먼저 발견한 해밀턴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10살 어린애의 해맑고 무해한 표정으로 접근했다.
“참관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공녀께서도 레너드 공자와 함께 검을 배우고 계시죠?”
배우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거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은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전하의 실력이 출중하시다 들어서, 한 번쯤 보고 싶었습니다. 안 될까요?”
“안 되긴요. 괜찮죠, 전하?”
“흥. 맘대로 하든가.”
카이사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허락하는 거, 기분 좋게 해 주면 안 되는 거냐.
내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곧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됐다.
그 대련을 지켜본 내 감상으로 말하자면.
‘……오호, 꽤 하는데?’
솔직히 좀 놀랐다.
‘나이에 안 맞게 집중력도 높고, 반응 속도도 빠른 편이네.’
레너드가 지독한 노력형 인재라면, 이쪽은 그냥 타고났다. 따지자면 나와 닮았다.
‘지금 레너드의 실력으로는 비벼 볼 수도 없겠어.’
큰일이네.
이 자식, 아무리 봐도 이렇다 할 단점이 없는데?
대련은 둘 다 땀이 약간 배어 나올 즈음에 끝났다. 나는 두 사람에게 땀 닦을 수건을 건네주는 핑계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다시 봤습니다, 전하.”
“전엔 어떻게 봤다는 소리야?”
“많이 지치지 않으셨다면, 저랑도 한 번 대련해 주지 않으실래요?”
“뭐?”
이마의 땀을 닦던 카이사르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날 쳐다보았다.
“듣기로 검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다 하던데? 다치면 어쩌려고?”
“원래 다치면서 배우는 거죠.”
“네가 다치면 공작께 면목이 없잖아.”
“그렇습니다, 공녀. 실력 차가 너무 나는 이와 붙어 봐야 공부가 되지도 않습니다.”
해밀턴도 카이사르의 말을 거들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어떻게 해서든 카이사르의 약점을 알아내야 하는 내게는 그저 방해가 되는 말이었다.
“저와의 대련이 영 흥미가 당기지 않으시는 모양이네요?”
“흥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뭔가 보상을 정할까요?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들어주기 같은 거요.”
영 시들하던 카이사르가 내 새로운 제안에 금세 눈이 번쩍 뜨였다.
“어떤 소원이든 전부 다?”
“너무 파렴치한 것만 아니라면.”
“나중에 무르기 없다?”
그리하여 나와 카이사르의 대련이 시작됐다. 우리는 목검을 쥐고 서로를 향해 섰다.
“두 분 다 모쪼록 다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아시겠죠?”
자연스럽게 심판이 된 해밀턴이 안절부절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카이사르는 고갤 끄덕였지만, 둘 다 건성이었다.
‘약점을 찾기 위한 대련이니까, 최대한 다양하게 찔러 봐야지.’
해밀턴의 시작 외침과 함께, 나와 카이사르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도약했다.
‘일단 골반 쪽으로 들어가 볼까?’
나는 방어하기 까다로운 곳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빠르게 내 공격을 흘리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내 왼쪽 상체를 노리고 반격까지 해 온다.
나는 재빠르게 카이사르의 검을 쳐 내고 그의 뒤편으로 빠져 거리를 벌렸다.
“……허!”
“하하?”
순식간에 선 위치가 바뀌었다. 카이사르와 내가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부딪쳤지만, 충분히 알겠다. 이 자식, 기가 찰 정도로 실력이 좋다.
‘요즘 검을 다시 쥐면서 체력은 꽤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린애 몸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재빨리 공격을 흘려보내어 다행이었다.
뭐, 아무리 그래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내가 우세하지만.
카이사르가 검을 고쳐 잡았다. 날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너, 초심자가 아니로군?”
“아무렴 질 생각으로 내기까지 걸고 대련을 청하진 않았겠죠.”
한 번의 격검으로 대강 서로를 파악한 우리는, 총력을 다해 서로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잘해?’
일부러 사각이나 어려운 공격을 시도하는데도 카이사르는 공격을 잘 막아냈다.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다. 본능적인 반응이다. 천성이라는 건가.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볼까?’
어쩐지 욕심이 생겨, 나는 어린애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고도의 기술로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만은 어찌 못하겠는지, 카이사르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고 생각했는데.
“……헛?!”
카이사르는 피하기는커녕, 왼팔로 공격을 막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위, 위험해!”
나는 검을 멈추려 했지만, 결국 카이사르의 왼쪽 팔꿈치에 내 검이 꽂혔다.
꽤 아팠을 텐데도, 카이사르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는다. 이제 당황해야 할 사람은 내가 됐다. 카이사르의 검이 내 상체를 노리고 파고들어 왔다.
‘뭐 이런 미친놈이……!’
“그만, 거기까지!”
해밀턴의 외침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검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우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곧 해밀턴이 달려와 카이사르에게 소리쳤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칫……, 다 이겼는데 왜 멈춘 거야?”
카이사르가 인상을 찌푸린 채 검을 허공에 흩뿌렸다.
“무승부네요.”
“해밀턴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겼어.”
“이게 진검이었으면 전하의 왼팔, 잘려 나갔을 거예요.”
“팔이 뭐? 머리가 잘리는 쪽이 패자인 게 당연하잖아?”
“으아아, 두 분 다 끔찍한 소리 좀 그만하세요! 다치지 말라고 그리 말씀드렸건만!”
해밀턴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음, 조금 미안하긴 하군. 그렇지만 설마 팔로 막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어쨌든 오랜만에 재미있는 대련이었어.”
“저도요.”
치열했던 대련과 달리, 우리는 담백한 인사로 마무리했다. 카이사르는 동동거리는 해밀턴을 데리고 홀을 떠났다.
홀로 남은 나는, 아직 찌릿찌릿한 감각이 남아 있는 오른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 자식, 아주 물건이네. 탐나게 말이야.’
레너드가 가르치는 대로 착착 잘 따라와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면, 카이사르는 예측 불허인 게 매력이다.
날 처음 발견한 스승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거, 키우면 뭐라도 하겠다 싶은 확신.
“한번 키워 보고 싶네?”
나는 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