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날 저녁, 카이사르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저녁 식사에 나오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뜨끔했다.
‘이거 혹시, 팔 부러진 거 아냐?’
검이 팔에 부딪쳤을 때 느낌이 꽤 싸―, 했단 말이지.
비명은커녕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아서 멍이나 좀 들었겠거니 했는데, 되게 찝찝하네.
“헬레나. 아까 전하와 만났었지? 화해한 거 맞아?”
곁에 앉은 레너드가 내게 물었다.
“화해했어. ……아마도.”
그러나 역시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식사 후에 카이사르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했더니, 방 안에서는 의외로 쾌활하게 ‘들어와’ 하는 말이 들려왔다.
뭐야 괜히 걱정했나. 나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카이사르를 발견하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부러졌어요?”
내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카이사르가 붕대를 감은 왼팔을 쓱 들어 올려 확인한 후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냐. 금만 갔어.”
“헉…….”
누가 봐도 별일이잖아, 그거.
“표정이 볼 만하군.”
카이사르가 날 향해 피식 웃었다.
난 카이사르의 곁에 다가가 앉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제대로 치료했어요?”
“아까 해밀턴이 의사를 데려왔었어. 이런 거 금방 나아.”
“그렇게 우습게 볼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저도 손가락 꺾인 적이 있어 봐서 아는데, 나중에 비만 오면 얼마나 쑤시고 아프던지.”
“손가락이 꺾였다고? 어쩌다가?”
“상대방 공격을 정면으로 막다가……, 는 아니고, 자, 장난치다가 실수로요.”
아차, 전생에 있었던 일을 말할 뻔했네.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에 카이사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나는 카이사르가 깊이 파고들기 전에 재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다쳤는데 고자질 안 하셨네요?”
“유치하게 그런 짓을 왜 해? 정당하게 대련하다가 다친 건데.”
“오올―”
뭐야, 좀 멋진데? 나는 놀리듯 이죽대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 내 반응에 카이사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집어치워, 그런 표정.”
“전 전하께서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상대가 싫다고 해도 그런 치졸한 짓은 안 해.”
“싫어하지 않는다고는 말 안 하시는군요.”
“피차일반이잖아.”
“응? 아닌데? 저는 전하 좋아하는데요?”
내 말에 카이사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화가 난 건지,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뭐라 정의하기 힘들다.
어쨌든 귀 끝까지 달아오른 건 꽤 귀엽군.
“그, 그런 것보다 너, 아까 대련은 뭐야?”
“대련이요? 왜요?”
“마지막에 일부러 힘 뺐지?”
아, 그것 말인가.
확실히, 카이사르가 왼팔을 드는 걸 보자마자 힘을 뺐다. 검의 진로를 바꾸긴 틀린 것 같고, 팔을 부러뜨리는 불상사는 피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어요?”
“속도를 생각하면, 팔이 부러지고도 남았어야 했을 테니까.”
“그걸 아는데 팔로 막았다고요? 미쳤어요?”
“내가 지면 네가 나에게 어떤 이상한 소원을 빌 줄 알고?”
“사람 참 못 믿으시네.”
“뭘 빌 생각이었는데?”
“제 부하가 되라고요.”
“그것 봐!”
카이사르가 진심으로 버럭 화를 내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는 전하는요? 만약 전하가 이기면 어떤 소원을 빌 생각이셨어요?”
“……됐어. 어차피 무산된 내기인데 알아서 뭐 해.”
카이사르가 내게서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야, 말 안 하니까 더 궁금한데?
“뭐예요, 치사하게. 전 알려드렸잖아요.”
“알 필요 없잖아.”
“궁금하단 말이에요. 아, 혹시 뭔가 이상한 짓이라도 시키려 하셨던 건…….”
내가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말했더니, 카이사르가 그야말로 폭발할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꽥 소리쳤다.
“웃기지 마! 날 뭐로 보는 거야!”
큰일이군. 이 녀석,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데? 레너드와 지낼 땐 가져 보지 못한 몹쓸 가학심이 솟구친다.
“그냥……, 서로 이름으로 부르자고 말하려 했어.”
“이름이요? 전하를 이름으로 부르라는 건가요? 그게 뭐 어렵다고 소원씩이나?”
“다들 편하게 부르라고 하면 곤란해하니까. 해밀턴은 대뜸 용서해 달라면서 내 앞에 납작 엎드리기까지 했었다고.”
아, 상상이 간다. 그 인간, 융통성 없게 생겼더라니.
‘하긴, 어떤 기분인지 잘 알겠어.’
나 역시 에레즈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모두 날 떠받들고 경외했지만, 다들 내 뒤에서 나를 따를 뿐 내 곁에 서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레즈에게,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말을 놓으라 했었다.
그 고지식한 녀석은 정색하며 그런 얘기는 농담으로도 하지 말라고 했고, 그 후로 다시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만.
“이름으로 불러드릴게요.”
“뭐? 정말? 괜찮겠어?”
“친구처럼 말도 막 놓고.”
“아니, 그렇게까지는…….”
“그러니까 앞으로도 가끔 나랑 대련해 줄래? 카이사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처럼.
‘만약 그때 에레즈가 날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면, 나도 이런 반응이었을까?’
문득 카이사르가 측은해졌다.
그 측은함은 곧 과거의 날 향한 측은함이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그럴싸한 소원을 생각해 둘 걸 그랬어.”
쑥스러운지, 카이사르가 딴소리를 하며 투덜댔다. 그러나 기분 좋은 티는 차마 감추지 못했다.
고작 이름을 듣고 이토록 기뻐하는 열네 살 소년이라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결국 나는 쑥스러워하는 그가 너무 귀여워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 *
카이사르는 팔이 다 나을 때까지 검 훈련을 쉬기로 했다.
그동안 나와 레너드, 카이사르는 거의 매일 모여서 카드놀이를 했다. 카이사르를 배려한 레너드의 제안이었지만, 그나마도 닷새쯤 지나고 나니 물렸다.
더구나 장마까지 시작되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몸은 축축 늘어졌고, 저택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장마가 시작되고 엿새째 되는 날이었을 거다.
해밀턴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러고 보니 공작저에서는 이런 날에 가끔 나타난다고 하죠.”
낮은 천둥소리가 울리는 오후.
어김없이 방에 모여 앉아 있던 우리 세 사람은, 해밀턴의 뜬금없는 말에 미어캣처럼 동시에 고갤 들었다.
“나타나다니, 뭐가요?”
나랑 카이사르는 해밀턴의 말을 무시할 작정이었다만, 세상 착한 레너드가 순진하게 해밀턴의 말을 받아 주었다.
“유령 말이에요.”
아하, 그럴 줄 알았어.
어린애들 놀려 먹을 심산이로군.
나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레너드와 카이사르는 해밀턴의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이면,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지하실에 나타난다더군요.”
“거, 거짓말.”
카이사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에요.”
“레너드, 본 적 있어?”
“아뇨, 전하. 부모님께서 지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셔서요.”
레너드가 고갤 세차게 저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해밀턴이 냉큼 받았다.
“그것 보세요. 귀신이 나오니 못 가게 막으시는 거예요.”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한심하군.
지하실에 못 가게 하는 건 그냥 위험해서다. 습하고 추운 데다, 돌계단이 미끄럽고 어두우니까.
“공녀께서는 그리 무섭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공포에 떠는 두 소년의 반응에 한껏 신이 난 해밀턴이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세상에 유령 같은 건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해밀턴이 머쓱해하며 한발 물러났다. 어린애들 놀리려는 속셈일 뿐, 정작 그도 유령 같은 건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목격자가 많다는 건 사실이에요.”
“한두 명이 착각으로 ‘유령을 봤다’고 하면,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봐도 귀신처럼 보이는 법이니까요.”
“아냐. 유령은 있어.”
내 말에 반박하듯 카이사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얜 뭐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 진지한 걸까.
“황성에도 있어. 해가 사라지는 날엔 단테 레나투스 황제가 젊은 시절 봉인했다는 악룡 크루세흐가 북쪽 복도를 날아다닌대.”
아, 그래. 내가 봉인한 그 용 말이지. 걔가 왜 거길 날아다닐까? 내 시체랑 같이 썩어 사라졌을 텐데.
그 순간, 시종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레나드와 카이사르가 동시에 ‘히이익’ 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실례합니다, 자작님. 마차 수리 문제로 잠시 상의드릴 일이…….”
“아, 참. 그랬죠. 저는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해밀턴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유일한 어른이 방을 나서니, 두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됐다. 어휴, 겁쟁이들.
“정말 유령이 나타날까?”
이런, 아직 그 주제로 대화를 계속 이어 갈 작정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이사르에게 대답했다.
“자작께서 우릴 놀리려고 하시는 말이야.”
“해밀턴은 그런 장난을 칠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 아니야.”
“엄청 가벼워 보이던데.”
내가 투덜거렸더니,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동시에 눈에 힘을 주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레너드는 유령을 본 적 있어?”
“아니요. 전하는요?”
“나도 아직. 무섭긴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
“글쎄요……. 뭔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몰래 훔쳐보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잠깐만, 두 사람. 지금 뭔가 굉장히 귀찮은 일을 꾸미고 있는 느낌인데.”
어째 대화의 방향이 이상한 곳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하여,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설마 유령을 보러 가자거나 하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응?
“우리 말이야, 그 유령을 확인해 보러 가자.”
젠장. 말했군.
카이사르의 제안에 나는 혀를 찼다.
“하려면 둘이서 해. 난 안 할 거니까.”
“넌 궁금하지 않은 거야?”
“응, 안 궁금해.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너희 집에 유령이 나온다는데 신경 쓰이지 않아?”
“유령 안 믿는다니까? 내 얘길 어디로 들은 거야?”
“좋아. 이따가 자정에 내 방으로 모여. 다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
“아 글쎄, 난 안 간다니까?”
내가 버럭 언성을 높여 말했다.
왜 어린애들은 이런 같잖은 호기심을 해결하려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어린애들의 이 왕성한 호기심과 에너지에 발맞춰 줄 의욕이 없다 이 말이다.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헬레나? 나는 셋이서 함께 가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레너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윽, 그만둬. 오라버니의 그 순진한 표정을 보면 거절할 수가 없게 된다고.
카이사르가 콧방귀를 뀌며 레너드를 말렸다.
“내버려 둬. 헬레나는 유령이 무서운 모양이지.”
“무섭기는 누가 무섭다는 거야?”
“아니, 이해해. 그래, 10살에게는 버거운 일이지. 이런 건 이 ‘오빠들’이 가서 확인하고 올 테니, 넌 유모 품에 안겨 잠이나 자라고.”
“하! 오빠드을?!”
내가 형제들 쳐부수고 황제 자리 꿰찰 때 아직 세포 단위로도 존재하지 않았을 이 애송이들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가서 무섭다고 울지나 마! 챙겨야 될 내가 귀찮아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