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6/156)

* * *

그리고 뒤늦게야.

‘젠장, 말렸어!’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바보 같은 도발에 넘어갔는지를 깨달았다.

세상에, 이것은 현실인가? 내가 열네 살 남자애의 이죽거림에 넘어가 이 귀찮은 작당 모의에 함께하게 된 것이?

‘지금이라도 해밀턴에게 고자질해서 엎어 버릴까? ……아니, 그랬다가는 카이사르 그 자식이 날 겁쟁이라고 평생 놀려 댈 거야. 그건 싫어!’

“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잘 거니까 가 봐도 좋아, 베시.”

나는 나를 걱정하는 메이드 베시에게 손사래를 쳐서 그녀를 내보냈다.

“하아. 유령은 무슨.”

시계를 확인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 이야기 따위, 지금의 내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다.

“애들은 좋겠어. 그런 시시한 이야기에도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다니.”

그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말려 버렸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됐다. 나는 이불 안에 베개를 넣어 두고 침실을 몰래 빠져나왔다.

카이사르의 방 앞에 도착하니, 레너드와 카이사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의욕이 너무 넘쳐서, 반대로 내 의욕은 파스스 사라졌다.

우리는 복도 끝의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통하는 작은 문 앞에 섰다. 당연하게도 지하실 문은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엇, 어쩌지? 잠겼는데?”

“으음, 자물쇠를 부술까요?”

“오, 좋은 패기야, 레너드!”

저기, 잠깐만요 도련님들? 뭘 부숴요? 우리는 강도단이 아닌데요.

“하아, 비켜. 내가 따 줄 테니까.”

나는 머리핀을 뽑아 문 앞에 섰다.

“뭐? 자물쇠를 딸 수 있어?”

“역시 내 동생! 못하는 게 없네!”

“이런 거 옛날에 많이 해 봤……, 다는 사람이 쓴 책을 읽었거든.”

부랑아 시절, 도둑질이며 소매치기며 잡다한 범죄에는 도가 텄다. 자물쇠 따는 거야 우습지.

나는 두 남자의 존경 어린 눈빛을 받으며 ―자물쇠 따는 기술이 왜 존경받아야 하는가는 둘째치고– 문을 열었다.

지하실은 내려가는 계단부터 어두컴컴했다. 습기와 먼지 냄새가 기분 나빴다. 가장 앞에 선 카이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와아, 덥다. 숨이 턱턱 막히네.”

“전하, 헬레나. 어두우니까 발밑을 조심하세요.”

우리는 촛불에 의지해, 카이사르, 나, 레너드의 순서로 계단을 내려갔다.

‘와, 좀 무섭긴 하네.’

유령을 믿는 건 아니지만, 지하실은 그 자체로 오싹한 분위기가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무슨 일 생기면 이 애송이들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조심조심 내려가느라, 끝까지 내려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널찍한 공간과 창살, 더 안쪽으로 이어진 터널이 나왔다.

“저 안쪽은 수로인가 봐. 물소리가 들려.”

카이사르가 말했고, 우리 둘은 고갤 끄덕여 동의했다.

“아무것도 없네요, 전하.”

“그러게 내가 유령은 없댔잖아.”

몸을 가볍게 떨며 내가 투덜거렸다. 터널 저쪽에서부터 불어오는 찬 공기가 몸을 으슬거리게 했다.

‘빠져나가지 못한 공기 때문에 숨 막히게 덥더니, 여긴 또 춥네.’

좁은 공간에 더운 공기와 찬 공기가 뒤엉켜 있다.

으음, 이런 경우에 뭐더라. 뭔가……,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헉, 저, 저, 저, 저, 저기 잠깐만. 저거, 저, 저거, 저거 뭐지?”

응? 레너드, 왜 갑자기 말을 더듬는 거지?

나와 카이사르는 동시에 레너드가 가리키고 있는 터널 안쪽으로 고갤 돌렸다.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 검은 공간이 사람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공간에.

“……사람?”

진짜,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그것도 상반신만!

“유, 유, 유령이다!”

“으아아아아아!”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오, 정신 사나워서 진짜!

“조용히 좀 해, 둘 다! 들킨다고!”

“도망쳐! 도망치자!”

“저주받을 거야, 분명히!”

“아 잠깐, 으아악!”

난 느긋하게 그 유령의 정체를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이 겁 많은 사내놈 둘이 내 양손을 덥석 움켜잡더니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나를 챙겨 주는 그 자상함은 고맙다만.

“세상에 유령은 없다고오오오!”

이것 봐. 내가 귀찮아질 거라고 했지?

정말 최악의 밤이다.

* * *

두 사람은 지하실을 빠져나온 후에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복도를 내달렸고, 나는 가엾게도 그 미친 말 같은 두 사내놈에게 양손이 붙들려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온 저택 사람들을 다 깨운 후에야 유령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울면서 유령의 존재에 대해 설명했지만, 어른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잠겨 있는 지하실에 문을 따고 들어간 걸 들킨 탓에, 우리 세 사람은 벌을 받게 됐다. 창피하게도 복도에서 양손을 든 채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겁쟁이들.”

대체 왜 나까지 혼이 나야 하는가. 나는 이 광란의 젊은 혈기에 휘말린 가엾은 희생자에 불과하건만.

“그건 그냥 신기루 현상이야.”

복도에서 벌을 받으며, 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두 사내놈들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

“신기루? 그건 사막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었나?”

“한 공간에서 공기의 온도 차가 너무 급격하게 나면 신기루가 보이기도 한다고.”

내 설명에 레너드는 ‘아아, 그런 건가.’ 하고 멍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이해한다기보다는, 유령은 무서우니까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싶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여전히 창백했다.

“카이사르는 이해가 안 돼?”

“나도 알아. 신기루.”

“그런데 왜 아직도 겁먹은 얼굴인데?”

“헬레나, 넌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그게 뭐야?”

“신기루는 빛의 굴절에 의해 다른 곳에 있는 형체가 허공에 비치는 거야.”

“그 정도는 알아. 뭐, 초상화 같은 게 비친 거 아니겠어?”

내가 미간을 찌푸렸더니, 카이사르가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동공을 움직여 날 쳐다보았다.

“그 지하실에 그런 초상화가 걸려 있었어?”

……음.

으으음.

잠깐만 기다려 봐. 나 목덜미에 소름 끼쳤으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무겁고 찝찝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말똥한 눈으로 서로 시선만 교환했을 뿐, 누구도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창 너머에서 번개와 동시에 콰광 하는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 들려왔다.

“우와아악!”

“꺄아아아악!”

“아아악!”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파드득 몸을 떨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솔직히, 눈물도 찔끔 난 것 같다.

무서워! 그 여자, 대체 뭔데? 뭐냐고! 무섭다고! 진짜 무섭다니까?!

“유령은 싫어어어!”

우르르르 콰앙.

공포를 실어 온 장맛비가 지나가는 밤이다.

* * *

그리고 며칠 후.

“아, 그 유령 말입니까? 실은 수로 바닥의 타일이 비치는 겁니다. 그 수로 바닥에 흰색과 푸른색의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거든요. 공작저 분들은 거의 다 아시던데, 정말 모르셨습니까?”

유령에 대해 해밀턴에게 다시 물었을 때, 그는 신이 나서 유령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유령은 아니었군요.”

레너드가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우린 너울대는 그림자만 보고 사람이라 착각했고.”

카이사르도 넋 나간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 세 사람만 바보 됐네.”

마지막 말은 하도 어이가 없어 내가 한 말이다.

“이야아, 진짜 유령인 줄 아신 겁니까, 세 분 다? 하하, 하여튼 귀여운 분들이십니다. 뭐, 좋은 추억이 생겼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좋은 추억은 개뿔!

설마 인생 2회 차에서도 흑역사를 만들게 될 줄은!

‘쪽팔려서 살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한날한시에 같은 흑역사를 쌓는, 그리 원한 적 없던 경험을 가지게 됐다.

그 후로 우리 셋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서로 흑역사를 발설하지 말자는 무언의 맹약 같은 것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훗날 사람들이 우리 세 사람의 우정의 기원을 물을 때마다, 우리는 한 명도 다르지 않게 이날을 떠올리곤 했다.

떠올리기만 할 뿐, 이날 일에 대해 입 밖으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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