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이사르의 왼팔이 거의 다 나아 갈 무렵, 공작저가 있는 서도 알펜투스에서는 하지 축제가 시작됐다.
카이사르는 축제 일주일 전부터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해밀턴에게 듣기로, 공작저에 올 때 가장 기대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 하지 축제였다고 했다.
“너희는 축제에 가 본 적 있겠지? 어땠어?”
레너드와의 검 수업 시간.
카이사르는 정원수의 굵은 가지에 빨래 널린 듯 몸을 걸친 채, 한창 수업 중인 나와 레너드에게 물었다.
“수업 방해하지 말고 가, 좀.”
“치사하기는. 너는 축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응.”
“왜?”
“귀찮으니까.”
“넌 뭐가 그렇게 다 귀찮냐?”
“축제를 좋아하는 인간은 세 종류뿐이야. 어린애거나, 소매치기이거나, 어린 소매치기이거나.”
“너도 어린애거든? 우리 셋 중에서 제일 애거든?”
카이사르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셋 중에서 제일 애같이 구는 사람은 본인이라는 건 모르는 것 같다.
“어차피 알펜투스는 시골 동네라, 축제라고 해도 별로 볼 게 없어요, 전하.”
레너드가 휘두르던 검을 잠시 멈추고 카이사르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렇지만 궁금하단 말이야. 뭐랄까,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서민의 축제가 보고 싶다고.”
“와, 재수 없어.”
내가 지금 공녀 신분만 아니라면 한 대 때렸을 거다.
“그렇게 궁금하면 다녀오면 되잖아?”
“해밀턴이 못 나가게 하니까 그렇지.”
하긴, 이해는 간다. 혈기왕성한 어린애를 축제 중인 거리에 풀어 둔다? 어휴, 그걸 어떻게 통제하겠어.
“우리 셋이 가겠다고 하면 자작님께서도 허락해 주지 않으실까요?”
“우와, 뭔데 그거. 난 빼 줘. 귀찮으니까.”
“넌 대체 안 귀찮은 게 뭐야?”
“오라버니에게 검 가르쳐 주는 거.”
“어휴, 네가 스승님이라니 레너드가 불쌍하다.”
“아닙니다, 전하. 우리 헬레나는 아주 훌륭한 교사예요.”
“들었지? 우리 오라버니는 거짓말 못 해.”
“이 팔불출 남매가 진짜……!”
카이사르가 질렸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목검을 겨눈 채 경고하듯 말했다.
“어쨌든 난 축제 같은 귀찮은 데 안 갈 거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가. 그러니까 행여라도 날 끼워 넣을 생각은 하지 마. 알겠어?”
* * *
그러나 이틀 후.
“대체 내가 왜 여기 끼어 있는 건데……!”
이 패턴에 슬슬 익숙해져 가는 게 너무 분하다.
기념품을 파는 축제 거리의 가판대 앞, 나는 양쪽에 레너드와 카이사르를 끼고 선 채 절망했다.
가게 주인이 내게 ‘양쪽에 잘생긴 도련님이 있어서 부럽네’라고 말하며 낄낄 웃었다.
흥, 뭘 모르는군. 이 자식들이 내 양쪽에 서 있는 이유는, 내가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주인 양반……!
“자작님까지 따돌리다니, 이번 일의 잔소리는 한 두 시간짜리는 될 거야.”
불과 30분 전. 우리는 카이사르의 주도하에, 해밀턴을 포함한 시종들을 죄다 따돌렸다.
다람쥐처럼 도망치는 우리를 향하여 울상을 짓던 해밀턴의 마지막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괜찮아. 어떻게 우릴 놓칠 수 있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가면 해밀턴도 꼼짝 못 할 거야.”
“와아, 어쩜 그리 못된 쪽으로만 지능이 발달 됐을까?”
“칭찬 고마워.”
“욕이거든?”
“네가 해밀턴을 몰라서 그래. 얼마나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하며 사람 귀찮게 하는 줄 알아?”
음, 그건 뭔지 알 것 같다.
소심하고 고지식해서 사소한 일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긴 했지. 확실히 같이 다니자면 꽤 피곤했을지도.
‘그렇지만 아까부터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서 불안하다고.’
나는 가판대 위의 기념품 배지 위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생각했다.
실은 해밀턴과 헤어진 후, 기묘한 기척이 따라붙었다. 환생 후 평화로운 환경 속에 지낸 탓에 내 감이 많이 둔해졌다지만, 결코 착각이 아니다.
‘변태나 소매치기? 유괴범?’
잘 차려입은 어린애 셋이 보호자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나쁜 놈들의 표적이 되는 건 당연지사겠지.
으으, 귀찮아. 이래서 나오기 싫었던 건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기척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가 살펴볼 생각이었다.
‘엇?’
그런데 뜻밖에, 골목 어귀에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금발의 젊은 청년이, 내게 들키는 것도 상관없이 노골적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기척의 정체는 저 자식인가?’
잠시 후 청년은 골목 안쪽으로 슥 사라졌다.
“엇!”
“왜 그래, 헬레나?”
“미안,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둘 다 여기서 기다려.”
“뭐? 헬레나! 헬레나?”
레너드가 다급하게 날 불렀지만, 난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남자가 사라진 골목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꽤 빨리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뭐 하는 놈이었지?”
“노에라고 합니다.”
“……!”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예의 금발 남자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어떻게 내 뒤에 서 있는 거지?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어여쁘게 자라셨군요.”
뭐야, 이 인간은?
하얀 얼굴에 비리비리한 몸. 유약해 보이는 녹색의 눈동자. 나이는 20대 중반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런 남자는 만났던 적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나를 잘 아는 듯 굴고 있다.
심지어 남자는 내 앞에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일단 날 공격할 의사는 없는 것 같다. 살기도 투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일까? 기분 나쁜 감각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당신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나의 보물, 나의 신, 나의 구원자. 하나뿐인 나의 왕.”
“……뭐?”
“어찌 시간은 이리 더디게 흐르는지. 무너져 가는 이 육체가 야속할 따름입니다.”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말 좀 해.”
뭐지. 미친놈인가?
남자는 찡그린 내 표정에 ‘크흡’ 하고 고갤 숙였다. 뭐야, 설마. 울어? 우는 거야? 농담이지?
“헬레나!”
내가 당황하여 어버버거리고 서 있는 그때, 저쪽에서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날 부르며 달려왔다.
“일행분들이 오시는군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훔쳤다.
“머지않아 다시 뵙겠습니다. 제 숨이 다하기 전에, 꼭 다시.”
“뭐? 잠깐만!”
남자는 도망치듯 골목 안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곧 내 곁에 당도한 카이사르에게 팔이 붙들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뭐 하는 거야!”
카이사르가 날 잡아 세우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사이 남자는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이렇게 금방 사라질 수가 있는 건가?
아니, 일단 지금은 나에게 화를 내는 카이사르부터 진정시키자.
“나한테 왜 성질이야?”
……음, 뱉어 놓고 보니, 방금 발언은 진정시키는 데 별로 효과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 뻔했나.
아니나 다를까, 카이사르는 더욱 화가 나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잖아! 아까 그 남자는 대체 뭐야?!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아무 짓 안 했어.”
“아무 짓 안 하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진짜거든? 그냥, 그, 길을 물어봐서 가르쳐 준 것뿐이야.”
카이사르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레너드의 표정도 오묘하다.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긴, 어린애한테 길을 물으며 우는 어른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군. 이럴 땐 재빨리 화제를 넘기는 게 낫다.
“그보다 이것 좀 놓고 말해. 아프단 말이야.”
내가 얼굴을 찡그렸더니, 카이사르도 그제야 머쓱해하며 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날 걱정했다는 건 알겠지만, 카이사르는 너무 다혈질이다.
“저기……, 일단 저쪽으로 나가서 잠깐 쉬는 게 어떨까?”
나와 카이사르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곁에 서 있던 레너드가 중재하듯 나섰다.
결국 우리 둘은 타이밍 좋은 그 제안에 격하게 고갤 끄덕여 응했다.
* * *
우리는 자리를 옮겨 돌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들어, 헬레나. 낯선 사람이 쿠키를 사 준다고 해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카이사르의 충고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린애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충고를 듣는 상황이라니.
‘그나저나 그 남자.’
자신을 ‘노에’라고 했다. 성이 없는 걸 보면 가명일 확률도 있을 것 같지만.
어쨌든 나를.
‘왕’이라고 칭했다.
‘그 외에도 신이니, 구원자니, 닭살 돋는 온갖 호칭으로 칭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왕’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혹시 그는, 내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인 걸까?
“헬레나, 표정이 안 좋아. 역시 아까 그 남자에게 뭔가 불쾌한 소리라도 들은 거야?”
옆에 앉은 레너드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나는 퍼뜩 고갤 들었다.
“응? 아니, 아무것도.”
나는 고갤 저으며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괜히 신경 쓰게 할 필요는 없지.
더구나 예의 불쾌한 기척도 여전하고 말이야.
‘분명 아직 근처에 있는 거겠지, 그 남자.’
다시 마주치게 되면 제대로 물어봐야지. 남자가 오열을 하든 말든 당황하지 말고, 제대로.
“역시 안 되겠어. 해밀턴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카이사르는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먼저 해밀턴을 따돌려 놓고, 나 참.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마차가 섰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따돌리면 으레 처음 장소에서 기다렸거든.”
이 인간, 한두 번 따돌렸던 게 아니로군. 어쩐지 능숙하더라니.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레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카이사르는 고갤 저었다.
“아냐, 내가 다녀올게. 나랑 헬레나 단둘이 남게 되면 분명 또 싸우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러지 말고 오라버니랑 둘이 다녀오는 건 어때?”
“흥, 혼자서 기다리다가 또 낯선 사람이 쿠키 준다고 하면 쪼르르 따라가려고?”
“안 그러거든?!”
“기다려.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고, 뛰어갔다가 오면 금방이야.”
하긴……, 워낙 작은 시골 동네라, 10분이면 다녀올 거리긴 하지. 뭐 별일이야 있겠어?
결국은 카이사르 혼자 해밀턴을 찾으러 나섰다.
흐음, 어쩌다 보니 우리 남매가 황자를 부려 먹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나쁘지 않은데?
카이사르가 떠난 후, 레너드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별일 없었던 거지, 헬레나?”
“그렇다니까. 해코지하려는 기색도 없었는걸.”
좀 기분 나쁜 느낌의 남자이긴 했지만, 확실히 나에게 적의는 없었다.
“걱정했어. 싫어하는 걸 괜히 무리해서 데리고 나온 탓에 무슨 일 생기는 줄 알고.”
“음, 나오기 귀찮았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그랬구나. 네가 요즘 전하와 많이 친해 보여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친해 보여? 카이사르랑? 아니, 어딜 봐서?”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얼굴만 보면 언성부터 높이고 있는데, 어딜 어떻게 잘못 보면 친해 보일 수가 있는 거야?
“전하랑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렇고.”
“오라버니에게도 반말해도 좋다고 했는데 오라버니가 거절했잖아.”
“음, 나는 역시 부담스러운걸. 그런 거 보면 헬레나는 참 대단해.”
레너드가 쓰게 웃었다.
카이사르가 말한 게 이런 거겠지. 말을 놓으라고 해도 상대 쪽에서 도리어 어려워한다던 얘기.
“서로 허물없이 대하는 것처럼 보였어.”
“허물없이 헐뜯고는 있지.”
“어쨌든, 으음, 조금 소외감 느꼈을지도. 아하하, 유치한가?”
레너드가 민망한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세상에. 여동생을 질투하는 오라버니라니, 세상 최고로 귀엽다. 나는 오라버니의 목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오라버니야. 저런 엉덩이에 뿔 난 성격 나쁜 황자보다 오라버니가 훨씬 더 좋아.”
당연하지! 이렇게 착하고, 귀엽고, 수줍음 많은 오라버니라니, 내가 평생 부둥부둥하며 지켜 줄 거라고!
“그리고 아까 그 남자도 정말 별일 아니었어. 전혀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그냥 이상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이쪽을 향한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지금쯤 어디론가 멀리 가 버렸을…….
‘……엇?’
그러고 보니, 기척이 사라졌어?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척이 있었는데?
‘포기하고 돌아간 건가?’
그럴 리가.
나에게 다시 접근할 생각으로 주변을 배회했다면, 내 주변에 사람이 한 명이라도 사라진 지금이 적기일 터.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하고 돌아갈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그 불길한 기척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
‘설마 카이사르였나……!’
쿵, 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안일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게 당연한 건데.
아직 아무것도 아닌 10살 공녀와, 세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후계자 1순위인 황자. 당연히 누굴 노리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너드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아. 카이사르를 데리러 가야겠어.”
부디 내 기우이길 바란다.
지금 여기서 카이사르가 잘못되면, 우리 가문도 박살이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