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9/156)

* * *

레너드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레너드와 해밀턴이 정말 빠르게 도착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상 빨리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다만, 그들보다 내가 쓰레기 세 개를 치우는 게 조금 더 빨랐을 뿐이다.

“이게 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건물 안에 들어선 해밀턴이 넋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건물 안은 난장판이다.

뭐 하나 멀쩡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싸우면서 부서진 것도 있고, 열 받은 내가 부순 것도 있다.

“한 놈은 큰 방에, 한 놈은 복도에, 한 놈은 저기 뒷문 앞에 있어요.”

나는 덩치 큰 놈에게 빼앗은 단검으로 건물 안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해밀턴에게 설명했다.

“몇 명은 죽었을지도 몰라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가, 잠시 생각하고 정정했다.

“아니, 다 죽었을지도 몰라요. 미안해요. 아직 조절이 안 돼서.”

10살의 나는 여유를 부리며 싸울 상황이 안 됐다. 까딱 잘못하면 제압당할 테니까. 결국 상대가 죽든 말든,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해 반격하는 수밖에.

원래 적당히 패는 게, 그냥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법이다.

“호, 혼자서……, 다 상대했다는 말입니까, 지금?”

“헬레나,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는 해밀턴과 달리, 레너드는 침착하게 나의 안전부터 살폈다.

하으, 역시 천사 같은 내 오라버니. 레너드를 보니 열 받았던 기분도 사르르 녹는구나.

“응, 괜찮아. 당분간 근육통으로 고생은 좀 할 것 같지만.”

“잠깐만요. 근육통이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녀, 대체 정체가 뭡니까!”

해밀턴이 내게 윽박질렀다. 무슨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하긴,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공작가 사람들은 날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잊고 있었지만 말이야.

나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천재인데요.”

“네……?!”

“그보다 카이사르가 많이 다쳤어요. 저쪽 방에 눕혀 놨어요. 카이사르부터 챙겨 주세요.”

해밀턴도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든 듯, 내가 가리킨 방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곧 치안대 사람들도 올 거야. 미안해, 내가 늦었지? 하아, 다행이야. 네가 무사해서.”

레너드가 피 묻은 내 손을 꼭 잡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 진짜, 내 오라버니는 왜 이렇게 착한 걸까. 어리광 부리고 싶어지게.

“오라버니. 나 못 걷겠어.”

“그래? 그러면 업어 줄게.”

레너드가 냉큼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폴짝 뛰어 레너드의 등에 매달렸다. 그 등에 고갤 기대니, 스르륵 잠이 쏟아졌다.

‘진짜 긴 하루였다.’

귀찮고 피곤하긴 하지만. 몸 여기저기가 벌써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카이사르가 죽지 않았다.

살아 있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레너드의 체온에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 * *

납치 사건 후 나는 꼬박 사흘을 앓았다. 전신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의사는 내게 발목 인대가 늘어났고, 팔 근육이 다쳤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10살 어린애의 몸으로 무리한 기술을 사용했으니까.

납치범들은 운 좋게 목숨은 보전한 모양이다. 하긴, 수도에 끌려갔으니 운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감히 황실의 핏줄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든, 배후에게 입막음으로 살해당하든, 앞날이 밝진 않을 것이다.

사실 이번 일에서 가장 두려운 건 내 몸이 다치는 일이 아니다.

진짜 두려운 건 역시.

잔소리다.

몸이 회복되고 이틀 후, 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호출받았다.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전하를 무사히 구출했으니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려고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속내를 떠보았다.

실패다. 아버지의 표정이 더 싸늘하게 굳었다.

“음, 뭐, 생각해 보니 아주 무사한 건 아니네요. 다쳤으니까.”

나는 아직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을 카이사르를 떠올리며 웅얼거렸다.

아버지는 짧게 한숨을 쉰 후,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헬레나. 나나 네 어머니는 네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아. 그렇기에 걱정하는 부분도 있어.”

“제가 너무 뛰어나서 오라버니를 누르고 공작가를 장악할까 봐요?”

“그럴 의욕이 없잖니?”

“그건 그렇네요.”

과연 나의 부친.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군.

“우린 네가 너무 뛰어나다는 이유로 감당 못 할 일에 휘말리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다. 이번처럼 말이야.”

으음.

잘 모르겠는걸.

할 만한 일이라 생각했고,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으니까 뛰어든 거다. 결과도 다 좋은데, 왜 이 문제로 혼나야 하는 거지?

“감당 못 할 일은 안 해요.”

“그래,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어느 부모도 10살 딸아이가 납치범에게 뛰어드는 걸 반기진 않아.”

그런가?

내 전생의 아버지는 내가 내 영혼 갉아먹어 가며 용을 봉인한 일화를 제일 재미있어 하던데.

“헬레나. 너는 왜 레너드를 가르치고 싶으냐?”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네가 직접 검을 쥐는 것은 싫으냐?”

“싫다기보다, 어차피 제가 다 이길 거라 재미가 없어요.”

“매사에 의욕 없는 네가 원한 일이니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이번 일을 허락하면 널 ‘특별한 아이’라고 공인하게 되는 거야. 그게 옳은 건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감당 못 할 일에 휘말리게 될까 봐서요?”

“그래. 녹트 자작이 벌써 널 수도로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안달이 났더군. 우수한 선생을 붙여 제대로 키워 보고 싶다고 말이야.”

해밀턴이 그런 말을? 전생의 내 스승님 같은 인간이 또 나타났다.

글쎄, 어떤 우수한 선생을 붙여도 나보다 잘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너는 레너드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으냐?”

아버지가 말하는 ‘특별한 아이’의 삶은, 분명 조용하고 게으르게 살고 싶은 내 이상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재미있는 다른 일을 찾을 수가 없는걸.

뭘 하든 시시하고 무료할 뿐인걸.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거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살 거야.

“그래도 가르치고 싶어요.”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카이사르의 병문안을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어쩐지 망설여졌다.

나 때문에 다쳤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머뭇거리고 갈등하지만 않았어도 카이사르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결국 이레째 되는 밤, 나는 새벽을 틈타 카이사르를 찾아가기로 계획했다.

카이사르가 자고 있을 때 살짝 가서 상태만 확인하고 나오는 거다. 이렇게 하면 민망한 상황을 감당할 필요가 없지.

좋아, 완벽해.

그렇게 생각했는데.

“……헬레나. 괴도로 전향했어?”

이 자식, 왜 아직까지 안 자고 깨어 있어?!

살금살금 카이사르의 방에 들어간 나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카이사르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서로 미안해, 괜찮아, 하는 어색한 상황 피하려다가 더 민망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다니!

“왜, 왜 안 자고 있어?”

“잠이 안 와서. 그러는 너는 이 야심한 시각에 남의 방에 무슨 용건인데?”

거기까지 말한 카이사르가, 갑자기 ‘헉’ 하고 깜짝 놀라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자는 날 덮칠 생각이었군!”

“닥쳐.”

미안한 마음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이 자식.

몰래 다녀가는 건 실패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다들 다녀갔는데, 너만 계속 안 오더라. 치사하게.”

“살아남은 거 알았으면 됐지.”

“뭐야, 그 말투. 쓸데없이 비장하잖아.”

카이사르가 킥킥 웃었다.

웃는 걸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 혹시 겁에 질려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직 열네 살이니까. 어린애니까.

그날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한 하루였다.

“다친 곳은 어때?”

“아직 화끈거리긴 해. 곧 아물겠지.”

“흉터, 남을까?”

“글쎄.”

“흉터 때문에 장가 못 가면 어쩌지?”

“푸핫, 등에 나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큰일이네. 자고로 남자란 참한 성격에 백옥 같은 피부를 가져야 하는 법인데.”

“꼰대 같은 어른 흉내 내냐?”

“카이사르는 성격도 참하지 못하잖아. 장가가기 다 틀렸어.”

“누가 누구한테 성격 지적이야.”

카이사르가 코를 씰룩거리며 투덜댔다. 그러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정 장가갈 데 없으면 네가 나 책임지면 되겠네.”

카이사르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싫은데? 황가랑 혼인이라니, 분명 귀찮은 일 잔뜩일 거 아냐?”

“너한테 안 귀찮은 게 대체 뭐가 있어!”

카이사르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이크, 괜히 놀렸나. 그러잖아도 아픈 애, 혈압 올라서 상처 터지면 곤란한데.

“괜찮은 거 봤으니까, 난 이제 갈래. 늦었으니까 얼른 자.”

“엇, 벌써 가게?”

“벌써? 새벽 3시인데?”

“으음, 뭐……, 그렇긴 하지.”

카이사르가 웅얼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침대에서 일어났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실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린 게 하나 있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걱정될 만큼 수척해졌다는 것.

환자이니 당연하다 여겼다만,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단 아무리 낮에 잠을 많이 잤다고 해도, 새벽 3시에 책을 읽고 있다는 건 좀 수상하기는 하다.

“잠이 안 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이사르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고갤 숙였다. 다만 어두운 표정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됐다.

“무슨 일인데?”

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살짝 잡았다. 카이사르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금 전의 활달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서워.”

무서운 게 당연하다.

겨우 열네 살이니까.

그래, 넌 그런 애였지. 울거나 침울해하는 대신, 오히려 허세를 부리고 날을 세우며 견뎌 내는 애였지.

나는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반기지 않을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오히려 오만을 부리던 열네 살의 소년을.

“황성으로 되돌아가기 두려워. 모두 날 죽이려는 사람들뿐이야.”

“하지만 카이사르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우리 아버지나, 자작님 같은 사람 말이야.”

“그들이 날 언제까지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카이사르가 따지듯 말했다.

“난 죽기 싫어. 그냥 황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어.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

“황위를 포기해도 카이사르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후환을 남기느니 아예 죽여 없애는 게 깔끔하잖아.”

에두르지 않은 내 직언에 카이사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이미 내가 전생에서 겪었던 일이다. 물론 나는, 이복형제들을 살해한 쪽이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해질 거야. 황위를 포기하면, 카이사르를 보위할 사람이 없어질 테니까.”

“나도……, 알아.”

카이사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야?”

“어쩌긴 뭘 어째. 황제가 되어야지.”

“그게 그렇게 쉬워?!”

“왜 안 쉬워? 카이사르는 1황자야. 후계자 1순위라고. 이것만큼 쉬운 조건이 어디 있어?”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카이사르가 내게 소리쳤다.

글쎄. 부랑아로 살다가 황위에 오른 내가 보기에는, 이것보다 쉬운 조건은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몸을 조금 더 기울이며 말했다.

“카이사르, 들어 봐.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라서 말이야, 상대가 약해지면 더욱 괴롭히려고 들어. 하지만 무는 쥐는 고양이도 안 잡는 법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이럴 때일수록 도망칠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거야. 날 건드리면 네 인생도 조지는 거라는 걸 보여 줘야지.”

나의 직설적인 표현에 카이사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넌 귀한 댁 영애가 그런 험한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난 그렇게 못해. 자신 없어. 나는 너처럼 강하지 않아.”

“아냐, 카이사르는 강해. 목숨 걸고 날 구해 줬잖아.”

“그냥 몸이 움직였던 것뿐이야. 사실은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무섭지 않아서 해낸 사람은 없어. 무섭지만 해내는 거야.”

누구나 다 그런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어리광이라면 언제든 들어 줄게. 하지만 이런 일로 도망치지 마.”

“헬레나는 내가……,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되게 해야지. 그냥 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어, 카이사르.”

나는 카이사르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괜찮아. 내가 같이 있어 줄게.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주겠어.”

내 말에 그제야 카이사르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아마 절실했을 것이다.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만한 누군가가.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특별한 사람’은 늘 고독하다. 그래, 아버지가 염려하고 계신 바가 무엇인지 안다.

그래도.

감당 못 할 일이 된다고 해도, 나는 이 아이의 편이 되어 주고 싶다.

“이제 좀 안심이 돼? 잘 수 있을 것 같아?”

“모르겠어.”

카이사르가 침대에 누운 후, 말똥거리는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가끔은 네가 나보다 엄청나게 연상인 것처럼 느껴져.”

“이제 알았니, 애송이.”

“그렇지만 내가 너보다 오빠야.”

“혼자서는 무서워서 잠도 못 자면서 무슨.”

“오늘까지만이야.”

그렇게 말하며, 카이사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를 침대 안으로 끌어당기듯이.

“그러니까,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라.”

남녀가 유별하건만, 이 무슨.

뭐, 어머니께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려나. 얘나 나나 아직 어린애고.

결국 나는 꼬물거리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카이사르와 나란히 누웠다.

“고마워.”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사르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표정이 편안해 보여서, 나도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그에게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10살 어린애한테 새벽까지 깨어 있으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야.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 그 길고 두려운 밤을 함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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