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를 위하여 태어난 너
어느 화창한 오후.
시녀 베시가 해맑은 얼굴로 편지 봉투를 들고, 검 수업 중인 나와 레너드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아가씨. 두 분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어요.”
나와 레너드는 동시에 ‘아아’ 하고 짧게 반응했다. 둘 다 기대감이라고는 없는 목소리였다.
그럴 것이, 발신인이 누군지 안 봐도 알겠거든.
“이리 줘.”
나는 베시에게 봉투를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뜯었다. 실은 내용마저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서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애하는 레너드 페레스카, 헬레나 페레스카에게.
다음 달에 갈 거야.
내 방 청소해 둬.
그리고 커튼도 좀 바꿔 줘. 촌스러워 죽겠어.
카이사르 W 그레이 보냄
용건 외에 그 흔한 인사치레조차 없는 편지다. 늘 그랬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게스트 룸이 ‘내 방’이 된 거야, 이 자식.
“또 여름이구나.”
내 곁에 서서 함께 편지를 읽은 레너드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여름이다.
그의 편지는 꼭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는 예고장 같다.
카이사르와 처음 만난 여름으로부터 3년.
그와 함께 보낼 네 번째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이고, 공녀 선생 오셨습니까.”
단골 무기점에 들어서니, 점주가 실실 웃으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이 동네에서 나는 ‘공녀 선생’이라 불리고 있다. 레너드가 지역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한 후, 그의 스승인 내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실은 어제 파렐가의 시종장이 다녀갔습니다. 공녀 선생을 한 번 뵈었으면 하던데.”
“파렐가에서요?”
파렐이라면, 작년에 내게 ‘열두 살이 무슨 선생 놀이냐. 소꿉놀이나 해라.’라며 조롱했던 사람이다.
“그 댁 도련님이 검술 선생을 찾고 있더군요.”
“그렇군요. 하지만 전 싹수가 안 보이는 이를 제자로 들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어이쿠, 그대로 전하면 될까요.”
“아뇨. ‘검은 관두고 소꿉놀이나 해라.’라고 덧붙여 전해 주세요.”
내 말에 주인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제가 주문한 물건은 다 됐나요?”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여기 있습니다. 확인하시죠.”
내 재촉에 주인이 가게 안에서 나무 상자를 두 개 꺼내 왔다.
“이게 공자님 것, 그리고 이게 공녀 선생의 것입니다.”
내 상자를 열어 보니, 똑같이 생긴 검 두 자루가 엇갈려 들어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자루를 꺼내 시험 삼아 허공에 휘둘러 보았다.
“생각보다 잘 나왔네요.”
“말도 마십쇼. 검신의 길이가 애매하다고 대장간에서 어찌나 투덜대던지.”
“까다로운 일을 해 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이걸로 대장간 주인이랑 식사나 한번 해요.”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카운터 위에 얹어 놓았다. 주인이 반색을 하며 금화를 챙겼다.
“어휴, 이래서 내가 공녀 선생을 좋아한다니까.”
“알아요. 역시 돈이 최고죠. 마차까지 짐 좀 옮겨 주시겠어요?”
“어이구, 당연하지요. 공녀 선생께 무거운 거 들게 할 수 있나.”
주인이 신이 나서 상자를 챙겨 들었다. 나는 내 검 중에서 한 자루만 꺼내 허리띠에 매달았다.
짧고 가벼워, 드레스 장식으로 보일 정도다.
“응, 딱 좋아.”
평소 호신용으로 패용해도 되겠다.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게를 나섰다.
가게 한쪽에 서서, 무기점 주인과 시종 베시가 마차에 짐 싣는 것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그 파란 더벅머리의 여자애가 나타난 것은.
“에잇!”
“……?!”
어디선가 튀어나온 여자애가, 내 몸을 세게 부딪치고 달아났다. 재빨리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기세에 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어머나, 아가씨! 괜찮으세요?!”
베시가 당황하여 내게 달려왔다.
“응, 괜찮아.”
“어쩜, 버릇없는 계집애 같으니!”
“어라……, 잠깐만.”
그 순간, ‘촉’이 왔다.
방금 그 여자애가 내게 왜 달려들었는지에 대한 촉이.
나는 서둘러 외투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내 촉에 감탄했다.
“……털렸네.”
“네에?!”
소매치기로군.
그래, 잘 알지. 나도 옛날에 많이 해 본 짓이니까.
그런데 막상 내가 당하니 꽤 열 받는데, 이거?
“세상에! 치안대에 신고할까요?”
“아냐, 됐어. 몇 푼 털린 걸 가지고 뭘.”
빌어먹고 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애들이다. 치안대에 신고해서 험한 꼴 당하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베시가 기특하다는 양 나를 쳐다봤다.
“우리 아가씨는 배포도 참 크시다니까.”
“응. 찾아오지, 뭐.”
“찾아……, 네?”
“금방 올게. 베시는 여기서 기다려.”
“세상에 아가씨! 안 돼요! 저런 애들이 얼마나 험악한데요!”
베시, 넌 모르겠지만 내가 그 험악한 애들 출신이란다. 쟤들이 아무리 험악해도 지금 나한테는 그냥 병아리야.
“괜찮아. 내가 홧김에 사상자 안 내게 기도나 하고 있어, 베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베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나는 농담엔 재주가 없는 것 같다.
* * *
손바닥만 한 시골 동네에서 도망쳐 봐야 거기서 거기다.
더구나 부랑아들 모이는 장소야 빤하지.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도시 외곽 판자촌으로 향했다.
한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 살펴보니, 얼굴이 꾀죄죄한 애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현장 소매치기가 돈을 훔친 후에 해야 할 일은?
“야, 씨. 이게 다야? 귀족 주머니 털었다며. 너 꼬불쳤지?”
“아니거든? 진짜 이게 다라고!”
“너 뒤져서 한 푼이라도 나오면 죽인다?”
정답.
선배 부랑아들에게 상납한다.
크으, 추억 돋네. 나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내 돈지갑을 훔친 더벅머리 여자애는, 덩치 큰 남자애들에게 포위당해 있으면서도 전혀 기가 안 죽었다.
“난 번즈가 사람이야! 몰래 돈을 꿍치는 그런 짓은 안 해!”
“파하! 얘 뭐래냐! 그럼 이건 뭐 구걸해서 얻어 온 돈이야?”
“그, 그건……, 귀족은 돈 많으니까 좀 빌리는 거야! 너네처럼 아무 주머니나 터는 줄 알아?”
크으, 기적의 논리로군.
‘그나저나, 번즈? 번즈 백작가를 말하는 건가.’
주요 귀족 명부는 이미 다 암기한 상태다.
번즈라면 꽤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 가문에 어린 딸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사생아인가.’
그러고 보니 백작도 어두운 청색 계열의 머리카락이었던 것 같다.
“뭐야? 우리가 안 주워 줬으면 동구 밖에서 말라 죽었을 년이!”
“그, 그러니까 이렇게 꼬박꼬박 상납하고 있는 거잖아?”
“아, 되게 시끄럽네. 야, 너네 신참 교육 이따위로 할래?”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애의 말에, 주변에 선 다른 애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자애를 짓밟고 때리기 시작했다.
일명 기강 잡기. 나도 당했던 적 있다.
으음, 안 좋은 기억만 자꾸 떠오르게 만들다니, 곤란한 여자애네.
‘뭐, 난 내 돈만 찾아가면 되지.’
나는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뒤에 소리 없이 착지했다.
“잠깐 실례할게.”
“뭐? ……엇!”
툭.
나는 검을 이용해 대장이 손에 쥐고 있던 내 지갑을 쳐올렸다. 그러고는 허공에 붕 떠오른 지갑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지갑을 빼앗긴 부랑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넌 뭐야!”
“나? 지갑 주인.”
나는 검을 어깨에 척 걸치며 친절하게 내 신상을 알려 줬다.
내 말에 부랑아 대장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뭐야, 이 또라이는? 이게 돌았……, 끄아아악, 내 발!”
나는 구두 굽으로 녀석의 발을 힘껏 밟았다. 해진 천 신발을 신고 있던 녀석은 엉엉 울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얘들아, 말조심하련? 내가 너네 선배야.”
내가 싱긋 웃으며 친절하게 조언했다.
“덤빌 거면 한꺼번에 덤벼 줄래? 귀찮으니까.”
“으, 으어어! 미친 애다!”
“대장이 당했다! 도망쳐!”
으잉? 고작 대장 발 한 번 밟혔다고 삼십육계 줄행랑?
요즘 부랑아들은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쯧쯧.
“뭐……, 패기 넘치는 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네.”
모두가 달아난 공터.
나는 양손에 돌멩이를 쥐고 선 여자애를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마주하고 보니, 여자애는 나보다 키가 컸다. 그러나 워낙 깡말라서 나보다 더 작아 보였다.
“우, 으, 그, 그 지갑 내 거야! 돌려줘!”
“이게 왜 네 거야? 내 거지?”
“내가 훔쳤으면 이제 내 거지!”
이럴 수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 패기는 마음에 든다. 원래 물러날 곳이 없는 애들은 무서운 게 없는 법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날 한 대라도 칠 수 있다면, 이 돈 다 너 줄게.”
“지, 진짜야?”
“대신 네가 항복 선언하면, 그때부터 넌 내 부하다. 어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자애의 눈빛이 오싹하리만치 달라졌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으아아아악!”
여자애가 즉시 내게 돌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나는 여자애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심지어 여자애를 놀리듯, 지갑을 허공에 던졌다가 받기도 했다.
“앗, 지갑이!”
“어딜 보는 거야? 집중해.”
“아얏!”
여자애가 허공에 팔을 뻗는 순간, 나는 검집째로 여자애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이, 이게!”
“이게, 뭐? 곱게 자란 귀족 여자애 하나 어쩌지 못하는 거니?”
“아야! 앗! 아야! 그만 때, 악!”
찰싹, 찰싹.
내 검집은 여자애의 몸 여기저기를 때렸다. 여자애는 메뚜기처럼 팔딱팔딱 뛰며 발악했다. 나중에는 나에 대한 공격도 잊고, 피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윽, 자,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그만 때려, 아파!”
“응? 잘 안 들리는걸? 난 반말은 제대로 못 듣는 난청이 있단다, 얘야.”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결국 여자애의 패배. 뭐, 당연한 결과지만.
여자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몸 여기저기가 나한테 맞은 자국 때문에 빨갰다.
“지갑 훔쳐서 죄송합니다! 어흐어엉, 잘못했습니다! 먹고 살려고 그랬습니다! 이제 아가씨 물건은 안 털겠습니다!”
“아니, 누구 물건이든 털면 안 되지. 번즈가의 아가씨가.”
내 말에 여자애가 콧물을 훌쩍거리며 고갤 들었다. 그제야 여자애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게 됐다.
은색에 가까운 청회색 눈동자다. 수은처럼 반짝거려, 아름다웠다.
“저, 저는 그저 사생아일 뿐으로……, 쿨찌럭, 사실 백작님 얼굴도 모르고……, 어흐흑.”
“네 이름은?”
“테라입니다, 아가씨.”
테라가 다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누가 지어 준 이름인데?”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백작님께서…….”
나는 검집으로 테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테라가 두려움에 떨며 날 올려다보았다.
“좋아, 넌 오늘부터 아고트다.”
“예?”
“잊었어? 나에게 지면 내 부하가 되기로 했잖아?”
“엇, 어, 그렇지만……, 예? 왜 저 같은 걸……?”
그러게, 왜일까.
실은 아주 오래전의 나도, 누군가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어서 비렁뱅이 생활을 청산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과거의 나는, 끝내 아무도 구원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아고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 원래, 길 가다가 사람 줍는 거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