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13/156)

* * *

새 식솔이 생겼다.

아고트. 올해 열두 살의, 집요하고 싹싹한 여자애.

아고트는 뭐든 금방 배우고 익혔다. 시종들 사이에서도 금방 평판이 좋아져서, 공작저에 빠르게 적응했다.

또한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는지 참 잘 따르고 섬겼다.

“아가씨께서 구두끈을 직접 묶으시다니, 안 될 일이에요! 제가 묶어드릴게요!”

“아니, 이 정도는 내가…….”

“앗, 이런! 구두에 먼지가! 절 발 닦개로 써 주세요, 아가씨!”

“그러니까 그런 일은…….”

“포크도 직접 잡으실 필요 없어요! 제가 먹여드릴게요! 자, 아앙~”

“…….”

……좀, 너무 잘 따랐다.

큰일이군. 괜히 데려왔나.

숨 쉬는 것도 귀찮은데, 귀찮은 게 더 늘어난 기분이다. 뭐지, 이건. 생전 키워 본 적 없는 비글을 키우게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오죽하면 레너드가 역대 최고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겠는가.

“괜찮겠어, 헬레나?”

“응, 뭐……, 좀 지나면 아고트도 침착해지겠지.”

“그게 아니라, 곧 전하가 오실 거잖아.”

“응? 카이사르 얘기가 왜 나와?”

내 순수한 의문에, 레너드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담하는데, 전하와 아고트, 분명히 사이 안 좋을걸.”

“에이, 설마…….”

불길한 예감에 쓰게 웃으며, 나는 레너드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공작저를 찾아온 바로 그날.

카이사르와 아고트가 처음 만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레너드의 예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 *

6월의 마지막 날, 카이사르가 해밀턴과 함께 공작저를 찾아왔다.

그가 마차에서 내릴 때, 나는 일순 다른 사람이 찾아왔나 싶어 깜짝 놀랐다.

훌쩍 자라 버린 키와 넓은 어깨, 선 굵어진 외모와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 1년 전 여름 내가 배웅했던 그 남자애가 아니었다.

애들은 빨리 큰다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커 버리는 건 반칙 아닌가?

“레너드. 헬레나. 잘 지냈어?”

마차에서 내린 카이사르가 나와 레너드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으며 먼저 다가왔다.

헉, 목소리도 굵어졌다. 으어어, 이거 뭐야. 난 이런 남자애 몰라.

“헉. 전하, 대체 키가 얼마나 크신 거예요?”

넋 나간 나를 대신해 레너드가 물었다. 카이사르는 멋쩍은 듯 뺨을 긁적거렸다.

“글쎄. 6피트 좀 안 되려나? 많이 큰 건가? 레너드랑 비슷한 것 같은데.”

6피트?!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인간이 갑자기 그렇게 되지?!

“스승님은 더 조그매졌네.”

카이사르가 킥킥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 손도 커졌다. 거의 아버지 손만 하잖아?!

“야, 손 안 치워?”

“성격은 더 사나워졌……, 커흡!”

내 주먹이 카이사르의 명치에 꽂혔다. 카이사르가 몸을 파르르 떨며 허리를 숙였다.

“황자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건 이 제국에 스승님밖에 없어.”

언뜻 투덜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카이사르는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그리웠다는 듯이.

“공작저는 언제 와도 변함이 없어서 참 좋아. 그런데…….”

카이사르가 눈썹을 으쓱하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아니, 아니다.

내가 아니라, 내 왼팔에 찰싹 붙어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애를 가리킨 거다.

“저건, 뭐야?”

카이사르가 웃으며 물었다.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뭐에 화가 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비렁뱅이를 들였어?”

아고트에 대한 설명을 들은 카이사르가, 카우치에 앉아 부츠를 벗으며 물었다.

나는 카이사르의 팽팽한 다리 근육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뒤통수쳐 봐야 귀중품 훔쳐서 달아나는 게 고작이겠지.”

“너도 참 속 좋다.”

“아고트가 마음에 안 들어?”

“안 들어. 자기가 뭔데 널 독점하려 드는 거야?”

“날 잘 따르면 좋지, 뭘.”

“내가 싫다고, 내가! 레너드는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뜬금없이 나타난 시종까지 신경 써야 해?”

“카이사르가 걜 왜 신경 써?”

“그거야! ……아니, 그보다 아까부터 어딜 쳐다보고 있는 거야?”

“네 허벅지.”

“미쳤어?!”

카이사르가 재빨리 양다리를 올려 끌어안고선 내게 꽥꽥 소리를 내질렀다.

“여자애가 부끄러움을 몰라!”

“아니, 그렇지만……, 어떻게 1년 만에 그렇게 몸이 좋아졌어?”

내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난 진지하다. 우리 오라버니도 저런 몸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고.

“근력 운동 방법을 바꿨어?”

“몰라, 그런 거!”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카이사르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목이 빈틈없이 새빨갰다.

아니 그렇지만. 으음. 저렇게 근육이 멋진데. 으으음.

“아가씨.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아고트가 다과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왜인지, 카이사르와 아고트가 동시에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고마워, 아고트.”

“볼일 끝났으면 얼른 나가. 이제부터 헬레나는 나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카이사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할 얘기라니 뭐야, 싫은 척하더니 역시 허벅지 자랑이 하고 싶었던 건가?

“저는 아가씨의 메이드예요. 불길한 사람에게서 아가씨를 지키는 게 의무예요.”

아고트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 반응에 카이사르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하! 멍청하기는! 헬레나가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앤 줄 알아?”

“어머, 제게 소리 지르시는 건가요? 아가씨, 저 사람 너무 무서워요. 흑흑.”

아고트가 내 무릎에 엎드려 흐느꼈다.

“왜 애를 겁주고 그래, 카이사르. 아고트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란 말이야.”

“겁을 줘? 지금 저러는 걸 보고도 하는 소리야, 헬레나?”

카이사르가 자신을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이는 아고트를 가리키며 열을 냈다.

“날 두고 싸우지 마. 귀찮아.”

“들으셨나요? 이 이상 제 아가씨를 귀찮게 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제 아가씨라니! 헬레나가 언제부터 네 건데?”

카이사르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키만 커 오면 뭐 해, 하는 짓이 여전히 애인데. 하긴, 열일곱 살이면 아직 애이긴 하지.

패배감에 부들거리던 카이사르는, 마치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다급하게 자기 허벅지를 탁탁 쳤다.

“헬레나! 내 허벅지, 만져 봐도 돼!”

헉.

진심이십니까.

“진짜?”

“당연하지! 왜냐하면 우리는 아아아아아주 친한 사이니까!”

뭐, ‘아아아아아주’라는 말이 붙을 만큼 친했던 기억은 딱히 없는데.

하지만 허벅지 만지게 해 준댔으니까 괜히 태클 걸지 말자.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카우치 쪽으로 달려갔다.

아고트가 울상이 됐고, 카이사르가 승리감에 젖어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카이사르의 허벅지 안쪽을 꾹꾹 누르고 움켜잡아 보았다.

‘헉, 단단해!’

돌덩이 같다.

손으로 쓰다듬어도 보았다. 근육이 갈라진 자리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 경이로움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진짜 무슨 수를 쓴 거야? 나 한창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세상에, 우리 아기 다 컸구나!

나는 신이 나서 고갤 들었다.

“몸 진짜 좋아졌다! 고급 기술을 써도 몸에 무리 없이……!”

……음?

어라?

지금, 너무 가깝지 않아?

고개를 들었더니 바로 코앞에 카이사르의 얼굴이 있었다.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왜, 왜 그래?”

내가 말을 멈추자, 카이사르가 당황하여 내게 물었다.

당황해야 할 건 나다.

카이사르.

왜 이렇게 갑자기 어른이 됐어?

……얼굴이 뜨겁다.

“나, 그만 돌아갈래.”

“뭐? 갑자기?”

내가 카우치에서 벌떡 일어나자, 카이사르가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앗, 아가씨! 같이……!”

“아냐. 피곤해서 그만 쉬고 싶어. 따라오지 마.”

따라오겠다는 아고트도 떼어 놓고, 나는 서둘러 카이사르의 방을 빠져나왔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긴 복도를 뛰듯이 걸었다. 한참을 걸어오고 나서야 나는 벽을 짚고 멈춰 섰다.

‘뭐지? 뭐야? 나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만져 볼 거 다 만져 보고, 이제 와서?!

아니, 그렇지만 아깐 정말 허벅지 근육밖에는 안 보였다고!

“여기서 뭐 해, 헬레나?”

깜짝이야.

레너드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레너드가 걱정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엇, 오, 오라버니? 벌써 수업 끝났어?”

“응, 이제 전하께 가 보려고.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빨간데?”

“그냥 좀 더워서…….”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레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 똑같은 은발에 푸른 눈동자. 순둥한 표정과 말투. 아직 흰 솜털이 보송한 얼굴. 이제 간신히 잔근육이 잡히기 시작한 몸.

다행이군. 여긴 아직 내가 아는 레너드야.

나는 레너드를 꽉 끌어안았다.

“헬레나? 왜 그래?”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레너드는 저렇게 갑자기 변해 버리고 그러지 마. 흑흑.

아무래도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카이사르에게 적응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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