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15/156)

* * *

직접 배울 시간이 석 달밖에 없다는 초조함 때문인지, 카이사르가 배우고 익히는 속도는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덕분에 열을 준비했던 나는 다시 스물을 준비하기 위해 수업 계획서를 수정해야만 했다. 젠장.

서재에 앉아 다음 주 수업 계획을 짜고 있는데, 해밀턴이 서재를 찾아왔다.

“여전히 바쁘시군요, 공녀.”

“자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나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카이사르와 달리 그는 3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얼굴이라 괜히 안심이 되었다.

“전하의 실력은 작년과 비교하여 어떻습니까?”

“놀랄 정도로 향상됐네요. 황성에서도 좋은 선생을 붙여 주나 보죠?”

“그것도 그렇지만, 공녀께서 짜 준 아홉 달 동안의 훈련 계획을 착실하게 이행한 덕분입니다.”

오호. 성실하군. 훈련 계획서를 짜 주는 보람이 있어.

“두 분 남매께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좋은 친우가 되어 주시니 말이죠.”

“그런가요.”

“빈말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만큼은 전하도 또래 남자애들처럼 얘기도 많이 하시고 웃기도 하시니까요.”

“네? 그게 무슨?”

내가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카이사르가 떠들고 웃고 하는 게 그렇게 드문 일이었나?

내 질문에, 의자에 앉아 있던 해밀턴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황성에서 사람들이 전하를 뭐라 부르는 줄 아십니까?”

“아뇨. 뭐죠?”

“잿빛 늑대입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는 사람이라고요.”

응? 늑대? 카이사르가?

다혈질에 고집이 세긴 하지만, 그렇게 사나운 애는 아니잖아?

“아무도 믿지 않으시고, 누구도 곁에 두질 않으십니다. 몇 번쯤 암살당할 뻔한 후로는 더욱 날카로워지셨어요.”

“암살?”

“뭐,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황성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몰랐다.

그런 얘기, 전혀 안 했는데.

“제가 이런 말씀 드린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두 분 남매께 걱정 끼치기 싫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긴.

안 봐도 뻔하다.

카이사르가 그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나는 알 수 있다. 나도 겪었던 일이니까.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황제가 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으시니, 저로서는 얼마나 기쁘고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러게요. 기특하네요.”

“네. 모두 공녀 덕분이지요.”

“저요?”

“전하와 약속하셨다면서요.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 일이 딱히 없는데요.”

“아뇨. 전하의 믿을 만한 친우이시고, 전하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시지 않습니까.”

해밀턴이 어른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어찌 저리 어린 공녀께서 함부로 스승을 자처하실까 염려했습니다만, 제 기우였습니다. 모쪼록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해밀턴이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이 많은 그가 고작 열세 살인 여자애한테 허리를 숙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뻔뻔하게 인사를 받고만 있을 수는 없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만…….

‘이 인사, 내가 받아도 되나?’

황가의 일은 알 바 아니고, 엮이고 싶지도 않다. 귀찮으니까.

난 그냥 내 무료함을 달래려 후학 양성에나 힘쓰고 싶을 뿐이다.

그날 밤의 그 약속, 너무 섣불리 내뱉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엷은 후회가 밀려왔다.

* * *

아고트와 카이사르는 도무지 친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서로를 경계하고, 마주치면 으르렁댔다.

카이사르야 그렇다고 쳐도, 아고트는 황자를 상대로도 기가 죽지 않았다. 과연 내가 주워 온 애답다.

“저는 그분이 싫어요.”

어느 날 아고트가 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드물게 불만을 표했다.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카이사르 말이야?”

“아가씨를 독점하려는 시커먼 속내가 다 보여요.”

둘이 서로에게 똑같은 소릴 하는군. 자기혐오인가.

“나는 내가 가지면 가졌지, 누군가의 것이 될 성미가 못 돼, 아고트.”

“알아요. 알지만요.”

아고트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갤 숙였다.

“세 분이서 즐겁게 검 수업을 하실 때면 저는 질투가 나요.”

아, 그게 즐거워 보였나.

레너드고 카이사르고 매일 ‘이러다 죽겠다’ 하는 얼굴로 수업에 임하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혹시 검을 배우고 싶니?”

“무, 물론 어림없는 소리라는 건 알아요.”

“나에게 어림없는 일 같은 건 없어, 아고트. 네가 원한다면 검술 학교에 보내 줄게.”

내 말에 아고트가 경악했다. 이상하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고트가 내 앞에 냉큼 무릎을 꿇더니, 애원하듯 매달렸다.

“전 아가씨께 검을 배우고 싶은 거예요!”

“미안한데, 제자를 더 들일 생각은 없어. 그 둘만 해도 귀찮고 벅차거든.”

“도련님 가르치실 때 옆에서 지켜만 보는 것도 안 되나요? 어깨너머로 보고 독학할게요!”

“음, 그건 좀…….”

“절대 귀찮게 안 할게요!”

글쎄, 의욕은 높이 사겠다만.

‘하긴, 카이사르가 돌아가고 나면 레너드에게 대련 상대가 필요하긴 해.’

지금은 내가 상대하고 있지만, 나와 레너드는 실력 차가 너무 컸다.

아고트는 레너드와 신장도 비슷하니, 잘 가르쳐 두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그럼 이렇게 하자. 카이사르가 없는 동안은 아고트에게도 검을 가르쳐 줄게. 다만 1년 안에 레너드와 대련할 정도가 되지 못하면, 검술 학교로 가는 거야.”

“네, 믿어 주세요! 필요한 시종이 될게요! 정말 죽을 각오로 할게요!”

“아니, 죽을 각오까지는 안 해도 돼.”

아고트는 내 허락에 뛸 듯이 기뻐했다. 검을 배우게 된 게 좋은 건지, 나와 시간을 보내게 된 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검술 학교 차리게 되는 거 아니겠지, 나.’

감당 못 할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왜 지금 새록새록 떠오르게 되는 걸까.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카이사르와의 검술 수업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저녁 식사를 마친 늦은 밤. 나는 카이사르를 2층 홀로 불러냈다.

카이사르는 양손에 소도(小刀)을 쥐고 있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뭐야? 나머지 수업이야?”

“말하자면 그렇지. 오늘부터 돌아가는 날까지 매일 밤, 특별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야.”

“특별 수업? 레너드 빼고 나 혼자 말이야?”

“그래. 레너드에게는 가르쳐 줄 수 없는 기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거든.”

나는 오른손에 쥔 검을 들어 카이사르를 겨누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격식도 매너도 없는 그런 기술이야.”

귀족들이 보기엔 경멸할 법한 기술. 어떤 뛰어난 검술 교사도 가르쳐 주지 못할 그런 검.

‘이건 나도 스승님께 배운 게 아니야. 용병단에 있던 시절 스스로 익힌 거지.’

이 귀중한 것을 수업료도 안 받고 가르쳐 주다니, 그야말로 참된 스승이 아니겠는가.

“검을 들어, 카이사르. 이건 말로 설명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몸으로 기억하도록.”

카이사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검을 쥐었다. 다만 어정쩡한 자세는 고치질 않는다.

그러나 나는 더 기다릴 것 없이 앞으로 지치고 나아가 공격했다. 당황한 카이사르가 가까스로 내 공격을 피했다.

“뭐, 뭐야! 시작 구호도 없이 시작하는 게 어디 있어?!”

“뭘 들은 거야, 카이사르? 더럽고 치사한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잖아? 난 지금 네 등을 향해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어.”

“아니 그렇지만 정도가 있지! 더구나 넌 왜 검이 두 자루인데?!”

“수업 중엔 스승님이라고 해야지, 제자야?”

“아니, 잠깐잠깐잠깐잠깐!”

캉, 카앙!

진검이라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예측 불허로 파고드는 내 공격에, 카이사르는 간신히 방어만 할 뿐이다.

“자, 잠깐만!”

“잠깐 따윈 없어!”

나는 높이 도약하여 검을 내리꽂듯 휘둘렀다. 카이사르의 목을 벨 기세로. 카이사르가 핏기 없는 얼굴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난 쓰러진 카이사르의 가슴을 발로 밟고 서서, 그의 목전에 검을 겨눴다.

“어머, 죽었네.”

“이잇!”

이쯤 되니 카이사르도 오기가 생기는지, 내 다리를 잡고 날 넘어뜨렸다.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라, 나는 곡예 넘듯 뒤돌기를 하여 카이사르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잠시도 숨 돌릴 틈이 없다. 어느새 내 코앞에 카이사르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갑, 자기, 뭐냐고!”

나는 카이사르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았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역시 힘에서는 아직 내가 밀린다.

‘역시 금방 따라오네. 재능 있는 것들이란!’

속으로 투덜거려 보지만, 어째서인지 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카이사르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너머로 광기 어린 쾌락이 보였다.

하여튼.

이래서 재능 있는 것들은 안 돼.

‘좀 더 세게 나가 볼까.’

나는 살기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움찔하고 멈춰섰다. 아마 살면서 이 정도의 살기와 마주해 본 적이 없었겠지.

‘하지만 여기에 겁먹고 멈추면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야, 카이사르.’

이것은 대련과는 다르다.

패배. 약간의 상처. 굴욕. 그런 정도로 끝날 만큼 상냥하지 않아.

“하아아아압!”

나는 카이사르의 검을 멀리 쳐 내고, 폼멜로 그의 명치를 찔렀다.

“커흑!”

카이사르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목에 검을 척 겨누었다.

“또 죽었네.”

“쿨럭, 쿨럭! 커헉, 컥!”

카이사르가 배를 움켜쥐고 기침을 해 댔다. 간신히 기침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원망과 투지로 충혈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오싹할 정도로 잘 벼려진 눈빛이었다.

그러나, 부족하다.

부족해, 카이사르. 투기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넌 더 강해져야 해. 이 세상에 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안 남을 때까지.”

아니, 그보다 더.

“나를 죽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해, 카이사르.”

“이기는 거면 몰라도, 스승님을 어떻게 죽여!”

“안 그러면 네가 죽어.”

내가 날 죽이려 드는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황제가 됐는 줄 알아?

간단해. 그들이 날 죽이기 전에 다 죽여 버렸어.

“무는 쥐는 고양이도 안 건드린다고 했었지? 이제 그걸로는 부족해. 카이사르, 넌 늑대가 돼야 해. 널 건드리려는 고양이들에게, 네가 뭔지 보여 줘.”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황제가 될 수 있다.

“내가 황제가 되게 해 준댔잖아.”

내 말에 카이사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던 그는, 이내 멀리 떨어진 검을 집어 와 내 앞에 섰다.

“다시.”

카이사르가 내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투기에 희미하게나마 억지로 쥐어짠 살기가 보인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나는 검을 고쳐 쥐며 웃었다.

그해 여름은 정말 알차게 보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만사 귀찮고 게으른 내게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카이사르를 어디 내놓아도 손놓고 살해당하지는 않을 만큼은 만들어 놨다고 생각하니까.

후우, 이런. 잠시 방심했더니 또 열심히 살아 버렸군. 이제부터는 진짜 빈둥거리면서 지내야지. 최선을 다해 빈둥거릴 테다.

……물론 이것은, 다섯 달 후에 닥칠 일을 예상치 못한 자의 헛된 소망에 지나지 않게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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