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태자 즉위?”
첫눈이 내리고 며칠 후.
벽난로 방에서 아고트에게 스웨터 뜨는 법을 가르쳐 주던 나는, 레너드의 말에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응. 올해가 가기 전에 즉위식을 할 모양이야.”
“이 겨울에? 보통 그런 건 신년에 하지 않아?”
“즉위식 파티와 생일 파티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하께서 직접 폐하께 주청드렸다나 봐.”
“생일? 카이사르 생일이 겨울이었어?”
“몰랐어? 그래서 전하 미들네임이 ‘윈터’잖아?”
“헉, 그 W가 겨울의 약자였어?”
“헬레나……, 전하께서 들으시면 우실 것 같은데.”
레너드가 쓰게 웃었다.
음, 내 제자의 일에 너무 관심이 없었나. 카이사르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어쨌든 다행이야. 무사히 황태자로 즉위하게 되셔서.”
레너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내 곁에 앉아 있던 아고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왔다.
“그분, 1황자이시잖아요? 1황자가 황태자가 되는 건 그냥 당연한 것 아닌가요?”
“뭐……, 이치대로라면.”
나는 자세한 설명을 얼버무렸다.
카이사르와 1황비 가문인 발레르는 오랫동안 알력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황비의 황후 즉위를 막았고, 황비는 카이사르의 황태자 즉위를 방해했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세력이라, 그 힘이 꽤 팽팽하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그 균형이 지금 깨졌단 말이지.’
나는 한 손으로 대바늘을 휘리릭 돌려 장난을 치며 생각했다.
‘황비가 물러섰다는 소문은 들은 게 없어. 뭔가 거래가 오간 건가?’
답답하군. 공작령은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식이 늦게 내려온다.
뭐, 황가에 관여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아가씨, 그러면 수도에 다녀오셔야 하는 거예요?”
“응? 왜?”
“황태자 즉위면 나라의 큰 행사잖아요.”
“뭐, 부모님은 참여하시겠지만 난 아직 어리니까 빠져도 괜찮아.”
나는 아고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설명했다. 그제야 아고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레너드가 짧게 웃었다.
“어린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인 거 아냐, 헬레나?”
“그건 당연하고.”
여기서 수도까지 얼마나 먼데, 고작 황태자 된 거 축하해 주자고 그 길을 가겠어? 황제 즉위라면 모를까.
카이사르도 나의 의욕 없는 성격을 잘 알 테니, 불만은 없겠지.
난 휘리릭 돌리던 대바늘을 탁 잡으며 웃었다.
“텅 빈 저택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나태하게 보낼 거야.”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 * *
즉위 날짜가 정해지고 며칠 후, 수도에서 한 여성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실례합니다. 로위나 에버그린이라고 합니다.”
갈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이십 대 초반 여성은, 굉장히 정확한 표준어 발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응접실에 불려 나온 나와 레너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녀와의 접점이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로위나는 나와 레너드에게 각각 편지 봉투를 건네 주며 설명했다.
“카이사르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일단 두 분께 이것을.”
“카이사르가…….”
나는 봉투를 받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카이사르가 보낸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냥 도망갔을 거다. 용건이 빤하니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위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는 녹트 자작이 올 예정이었으나, 아는 이를 보내면 공녀께서 도망치실 염려가 있다 하셔서 본의 아니게 제가 오게 됐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으음.”
그 자식,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예상대로 파티 초대장이었다. 나는 초대장을 건성으로 읽으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전 가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죠?”
“아직 사교계 데뷔는 이르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군요. 실은 전하께서도, 공녀께 초대장을 전해 드리면 그리 말씀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요. 미안하지만 헛수고했군요.”
나는 초대장을 덮었다.
그러나 로위나는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공녀님은 특별히 초대장을 더욱 꼼꼼히 살펴 달라 당부하셨습니다.”
“저에게요?”
나는 눈썹을 으쓱하며 내 곁에 앉은 레너드를 쳐다보았다. 레너드도 의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 초대장은 그냥 평범한데.”
“그래?”
나는 초대장을 다시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이상하네. 나도 뭐 별다른 건 없는 것 같은…….”
있다.
있었다. 별다른 게.
가장 아랫줄에, 직접 손으로 적어 넣은 듯, 눈에 익은 카이사르의 글씨체가 보였다.
[스승님이 내 허벅지 만지며 즐거워했다는 거, 이번 파티 때 공표해 버려도 괜찮지? 다들 허벅지 좋아하는 헬레나가 누군지 관심 갖게 되겠지.]
팍! 나는 번개처럼 초대장을 구겨 그대로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엇, 헬레나? 왜 그래?”
레너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빙긋 웃는 얼굴로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응? 왜?”
“초대장을 버리면 파티에 못 들어가잖아?”
“걱정 마십시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전하께서 여분의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로위나가 새 초대장 봉투를 꺼내며 말했다. 나는 그 기분 나쁜 준비성에 이마를 짚었다.
“엇, 헬레나, 얼굴이 빨개.”
“그래? 더워서 그런가?”
“……겨울인데?”
“방이 좀 더운가 보다. 후후. 오라버니, 파티 기대된다. 그렇지?”
“헬레나, 파티에 갈 생각이야?”
“그러엄. 꼭 가야지. 가서 꼬옥 카이사르를 만나야지.”
만나서 죽여 버려야지.
영원히 입막음해 버리겠어.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두 분의 참석을 누구보다 기대하셨거든요.”
로위나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이 여자도 그 자식이랑 한통속인 거 아냐, 이거?
아니나 다를까. 로위나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지, 어디선가 안경을 꺼내 착용하고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디자이너를 구하는 대신 의상을 미리 섭외해 두었습니다. 장신구, 장갑, 부채, 구두는 준비한 카탈로그를 보고 선별해 주시면 순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더불어 파티에 참여하는 귀족 명단을 정리했으니, 미리 숙지하시어…….”
“앗, 잠깐만요. 그게 다 뭐죠?”
로위나가 워낙 후르르륵 말해 버려서 나와 레너드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나마 내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로위나의 말을 막았다.
로위나가 그제야 안경을 고쳐 쓰며 나와 레너드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씀 못 들으셨나요?”
“뭘 말이죠?”
“두 분의 사교계 데뷔를 완벽하게 치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보좌하라는 전하의 분부이십니다. 공작님께도 이미 허락을 받았고요.”
“네?”
초대장만 전해 주고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었어?
“다시 인사 드리죠. 저 로위나 에버그린, 이번 두 분의 사교계 데뷔 준비를 돕게 됐습니다.”
로위나가 허리를 숙여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아냐, 인정 못 해. 이대로라면 수도에 갈 때까지 꼬박 시달리게 될 게 분명하잖아.
나의 나태한 시간을 훼방 놓지 말라고.
나는 손을 내저으며 로위나의 호의를 적극적으로 거절했다.
“아니, 전 됐어요.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만 신경 써 주셔도 충분해요.”
“어째서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왜냐하면 전, 그, 뭐랄까.”
“귀찮으신가요?”
“그래요! ……네?”
“실은 전하께서 공녀님이라면 분명 그리 반응하실 거라 말씀하셨거든요.”
알면 이런 귀찮은 일 벌이지 마!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녀께서는 분명 몸에 맞기만 하면 아무 드레스나 입고 올 게 분명하니, 특별히 더욱 세심하고 꼼꼼하게 챙겨 드리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하. 아하하.”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하하. 카이사르 이 녀석. 아하하하.
진짜 죽여 버리겠어.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한없이 무료하고 나태하게 보낼 예정이었던 미래의 내 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자, 그럼 일단 의상부터 시작할까요? 옆방에 미리 선별해 온 드레스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 최소한 다섯 벌 정도는 정해졌으면 좋겠군요.”
로위나가 안경을 벗으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꽤나 의욕적이다.
아아, 의욕이라니. 나에게는 없는 것이며,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