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17/156)

* * *

즉위식 파티 하루 전, 우리는 수도에 입성했다.

수도에도 공작가 소유의 별저(別邸)가 있어, 우리는 파티가 있는 날로부터 며칠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즉위식은 나와 어머니가 참여하기로 했다. 너희는 그 전에 본저로 돌아가도 좋아.”

서재에 앉아 아버지의 설명을 듣던 나와 레너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보통이겠지. 나와 레너드는 아직 미성년자이니, 아무리 카이사르와 친분이 있다 해도 즉위식까지 참여하는 건 무리다.

“오늘은 파티 전날이니 저택에서 여독을 풀며 마음을 차분히 하는 것이 좋겠구나.”

“아버지, 내일 함께 가시나요?”

열중쉬어 자세로 선 레너드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낮 동안 다른 일이 있다. 아마 파티에도 오래 있지 못할 것 같구나.”

낮 동안의 다른 일이라는 건 사교 모임 순회인가.

귀족들에게 사교 모임은 중요하다. 언뜻 모여서 하하호호 수다 떨며 노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파벌이 생기고 알력이 생기며 정보가 오가니까.

‘그래서 더 귀찮기도 하고.’

아마 이번 파티 역시, 나와 레너드에게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오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페레스카는 구귀족인 데다 정치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어쨌든 공작가는 공작가이니까 말이야.’

그런 가문 내 두 자녀의 사교계 데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대체로 내 귀찮음 탓에– 우리 남매를 자신들의 파벌에 넣고자 하는 무리가 많이 있겠지.

“너희는 이번이 첫 파티이니, 되도록 적게 말하고 많이 듣도록 해라. 노는 자리가 아니라 배우는 자리라 생각해야 돼.”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나와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버지의 뜻을 받자와, 나는 구석 자리에 숨어 멍이나 때리다가 와야겠다. 어차피 파티 같은 거,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해 봤으니까.

“그래. 그러면 그만 가서 쉬어라.”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좋은 밤 되십시오, 아버지.”

우린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후 서재를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레너드는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걱정돼.”

“왜?”

“에버그린 씨가 골라 준 옷 말이야. 아직 너무 불편하고 어색해.”

나는 레너드가 입을 새 정장을 떠올렸다.

녹색 기조의 제복풍 의상으로, 어깨에는 붉은 술이, 장갑에는 루비 버튼이 달려 있었다.

“음, 좀 화려하긴 하지.”

“네가 생각하기도 그렇지?”

“수도에서는 그런 옷이 인기라잖아. 뭐,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야?”

“그럼. 내가 언제 빈말한 적 있어? 걱정하지 마. 오라버니는 얼굴이 정답이라 괜찮아.”

농담 아니다.

원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너드는 알몸이어도 완벽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에버그린 씨 덕분에 준비는 수월했네. 그렇지?”

“응, 그러게. 내일 카이사르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자.”

“응, 그래.”

로위나는 실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우리 두 사람은 로위나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됐다.

레너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과연 내일 전하와 만날 틈이 있긴 할까?”

“왜?”

“정치계 인사들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바쁘실 것 같아서 말이야.”

이상하군. 내가 황제 즉위할 땐 내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 내가 형제들을 숙청한 직후라 무서워서 다가오지 않은 건가?’

하긴, 그랬지.

나는 정상적인 루트로 황제 자리에 앉은 게 아니었으니까.

‘아닌가. 먼저 다가온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나.’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떠올랐다.

그래, 한 명 있었구나.

전생을 통틀어 나의 하나뿐인 친우, 에레즈 그레이 공작.

그때, 춤추지 않겠느냐는 그의 제안이 기뻤었다. 불편한 공기에 슬슬 무안해지던 참이었으니까.

다만 그의 발을 여러 차례 밟았던 건 참 유감이지만.

‘그 후 에레즈에게 춤을 배웠지. 참 그리운 시절이야.’

그 시절엔 그런 일로 가슴 뛰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누가 내게 춤을 권유하면 난 분명 귀찮아하겠지.

“카이사르를 못 만날 거면 이 먼 수도까지 온 이유가 대체 뭐야?”

내 가벼운 투덜거림에, 레너드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만나고 싶은 거야, 전하를?”

“당연하지. 귀찮은 걸 무릅쓰고 왔는데 못 만나고 가면 억울하잖아.”

“그래? 그것뿐이야?”

“그것뿐이 아니면, 뭐?”

내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레너드가 두어 걸음 더 나아가서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늦은 밤, 달빛이 레너드 위로 쏟아졌다. 시야가 희뿌옇게 변해서 나는 그가 다 자란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착각했다.

“뭐, 그것뿐이라면 됐고.”

레너드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

“헬레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지?”

“당연하지. 내 오라버니가 최고야.”

난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여태까지 레너드만큼 착하고, 착한데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는 본 적이 없다.

내 말에 레너드가 천사처럼 웃었다. 아, 마음이 정화되는구나.

“가자. 방까지 데려다줄게.”

레너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기쁘게 레너드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파티가 시작되었다.

5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파티의 법칙이 있다. 미인이거나, 권력자이거나, 호사가인 사람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녀, 저희 낭독 모임에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이번 저희 가문에서 시작하는 사업에 공작님의 투자를 꼭…….”

“식전에 파티를 하는 선례가 없었습니다만, 혹 그 이유에 대해 들으신 건 없으신지요?”

“지난번 검투 대회, 잘 보았습니다. 공자, 혹시 기사에 관심 있으시다면…….”

미인이며 권력가인 나와 레너드의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있다, 이 말씀이다.

아, 진짜.

귀찮아 죽겠네.

“좋은 분들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그러나 이것도 정치라면 정치. 귀찮은 티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얼굴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을 상대했다.

‘레너드는 꽤 잘하고 있네. 체질인가.’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레너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또래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난감한 듯 웃고 있으면서도,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꽤 능숙했다.

‘어쨌든 나도 이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슬슬 빠져도 되겠지.’

눈도장 찍고 인사 나눌 사람은 대강 다 한 것 같다.

나는 아직 내 주변에 남아 있는 이들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며 양해를 구했다.

“좋은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영애?”

“부끄럽게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되어서요. 잠시 쉬고 싶네요.”

그러니까 이제 저리들 가라. 훠이, 훠이.

그러나 내 말에, 젊은 영식들의 눈빛이 오히려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큰일이군요. 제가 휴게실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뭔가 마실 걸 가져다 드릴까요?”

“네? 아, 아니, 잠깐만.”

흩어지기는커녕 영식들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내게 몰려들었다.

‘어쩌지? 난감하네.’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감사합니다만, 에스코트는 제가 하겠습니다.”

“오라버니……!”

레너드가 내 곁에 다가와 달려들던 영식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레너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으나, 주변 영식들은 천적을 만난 동물들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리를 옮길까?”

“응, 사람 없는 곳으로.”

우리는 아쉬워하는 젊은 영식, 영애들을 물리치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휴게용으로 마련된 곳으로, 방에는 카우치와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으아, 살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마워, 오라버니. 딱 도망치고 싶었던 참이었거든.”

“응, 그래 보였어.”

레너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아, 피로가 가시는 얼굴이로구나. 역시 내 오라버니가 최고야.

“집적대던 놈은 없었지?”

“뭐 딱히…….”

그보다, 레너드도 ‘놈’이라는 단어를 쓰는구나.

누구에게 배운 걸까. 공작저에 그런 단어 쓰는 사람은…….

……엇, 난가?

“혹시라도 집적대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내가 다 처리해 줄게.”

레너드가 천사처럼 웃으며 말했다.

처리라니. 사망에 이르게 하겠다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가서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며 레너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에 나가면 분명 다시 붙잡혀서 못 돌아올 줄 알면서도,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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