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18/156)

* * *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실례합니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영애?”

몇 명의 여자애들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중 나에게 말을 건 이는 금발의 영애다.

불안하군. 이렇게 몰려다니는 애들은 대체로 질이 안 좋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라버니를 찾으시는 거라면 홀에 나가 계십니다만.”

“아뇨, 영애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답니다.”

끈질기네. 날 좀 쉬게 해 달라고.

“페레스카 공녀이시죠? 전 율리카 브란테라고 합니다.”

브란테는 황비 가문인 발레르 공작가의 방계다.

카이사르와 사이가 좋을 리 없을 가문인데, 용케 여길 왔군.

“무슨 용건이시죠?”

“황자 전하와 친하시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영애들이 서로 쳐다보며 한 차례 까르르 웃었다.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분위기여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머, 실례했어요. 어떤 사람이 그런 소문을 냈을까 했는데, 당사자에게 들을 줄 몰랐거든요.”

율리카가 들고 있던 음료 잔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전하의 존안 몇 번 뵈고, 말 몇 번 섞어 본 걸로 친분을 과시하는 귀족들이 가끔 있거든요.”

……오호라.

얘들, 지금 나 엿 먹이려고 모여든 거 맞지?

“그런 분들도 계시나 보네요.”

“네. 어머, 물론 공녀께서 그런 분이실 리 없겠지만요.”

“그리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요. 시골 분들은 다 순박하시잖아요? 그렇죠, 여러분?”

“그럼요, 영애. 공녀께서는 참으로 순진하신 분 같습니다.”

“그러게요. 아무것도 모르시는 게, 눈처럼 새하얀 분이셔요.”

다시 한 차례 까르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페레스카 공작가는 현재 권력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이런 녀석들이 날 시골 촌년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일단 웃었다.

뭐 어떠랴. 음료에 독을 타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귀엽지, 뭐.

기고만장해진 율리카가 내게 좀 더 다가왔다.

“그런데 공녀, 이건 공녀가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인데요.”

“뭐죠? 기꺼이 듣겠습니다.”

율리카가 내 귀에 속삭였다.

“주제 파악을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소문 퍼뜨리는 주제에 이렇게 촌스러운 드레스라니, 전하께 누가 되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빙긋 웃는다.

자신의 말이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고 자부하는 듯한 미소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나, 이런 실례를!”

율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드레스에 음료수를 쏟았다. 누가 봐도 일부러였다.

그러나 율리카는 실수라는 양,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좋아! 손이 미끄러졌지 뭐예요! 세상에,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푸른색 치맛자락 위에 붉은색 물이 선명하게 들었다.

“마침 제가 여분의 드레스를 가져왔답니다. 제 드레스를 빌려 드릴 테니, 저와 함께 가요, 공녀.”

“그래요. 브란테 영애의 호의를 받으세요, 공녀.”

‘호의는 무슨.’

내가 이런 일 처음일 것 같나?

분명 그 여분의 드레스는 형편없을 거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화를 내면, 내가 속 좁은 사람이 된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네.’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율리카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영애. 그보다 영애의 손이 젖었어요. 어서 닦으심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율리카의 손에서 아직 음료가 남아 있는 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대놓고 율리카의 얼굴에 음료를 끼얹었다.

“꺄악!”

율리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얼굴에서 붉은 음료가 뚝뚝 떨어졌다.

“브란테 영애!”

“이게 무슨 짓인가요, 공녀!”

다른 영애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음료 잔을 거꾸로 들고 흔들며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내 시선에 영애들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어머, 이런 실례를. 손이 미끄러졌네요. 물론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겠죠? 실수에 너그러운 여러분들이니.”

“그, 그건……!”

“그 여분의 드레스는 브란테 영애께서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참 다행이군요, 여분이 있어서.”

나는 율리카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율리카가 음료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서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참, 잊을 뻔했네. 제 드레스에 대한 조언, 감사해요. 전하께 영애의 고견을 꼭 전해 드릴게요. 전하께서 골라 주신 드레스거든요.”

정확히는 카이사르의 부하인 로위나가 골라 준 거지만.

“……네?”

“충고에 감사하며 저도 한 말씀 드리자면, 브란테 영애.”

나는 동공 지진이 일어난 율리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주제 파악을 하세요. 나쁜 짓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거예요.”

“으, 무, 무슨 그런 무례한……!”

“그러면 버빙카 영애, 헥터 영애, 룸비아 영애.”

나는 율리카를 따라온 영애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말했다.

소개도 안 했는데 내가 그들의 성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르자 영애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페레스카 공작가에 베푸신 배려, 언젠가 여러분들의 가문에 보답하도록 기억해 두겠습니다.”

내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분간 자신들의 철없는 행동에 가문이 피해를 입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겠지. 생각만 해도 귀엽군. ……음, 나 너무 변태 같나?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꼭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율리카 브란테 영애.”

내가 봄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영애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전멸해 버렸지만.

* * *

“아, 짜증 나. 안 지워지네.”

다른 빈방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드레스의 얼룩을 지워 보려 애썼다. 그러나 얼룩은 도무지 지워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뭐, 됐어. 이 핑계로 홀엔 안 나가도 되겠지.”

나는 다 포기하고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나저나 브란테 영애……, 대체 무슨 꿍꿍이였을까.”

브란테는 발레르 공작가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만큼 그 권위가 상당하다. 더구나 변경백이면서도 정치에 발을 꽤 깊이 담그고 있었다.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페레스카와 달리 실세인 셈이다.

하지만 그게 공작가에 괜히 시비를 걸 이유는 못 될 텐데.

“흐음, 설마 카이사르를 좋아해서 나를 질투한 건가?”

그런 거라면 좀 귀엽네. 질투를 표출하는 방법은 안 귀여웠지만.

그때, 연회장 쪽에서 문지기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사르 윈터 그레이 황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아……, 드디어 주인공 입장인가.

“수도까지 와서 못 만나고 가게 됐네. ……하긴, 옷이 안 이랬어도 만나기는 어려웠겠지만.”

허탈한 기분에 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은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드레스……, 촌스러운 건가?”

나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데 안목이 있어야 알지.”

전생에도 옷이나 장신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황제가 되기 전엔 거리나 싸움터에서 뒹굴었고, 황제가 된 후에도 갑옷을 입는 날이 더 많았다.

“……집에 가서 자고 싶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여니, 차가운 겨울의 밤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황성의 실루엣이 검게 보였다.

“어쩐지 그립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피식 자조했다.

황성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좋았던 추억이 하나도 없으니까.

“아하하. 그립다니, 나도 참 이상한 소리를.”

괜히 민망해져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 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나보다 먼저 창문을 닫았다.

“……?”

누구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는 달깍하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등 뒤에 서 있던 것은, 한없이 따듯한 붉은 눈의 남자.

“카이사르? 어떻게 여기……?”

얘 지금 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보다 좀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창문을 등진 채 카이사르의 팔에 갇혀 있으니 좁고 불편하다.

“스승님이 안 보여서 물어보니, 여기 있다고 하길래.”

“아, 옷이 더러워져서.”

“그래? 난 또 귀찮아서 피해 있는 줄 알았어.”

“그것도 있고.”

“아하하, 헬레나다워.”

카이사르가 웃었다. 몸은 다 큰 주제에 웃는 모습만 여전히 소년 같다.

“너야말로 파티의 주인공이 지금 여기 있어도 돼?”

“괜찮아. 인사말은 하고 왔어.”

“그래도 다들 너 찾을 텐데.”

“응, 금방 나가 보긴 해야지.”

카이사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피곤해 보이네.’

나는 어느새 나보다 훌쩍 커 버린 카이사르를 올려다봤다. 즉위식이며 파티며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쁘긴 했겠지.

“……건방지게 나보다 키도 커져서는.”

괜히 심술이 나서 투덜거렸더니, 카이사르가 소리 내 웃었다.

“키는 원래 너보다 컸거든.”

“이렇게 올려다볼 정도는 아니었잖아.”

“아, 그래. 제자를 올려다보는 게 불쾌하시다 이거로군.”

그러더니 카이사르가 몸을 숙였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같아졌다.

“이러면 됐지?”

“이, 이건 너무 가까워.”

“뭐 어쩌라는 거야. 무릎이라도 꿇어?”

“아, 그거 좋다.”

“뭐?”

“꿇어. 난 내려다보는 게 더 좋아.”

“못 살겠네, 진짜.”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이사르는 순순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멋들어지게 입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만족하십니까, 스승님?”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기겁하겠지.

“딱 좋아.”

만족한 내가 씩 웃으며, 한 손으로 카이사르의 눈을 가렸다.

눈을 마주친 채로는 민망함에 차마 이 말을 못 할 것 같아서.

“열여덟 번째 생일 축하해, 카이사르.”

나는 부끄러움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카이사르는 대답이 없었다.

고장 난 것처럼, 미동도 없다.

“뭐, 뭐든 말 좀 해. 창피해 죽겠으니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재촉에 카이사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사르가 웃었다.

다행이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미소에 나는 안도했다.

“고마워. 실은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널 찾은 거거든.”

“홀에 나가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 들은 걸로 충분해.”

카이사르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왜냐하면 나는 헬레나를 위해서 태어난 걸 테니까.”

어쩐지 그 떨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져, 나는 가만히 그를 안아 주었다.

나를 위하여 태어난, 고집 세고 외로움 많이 타는 나의 제자를.

내가 있는 이 세계에 태어나 줘서 고마워, 카이사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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