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파티가 끝난 다음 날부터 사흘 정도, 자유 시간이 생겼다.
아침 티타임, 레너드는 평소보다 조금 들뜬 얼굴로 내게 물었다.
“사흘 동안 뭐 하고 싶어, 헬레나?”
“집에서 잘래.”
“그렇구나. 예상은 했지만.”
“그러는 오라버니는? 역시 아버지 어머니처럼 사교 모임 순회?”
어젯밤 파티 때, 레너드는 많은 영애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아마 사교 모임 초대도 잔뜩 받았겠지.
하지만 레너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은 전부터 수도에 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
“그래? 뭔데?”
“기사단 견학.”
세상에, 이런 모범생을 봤나.
‘많은 영애들이 울겠군.’
나는 눈에서 하트가 뿅뿅 발사되던 뭇 영애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셨다.
미안하다, 영애들아. 우리 귀여운 오라버니가 아직 여자를 잘 몰라.
‘부모님도 바쁘시고, 레너드도 나가고 나면 저택이 텅 비겠어.’
신난다.
방해받지 않고 잠이나 실컷 자야지.
* * *
부모님에 이어 레너드까지 저택을 빠져나가고 얼마 후.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그것이, 직접 뵙고 인사드리겠다고…….”
슬슬 잠이나 자 볼까 하던 참인데, 타이밍 참 안 좋네.
“부모님 모두 외출 중이시라고 전해.”
“아뇨, 아가씨를 뵈러 왔다는데요.”
“나를?”
음, 누구지?
‘설마 브란테 영애인가? 어제에 이어 2차전이라도 하려고?’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 영애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일단 응접실로 모셔. 곧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옷매무새만 다시 매만진 후에 응접실로 향했다.
정말 손님이 율리카 브란테이고, 또 내게 시비를 걸기 위해 온 거라면, 이번엔 얼굴에 케이크를 던져 줄 생각이다.
그러나 손님은 율리카보다도 더 뜻밖의 인물이었다.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응접실 소파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니, 즉위식 때문에 한창 바빠야 할 애가 왜 여기 있어?
“안녕, 스승님. 놀러 왔어.”
카이사르가 능글맞게 씩 웃었다. 붉은색 눈이 휘면서 어쩐지 악당처럼 보였다.
“놀러 왔다니, 왜 이렇게 한가해?”
“한가하다니, 실례네. 요 며칠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쁜 사람에게.”
“그러면 가서 잠이나 자!”
“그럴까? 그럼 네 방에서 재워 줘.”
“나가.”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정색하자 카이사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 웃을 기분 아니거든. 이 덩치만 자란 어린애 같으니라고!
“실은 레너드가 오늘 기사단 견학을 하러 갔다는 얘길 해밀턴에게 들었거든.”
“그래서?”
“그러면 헬레나는 혼자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야.”
“방해하러 온 거야?”
“그럴지도?”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아, 귀찮아. 잠이나 자야지’ 하고 게으름 부리고 있을 것 같아서 데리고 나가려고.”
“잘 알고 있구나. 그 이유로 네 제안은 사양할게. 그럼 잘 가, 카이사르.”
나는 빠른 속도로 작별 인사를 전한 후, 그 자리에서 몸을 팩 돌렸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성큼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도망치는 거야?”
“당연하지!”
돌아다녀 봐야 지치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뭘 해도 재미없고 시시할 뿐이라고.
그러나 단호했던 내 마음은, 카이사르의 다음 말에 흔들리고 말았다.
“생일 선물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놀아 주면 안 돼?”
“윽……!”
그렇다.
나는 카이사르의 파티에 초대 받아놓고선 정작 선물을 안 줬다.
물론 페레스카가에서 보낸 선물이 있긴 했지만.
“원하는 게 뭔데? 뭔가 주면 될 거 아냐. 물질로.”
“물질이라. 그러면 해변 도시에 별장 한 채 지어 줘.”
가능할 것 같냐!
“자, 어떻게 할래? 나랑 나갈래, 별장 지어 줄래?”
“……나쁜 놈아!”
나는 억울함에 비명을 내질렀다.
* * *
시종 몇 명이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카이사르가 그들을 물렸다.
카이사르 역시 공작저에 올 때부터 시종 없이 찾아온 터라, 오롯이 우리 두 사람만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그나저나 곧 황태자가 될 사람이 혼자 다녀도 되는 건가. 너무 태평해서 걱정된다.
“헬레나, 구경하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없지?”
“없어.”
“예상을 저버리지 않네.”
“알면 묻지 마.”
“그럼 내 마음대로 할게.”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생일 선물 대신이라니까, 오늘 하루는 지지든 볶든 네 마음대로 하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카이사르는 내 손을 잡았다.
“자, 그럼 시작은 저 가게부터.”
“잠깐. 손은 왜 잡는데?”
“헬레나가 중간에 귀찮다고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걱정 마.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겠어?”
“믿을 수 없는걸. 옛날에 축제에 갔을 때도 혼자 멋대로 사라져서 사람 놀라게 만들었잖아.”
“으음…….”
할 말이 없군.
결국 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놓을 구실을 찾지 못했다.
‘이상하네. 레너드랑은 손도 잘만 잡는데, 카이사르는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에이, 모르겠다.
‘기분 좋아 보이니까 놔두자. 생일 선물 대신이니까.’
나는 어린애처럼 들뜬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체념했다.
카이사르는 나를 데리고 정말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다. 유명한 가게를 미리 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더구나 가는 가게마다 무언가를 꼭 하나씩 사 들고 나왔는데…….
“……잠깐, 카이사르.”
“왜?”
“어쩐지 쇼핑하는 물건들이 전부 다 내 물건밖에 없는 것 같다?”
내 모자. 내 머리핀. 내 향수. 내 책갈피. 내 펜. 나 맛보라고 산 와플. 레몬파이. 구운 밤…….
“내 생일 아니거든?”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됐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헬레나에게 사 주는 게 더 즐거우니까 그렇지.”
“그래도 네 생일 선물로 나온 거잖아? 네 물건을 좀 더 사라고!”
“난 뭐든 장인들이 만드는 것만 쓰니까 필요 없어.”
“우와, 재수 없는 자식……!”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을 했더니, 카이사르가 정말 호쾌하게 웃어 댔다.
가끔 보면 이 녀석은 나에게 욕 듣는 걸 제일 즐거워하는 것 같단 말이야.
“정말 사고 싶은 거 없어? 별장 같은 거 말고 말이야.”
“으음, 그러네. 헬레나를 사 가고 싶은데. 살 수만 있다면.”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 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옛날엔 놀리는 내 말에 금세 발끈해서는 버럭버럭 화만 내던 녀석이었는데.
‘황성이 터가 안 좋나.’
클수록 생긴 것만 번드레하지, 성격은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
“어쨌든 이제 그만 살래. 계속 걸어 다녔더니 힘들……, 에취!”
추위 탓인지 재채기가 나왔다.
카이사르가 깜짝 놀라더니, 재빠르게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나에게 둘러 주었다.
“괜찮아. 필요 없어.”
“잔말 말고 입어. 네가 감기에 걸리면 내가 레너드에게 미움을 살 거야.”
그렇게 말하며 카이사르가 망토의 매무새를 꼼꼼하게 만져 주었다.
기분이 이상하군. 분명 카이사르는 내 제자인데, 이래서는 영락없이 내가 돌봄 받는 것 같잖아.
“어디 들어가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카이사르의 망토……, 너무 커.’
상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커다란 포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아 우스꽝스러웠다.
‘카이사르의 몸이 이렇게 컸던가.’
하여튼 남자애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카이사르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가로질러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