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찻집에 들어섰을 땐 거리에 희미한 어둠이 퍼져 갈 무렵이었다.
나는 따뜻한 레몬 차를, 카이사르는 홍차를 주문했다. 함께 나온 타르트도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헬레나, 어제 파티는 어땠어?”
“몰라. 초반에 잠깐 빼고는 내내 방에서 쉬고 있었으니까.”
“심각하군. 누구 사귄 사람도 없고?”
“으음, 딱히?”
“집적대는 영식들은 없었어?”
“별로.”
음, 마지막 질문을 할 때 카이사르의 눈빛에 묘하게 살기가 감돌았던 건 내 착각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브란테 영애랑은 좀 친해졌을지도…….”
“……브란테 변경백 말이야?”
“응. 친해졌다고 해야 할지……. 뭐, 여자들의 우정이라는 거야.”
내가 자조하며 말했다.
사실 여자들 사이에서의 질투와 치정은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나름 신선하긴 했다.
파들파들 떨던 율리카의 모습이 너무 하찮아 보여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고.
“흐응, 브란테 말이지.”
카이사르가 턱을 괴고 창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묘하게 어두웠다.
‘하긴, 브란테는 황비 측 가문일 테니까.’
내가 참 눈치도 없이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다.
생일 선물 대신으로 놀러 나온 자리인데, 이래선 안 되지.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소재가 필요하다.
“아, 맞다. 이거 줄게.”
나는 가방을 뒤져 선물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카이사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그것을 한참 쳐다보았다.
“뭐야, 이거?”
“실은 파티 때 주려고 했는데, 너무 소소해서 못 꺼내겠더라. 지금 줄게.”
“……내 거야?”
“그럼 누구 거겠어?”
뭘 저렇게 놀라는 거야.
내가 진짜 선물도 안 챙겨 주는 쪼잔한 사람인 줄 알았던 건가.
“열어 봐도 돼?”
“진짜 소소하니까 기대하지는 말고.”
카이사르가 포장을 뜯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손이 멈췄다.
선물은 내가 직접 뜬 목도리였다.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지라, 아고트에게 뜨개질을 가르쳐 주며 떴던 목도리를 가져온 것이다.
“……맘에 안 들어?”
카이사르가 한참 동안 반응이 없어서 자신이 없어진 내가 소심하게 물어보았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헬레나, 너 뜨개질 진짜 못한다.”
“야, 씨. 내놔.”
“아하하하.”
내가 빼앗으려고 손을 뻗어 허우적대자, 카이사르가 목도리를 재빨리 제 목에 둘렀다.
“이거 내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거짓말. 파티에서 온갖 금은보화를 다 받았을 거면서.”
“금은보화는 나를 위한 선물이 아니잖아. 황가를 위한 선물이지.”
카이사르가 행복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헬레나의 선물은 오로지 날 위한 거니까. 이게 훨씬 더 좋아.”
그와 오래 알고 지내 왔기 때문에 안다.
저 표정은, 진심이다.
“최고의 선물이야, 헬레나. 정말 고마워.”
그 정도로 좋나. 취향 독특하네.
“카이사르가 뜨개 목도리를 그 정도로 좋아하는 줄 미처 몰랐어.”
“푸하!”
카이사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맞아. 좋아해. 진짜 좋아해.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눈빛은 굉장히 다정하고 달콤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뜨개 목도리에 목숨까지 걸지는 마.”
내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그렇게 말했더니, 카이사르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클수록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녀석이라니까.
* * *
우리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마차의 창 너머로 지나가는 야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시골인 공작령과 달리 확실히 수도의 밤은 불야성을 방불케 했다.
‘아름답네.’
500년 전, 나는 이 도시에서 수도 없이 많은 밤을 맞이했었다.
그런데도 오늘 밤이 특별히 더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아, 저택이 보인다. 카이사르, 곧 도착……, 카이사르? 자는 거야?”
조용하다 싶더니, 카이사르가 잠들어 있었다.
하긴, 파티며 즉위식 준비며 바쁘지 않았을 리 없다. 어제 파티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 시도 쉴 틈이 없어 보였으니까.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대체 얼마나 피곤했던 거람.’
날 만나러 올 게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카이사르. 카이사르, 일어나. 저택에 다 왔어.”
나는 카이사르 옆자리에 앉아 그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으음…….”
“으앗!”
카이사르의 몸이 마차의 흔들림에 휘청이더니, 내 쪽으로 쓰러졌다. 나는 카이사르가 쓰러지지 않도록 재빨리 그를 품에 안았다.
“카이사르, 일어나라니까?”
“으응, 무슨……, 헉!”
잠이 덜 깬 듯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바르작거리던 카이사르가, 문득 상황 파악을 했는지 고개를 휙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마차가 돌부리에 걸려 크게 휘청였다.
“으아악!”
“꺄악!”
쿠웅.
카이사르와 내가 동시에 의자 위로 쓰러졌다. 뭐, 이 정도 사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괜찮다.
문제는 넘어지면서 우리 둘의 입술이 부딪쳤다는 거다.
‘닿았다’는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다.
앞니가 깨질 듯한 기세로 부딪쳤다.
“아으, 아파……!”
“더헉……!”
나는 양손으로 입술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카이사르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가리고 아예 마차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카이사르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선 소리쳤다.
“이건 무효야!”
뭐가 무효라는 거야.
“무효라고!”
카이사르의 한 맺힌 절규가 마차 밖까지 퍼져 나갔다.
* * *
나는 아랫입술에 상처를 얻었다.
그날 저녁, 레너드가 매의 눈으로 그 상처를 확인했다.
“입술 왜 그래? 왜 그렇게 부었어?”
“응? 아, 마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부딪……, 깨물었어.”
대답해 놓고선 나 스스로 당황했다.
뭐야, 나. 지금 거짓말하는 건가? 도대체 왜?
“피곤해. 그만 가서 잘래.”
레너드가 기사단을 견학한 일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왜인지 마차에서의 상황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 없었다.
‘미쳤나 봐. 이건 사고야, 사고.’
그런데 왜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리지?
[이건 무효야!]
‘무효라니. 나쁜 놈. 나랑 입술 부딪친 게 그렇게 기분 나빠?’
손등으로 입술을 북북 닦으며, 나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