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본저로 돌아가기 이틀 전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빨리 눈이 그치지 않으면 귀가 일정에 차질이 생길 듯했다.
물론 어디에서든 뒹굴거리는 일정밖에 없는 나로서는 좀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카이사르와 해밀턴이 내 휴식을 방해하며 저택에 쳐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들어 보세요, 공녀. 글쎄 제가 전하께 정오부터 즉위식 연습이 있다고 신신당부했는데도, 오전 내내 검 훈련을 하시다가 땀에 흠뻑 젖어 나타나셨단 말입니다.”
저택의 응접실, 해밀턴이 혈압을 올리며 내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해밀턴 옆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카이사르가 투덜댔다.
“뭐 어때? 어차피 연습인데, 땀범벅이어도 상관없잖아.”
“상관없긴요! 의복 시착을 해야 하는데, 그런 꼴로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공녀?”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빙긋 웃으며 차만 홀짝거렸다.
이것들이 왜 아침부터 찾아와서 상관없는 날 붙잡고 이 난리야. 돌아가. 제발 돌아가라고.
‘이럴 때 하필 레너드가 없다니!’
말 많은 해밀턴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건 우리 셋 중 레너드가 유일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오늘도 기사단장을 만나러 갔다. 지난번 견학 때 단장의 눈에 들었는지, 아예 집으로 초대를 받았단다.
‘오라버니! 나 좀 살려 줘!’
닿지 않을 텔레파시만 있는 힘껏 보내 본다.
“하여튼 전하 때문에 속상해 죽겠습니다. 공녀께서 한마디 해 주세요.”
“네? 아니, 제가 왜?”
“그래도 전하께서 공녀의 말씀은 들으시잖아요.”
아닌데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요즘 저도 저 능구렁이 놈에게 걸핏하면 휘둘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음. 갑자기 해밀턴에게 공감대가 확 생기는군.
“카이사르가 나빴네.”
“뭐?”
카이사르가 하나뿐인 아군을 잃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음, 뭔진 모르겠지만 카이사르가 나빴을 거야, 분명.”
“그게 무슨 억지야!”
“아아, 역시 공녀께서는 제 노고를 알아주시는군요!”
해밀턴은 감격에 겨워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고생 많으시네요, 자작님.”
“흐윽, 말도 마십시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말렸어? 때려치우고 싶으면 때려치우면 되잖아?”
“이것 보십시오. 절 이렇게 홀대하신다니까요? 며칠 전에도 절 떼어 놓고 사라지시더니, 어디서 맞고 들어왔는지 입술이 퉁퉁 부어 오셔서는…….”
“으아아아, 조용히 해! 그만 말해!”
“말하지 마요! 그 얘기 하지 마!”
해밀턴의 말을 막기 위해 나와 카이사르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사르의 온몸이 당근처럼 빨개졌다. 모르긴 몰라도 나도 저런 꼴이겠지.
“네? 아니, 두 분 다 왜 그러십니까?”
해밀턴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엇, 그러고 보니 공녀께서도 아랫입술에 상처가…….”
“말하지 말라고!”
“다른 얘기 해요, 제발!”
간신히 잊어버리고 있는데, 그날 일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지 마!
격하게 반응하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에 해밀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수상하다는 듯 우리 둘을 몇 번이고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두 분…….”
“아니거든?”
“아니에요!”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낭패다.
민망함 탓에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해밀턴이 그날의 ‘사고’를 눈치채고 말 것이다.
‘이 입 가벼운 인간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귀찮은 일이 잔뜩 뒤따라올 게 분명하다! 그런 건 싫어!
나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참, 자작님. 책에 관심 많으시죠? 이 저택에 발론 수도원의 필경사들이 쓴 바이블이 있는 거 아세요?”
“네? 수려한 필체로 이름 높은 발론 수도원의 필경사 말입니까? 아니, 그거 엄청 비쌀 텐데!”
“당연하죠. 혹시 궁금하시면 제가 잠깐 보여 드릴 수 있는데.”
“아니, 그런! 가문의 영광입니다!”
해밀턴이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낚였구나. 해밀턴이 단순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그러면 저와 잠시…….”
“엇, 나도 갈래.”
나와 해밀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이사르도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런 카이사르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냐, 나랑 자작님만 다녀올 거야.”
“뭐? 왜 난 안 되는데?”
카이사르가 심통 난 표정으로 물었다.
어휴, 저 바보가. 해밀턴의 관심을 간신히 다른 곳으로 돌렸는데, 입술 박치기의 장본인이 따라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전하, 공녀 말씀대로 기다리시는 게 낫겠습니다. 여러 명이 소란을 피우면 값비싼 장서가 상합니다.”
다행히 해밀턴이 단호하게 카이사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책으로 가득 차서, ‘입술’에 대한 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카이사르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결국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래. 마음대로 해.”
오, 어쩐 일로 순순하네.
“자, 그럼 가실까요?”
우리는 카이사르를 응접실에 남겨 두고 방을 나섰다.
* * *
예의 장서는 유리로 된 상자에 밀랍으로 봉하여 보관되어 있었다.
장서를 쳐다보는 해밀턴의 눈에서는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책이랑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다.
나는 해밀턴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근처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점점 지루해져서, 방해될 줄 알면서도 해밀턴에게 넌지시 대화를 청했다.
“즉위식 준비로 바쁠 텐데 이렇게 나와 계셔도 되는 건가요?”
다행히 해밀턴은 불쾌한 기색 없이 내 대화에 응해 주었다.
“안 되죠, 원래는.”
“아하, 또 카이사르가 억지라도 부린 모양이군요.”
“사실 오늘은 제가 나서서 공녀께 하소연이라도 하겠다는 핑계로 나왔습니다.”
“네? 자작님께서요?”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신경이 날카로워지셨길래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해밀턴이 의아해하는 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즉위식 파티를 왜 즉위식 후가 아니라 전에 했는지 아십니까?”
“생일 파티와 함께하려 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대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실제로는요?”
“빨리 해치우려 했다……, 가 정확한 표현이겠죠.”
즉위식을 서둘렀다. 그 때문에 신년이 아닌 겨울에 즉위식을 치르게 됐다. 즉위식 일정을 확정 짓기 위해 파티까지 먼저 치러 버렸다.
그렇게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황비가 곧 황후로 책봉되는군요.”
해밀턴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시선을 옆으로 흘깃 보냈다.
황비가 황후가 되면, 발레르가의 세력이 강해진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카이사르가 아닌 황비의 어린 아들을 황태자 자리에 앉히려 할 것이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 아버지께서 바쁘시다 했더니 설마…….’
정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데다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는 분이,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신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구나. 페레스카는 본격적으로 발레르와 척을 지고 카이사르 황태자의 편에 서기로 한 건가.
“공작령은 수도와 너무 멀어서 그런 소식을 알기가 어렵네요.”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공녀의 정보원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제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아니라 저 말인가요?”
농담도 참.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해밀턴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나를 미성년자로 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제게 그런 걸 알려 주시는 거죠?”
내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해밀턴은 대답을 찾듯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쓰게 웃었다.
“오늘은 그저 귀한 장서를 보여 주신 데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요.”
보답이 참 무겁고 부담스럽다.
모르는 척하면 될 테지만, 이제 나에게 카이사르가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