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해밀턴은 집사에게 부탁해 두고 나는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아, 참. 브란테 영애에 대해서도 물어볼걸.”
응접실에 다 도착해서야 문득 그 생각이 났다. 하지만 되돌아갔다간 더 귀찮은 일을 떠안게 될 것 같으니, 그만두자.
지금은 혼자 남겨져 화가 나 있을 카이사르를 상대해 주는 게 먼저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냐.”
카이사르는 소파에 누워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녀석이?
“……하긴, 내내 잠을 못 잤다고 했던가.”
나는 바닥에 앉아, 카이사르의 머리맡에 고개를 기대고 앉았다. 카이사르의 숨소리는 낮고 규칙적이었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넌 우리 집 아니면 잘 데 없어?”
이 제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곳에 살면서도, 이 작은 별저에 와서야 잠이 들 수 있는 삶.
내가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했다.
황제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너무나 크고 무서운 저주를 걸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미안함에 괜히 가슴이 저민다.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좀 해. 혼자 떠안고 아무 일 없는 척 웃지 말고. 내가 어리광 부려도 된댔지, 허세 부려도 된댔어?”
물론,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와 레너드에게 그런 일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느낄 죄책감도 좀 생각해 달란 말이야.
“으으…….”
내 속삭이는 소리가 거슬렸던 것일까. 카이사르가 쉰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바르작댔다.
“헬레나? 언제 왔어?”
카이사르가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내게 물었다.
“으음, 방금?”
나는 그저 웃었다. 해밀턴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그가 평소에 나와 레너드에게 하듯이, 그렇게.
“아, 깜빡 잤네. 깨우지 그랬어.”
“방금 카이사르 얼굴에 낙서하려다가 실패했어.”
“으윽, 네 앞에선 잠도 못 자겠다.”
“아냐, 농담이야. 그러지 마.”
내가 간절히 말했다.
“내 앞에서는 편하게 자도 돼. 낙서 안 할게.”
“뭐야, 그게.”
카이사르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지척의 거리에서 한참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언젠가 ‘기분 나쁜 인상’이라고 생각했던, 그 눈이다.
“……상처, 안 낫네.”
한참 만에 카이사르가 내 입술을 엄지로 훑어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야.”
“아파?”
“당연히 아프지.”
나는 미간을 슬쩍 찡그리며 투정하듯 말했다. 내 투정이 생소했는지 카이사르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방이 몹시 고요했다.
내 입술에 고정된 그의 눈동자 역시. 나는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한참 응시했다.
고요함이 지나쳐서 심장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다.
그의 호흡이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리고.
……으응?
“……어?”
입술이, 닿았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우린 방금 일어난 일에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어? 지금 뭔가 되게 자연스럽게 지나가 버렸는데?’
뭐 한 거냐고 물어야 하나?
그렇지만 물어볼 타이밍이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역시 그거지?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얼렁뚱땅 해 버리는 첫 키스, 그런 거?
그러나 이 잠깐의 충동을 실수로 만들지 않겠다는 듯, 카이사르가 내 뒷목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겨울의 온도에 손끝이 차가워, 난 가볍게 몸을 떨었다.
“키스해도 돼?”
카이사르가 스러질 듯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하기 전에 물었어야지.”
내 핀잔에, 카이사르가 나를 좀 더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또 하면 되지.”
카이사르의 간지러운 호흡이 내 온몸에 다시 스며들어 왔다. 이번에는 나도 그의 옷깃을 힘껏 움켜잡았다.
머릿속이 만화경처럼 다채롭고도 어지러웠다.
‘제자랑 이래도 괜찮은 건가.’
기묘한 배덕감이 몸을 감쌌다.
반면 끊임없는 변명이 날 설득한다. 첫 키스가 다 그렇지. 분위기에 휩쓸려 하는 거지. 세상 물정 모를 때 호기심에 한번 해 보는 거지.
얕은 호감만 있으면, 누구와도 저질러 버릴 수 있는 게 첫 키스라는 거지.
별것 아닌 일이다, 분명.
그에게도.
나에게도.
이윽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 눈 내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눈, 안 멈추면 좋겠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
눈이 계속 쌓였으면 좋겠다.
시간도 덮어 버릴 정도로, 끊임없이.
* * *
그날 밤, 눈이 그쳤다.
나와 레너드는 예정대로 수도를 떠날 수 있었다. 수도를 떠나던 날, 해밀턴과 로위나가 배웅을 와 주었다.
카이사르는 오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차창 너머로 새하얘진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레너드가 물었다.
“보고 싶지?”
“엉?”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삐끗해 버렸다. 흠칫하는 내 반응에 레너드가 뜻밖이라는 듯 쓰게 웃었다.
“아고트 말이야.”
“아……, 참. 그렇지.”
아고트는 시녀장의 허락을 얻지 못해 함께 수도에 오지 못했다.
본저를 떠나던 날, 내 옷깃을 쥐고 눈물을 꾹 참고 있던 게 떠올랐다.
“보고 싶네, 진짜.”
보고 싶다.
“하하, 이상하네. 정말 보고 싶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나는 대상 없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S1. 레너드 페레스카의 견학 기록
그날 적기사단장인 네르프 달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장 회의에서 다른 단장들에게 말투와 행동거지가 천박하다는 모욕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출로 작위를 받은 그를, 다른 단장들은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귀족들이 적기사단을 ‘잡동사니 집합’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빌어먹을 샌님들! 막상 맞붙으면 10초 안에 머리가 떨어질 것들이!”
“아이고, 단장님! 제발 말 좀 조심하시라니까요?”
“말투 지적하지 마!”
총무인 제럴드에게 버럭 화를 내며 단장실 문을 열자마자, 달튼은 뜻밖의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정갈한 옷차림과 뽀송한 얼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전형적인 샌님이 단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 달튼 경. 처음 뵙겠습니다. 녹트 자작님의 소개로 온 레너드 페레스카라고 합니다.”
레너드 페레스카라.
그제야 달튼은, 어제 해밀턴에게 술김에 들은 부탁을 떠올렸다.
한 귀족 자제가 기사단에 관심이 많은데, 견학 신청을 받아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
다른 기사단에서는 난색을 표하는지라, 어떻게든 달튼이 받아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날 술값과의 등가 교환으로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오호, 견학을 희망한다던 페레스카 공작가의 영식이시로군.”
“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페레스카는 무과 출신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쩌다가 검을?”
“아, 동생에게 검을 배우다 보니 흥미가 생겨서요.”
“응? 공자의 나이가……?”
“내년 봄에 열일곱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너드가 빙긋 웃었다. 그 천사 같은 표정에 달튼은 흥이 식었다.
해밀턴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기에 들어줬더니, 이런 핏덩어리를 보낼 줄은 몰랐다.
거기다 뭐? 동생에게 배워? 장난하나, 지금.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해서 쫓아내야겠군.’
기사단을 위해서도, 그리고 허튼 꿈을 꾸는 이 도련님을 위해서도 그게 제일이다.
“견학이라고 구경만 하면 섭섭하지. 혹시 오늘 하루 기사단 훈련에 동참해 볼 의향이 있소?”
“앗, 정말이십니까? 허락해 주신다면 기쁘게 동참하겠습니다!”
레너드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래, 지금 많이 기뻐해 둬라. 조만간 곡소리 내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울게 될 거다, 애송이.
“제럴드, 공자를 훈련소로 모시게. 오늘은 특별히 나도 참관해야겠군그래.”
달튼이 으흐흐 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말에 제럴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상사가 참관하는 것만큼 싫은 게 또 없는 법이다.
“자아, 그러면 우리 적기사단의 훈련 맛 좀 보실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