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3/156)

* * *

그날 훈련 코스는 다른 날에 비해 과하게 힘겨웠다.

단장 회의에서 무례를 당한 달튼이, 그 화풀이를 공작가의 애송이에게 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훈련장 100바퀴 돌기, 앉았다 일어나기 100회, 팔 굽혀 펴기 200회, 턱걸이 200회, 검 휘두르기 2000번…….”

달튼 곁에 선 제럴드가, 오늘의 특별 훈련 코스를 천천히 읽은 후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님, 이러다 우리 애들 죽겠는데요.”

“뭐, 괜찮아. 아마 훈련장 열 바퀴도 못 돌고 저 녀석이 먼저 나가떨어질 테니.”

팔짱을 끼고 굳건한 자세로 서서 훈련장을 바라보며, 달튼이 씩 웃었다.

“아니, 왜 착해 보이는 도련님을 괴롭히려 하십니까?”

“얼굴 허연 놈이 검 쥐겠다고 설치는 꼴이 재수 없잖아.”

“공작가의 미움을 사서 좋을 게 뭐 있다고요?”

“흥, 공작이라고 해 봐야 지금은 이름값밖에 더 남았나.”

달튼이 콧방귀를 뀌었다.

돈, 혹은 정치적 영향력.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힘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정치 일선에서 한 발 뒤에 서 있는 구귀족인 페레스카는 권력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날 수밖에.

“공자라. 나중에 질질 짜고 돌아가는 꼴을 보게 되면 꽤나 속이 시원할 것 같군.”

“하여간, 심보 못되셨습니다.”

제럴드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달튼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했다.

그러나 일은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훈련장을 다 돌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레너드가 쌩쌩하게 훈련을 소화해 냈던 것이다.

“뭐, 뭐야, 저 녀석?”

어라. 이게 아닌데?

“다, 단장님……, 못하겠습니다. 오늘 훈련 너무 힘듭……, 웨엑.”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저 이제 팔에 마비가 오는데요…….”

심지어 기존 기사들마저 백기를 드는데도, 오직 레너드만 독야청청했다.

이쯤 되니 달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희가 나가떨어지면 어떻게 해! 자존심도 없냐!”

“아니, 그렇지만……, 저 소년,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기사들은 이제 울먹울먹한 표정이 됐다.

‘대체 뭘 먹고 자란 거야, 저 자식?’

어이가 없다.

“공자……, 훈련은 어떻습니까.”

달튼은 슬쩍 레너드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자 레너드가 검을 멈추고 달튼을 돌아보았다.

“아, 네! 역시 기사단 훈련은 좀 버겁네요!”

레너드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버겁다는 인간의 표정이 아니다.

“기사단 분들은 매일 이런 훈련을 하는군요. 그간 저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부끄럽습니다.”

“아니……, 우리도 평소에는 이렇게까지는…….”

달튼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이제는 화풀이고 뭐고, 그저 이 소년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오늘 견학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드네요.”

그렇게 말한 레너드가, 널브러져 헉헉대는 기사들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 제가 후배로 오면 너그럽게 받아 주십시오. 부끄럽지 않은 기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와아……, 뭐지, 이건.

인간이 아닌가.

이 소년은 뭔가……, 뭐랄까……, 잘 모르겠지만, 빛 같은 것인가 보다.

“공자, 내가 잘못했소!”

“네?”

“실은 내가 괜한 시험을 하려 했소. 내 선입견이었어! 공자는 검을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달튼의 용기 있는 사과에, 널브러져 있던 기사들 사이에서 “으허윽, 단장님!” 하며 감격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단장의 대인배적인 면모에 감동받아서…… 일 리는 없고, 드디어 이 억지 같은 훈련이 끝나겠구나 하는 기쁨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이들을 한 번 슥 훑어본 레너드는 최종적으로 달튼에게 활짝 웃으며 한 방 날렸다.

“와아, 저 그럼 단장님의 시험에 합격한 겁니까? 인정해 주시니 기쁩니다!”

심신이 정화되는 그 미소에, 기사단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 * *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기사들과 직접 대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달튼은 자신의 기사단에 날아온 이 천사, 아니 공자에게 뭐라도 하나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스승에게 배웠다 해도 현직 기사의 검은 녹록하지 않을 거외다.”

“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좋습니다. 데나이얼! 와서 한 판 붙어 봐!”

달튼의 외침에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체력 훈련을 버틸 만큼 근성이 있다는 게, 검 실력이 훌륭하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데나이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검을 잡았다. 훈련 때 무너진 자존심을 여기서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너드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레너드의 풀어진 표정에 데나이얼의 자신감은 더욱 상승했다. 저렇게 물렁한 녀석에게 질 리 없다.

견학생과 기사가 대련한다는 소문은 금방 황성 내에 퍼져, 어느새 다른 기사단 사람들도 슬금슬금 구경을 나왔다.

“뭐요, 달튼 경. 적기사단에서는 이제 저런 핏덩어리도 영입하나 보지?”

백기사단의 호리오가 히죽거리며 달튼 곁에 섰다. 이전 같으면 버럭 했을 달튼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이죽거림에 콧방귀도 안 뀌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나중에 아깝다고 땅을 치고 후회해도, 저치는 우리가 데려올 테니.”

“응? 저 도련님한테 무슨 콩고물이라도 딸려 오나?”

“잔말 말고 보기나 하시지.”

달튼이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곧이어 심판인 제럴드의 외침이 들렸다.

“대련, 시작!”

그리고 찰나의 순간.

웅성대던 연무장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방긋방긋 웃던 레너드에게서 묵직한 투지력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입가의 미소는 여전한데, 눈빛은 맹수같이 날카로워졌다.

“……허?”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호리오가 짧게 혀를 찼다.

변한 것은 분위기만이 아니다.

“하압!”

시작 소리와 함께, 레너드는 엄청난 기세로 데나이얼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속도에 데나이얼은 시작부터 당황했다.

“어어, 어?”

카앙, 캉. 검과 검이 수초 간에 몇 번이나 부딪쳤다. 금속성이 울릴 때마다 구경하는 기사들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아니……, 저건 뭐야?”

호리오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너드의 검은 가장 교과서적인 검이다. 달리 말하자면, 읽기 쉽다는 의미다.

그러나 엄청난 속도와 박력, 뛰어난 판단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공격을 읽어도 반격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달튼은 레너드의 실력에 온몸에 찌르르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데려올 거요. 내가 딱 침 발라놨으니 넘보지 말라고.”

새삼 고맙다, 해밀턴 녹트 자작!

“중지! 좌의 승!”

결판은 순식간에 났다. 레너드의 승이었다.

그 후 다른 기사들도 가세해서 총 다섯 번의 대련이 있었고, 레너드는 그중 세 번을 승리했다.

“그다지 지쳐 보이지도 않는군. 허허…….”

호리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달튼은 한껏 으쓱해져 호리오에게 피식 비웃음을 날려 주고는, 레너드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경이로운 실력이었소.”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사분들과 대련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레너드가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장착하고 있던 맹수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소. 너무 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그렇겠군요.”

“내 방으로 갑시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조만간 우리 집에 한번 들러서…….”

다른 기사단에서 넘보기 전에 재빨리 빼돌릴 생각으로, 달튼이 레너드를 재촉해 연무장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때, 다른 기사단의 젊은 기사가 두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잡동사니들 이겨 놓고 좋다고 헤실거리고 있다니, 페레스카는 귀족 체면도 뭣도 없나 보지?”

한 방에 둘을 공격하다니, 굉장한 주둥아리를 가진 기사였다.

그 말에 성미가 급한 달튼이 걸음을 멈췄다.

“뭐야?”

“아, 들으셨습니까?”

젊은 기사가 이죽거렸다.

“재미있는 구경이 났다길래 왔는데, 하품이 다 나와서요. 딱 봐도 짜고 치는 대련이잖습니까.”

“우리 적기사단은 그런 비열한 짓은 안 하네!”

“그게 아니면 저런 어린 공자에게 당할 정도로 적기사단 실력이 형편없다든가.”

“네 이노옴!”

달튼이 머리에 핏대를 세우며 검을 뽑으려 했다. 근처에 서 있던 적기사단 기사들이 붙잡고 말리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기사는 시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사기 놀음에 가담하다니, 지금까지 페레스카에 무인이 배출되지 못 하는 이유가 있군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레너드는 달튼과 달리 침착하게 대응했다. 얼굴도 여전히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 유들유들한 반응에 기사는 더 신이 나서 언성을 높였다.

“동생분께 검을 배우셨다면서요? 그것부터 이미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경께서는 헬레나의 실력을 직접 보지도 않으셨으면서 속단하시는군요.”

“아, 그래. 헬레나 공녀. 어제 파티에서 뵈었습니다.”

기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딱 봐도 검은커녕 본인 드레스 자락도 무거워서 못 들 것 같은 영애였…….”

기사는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눈 깜박할 사이, 자신의 목에 검이 닿아 있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너드가 검을 뽑아 겨눌 때까지, 거기 모인 이들 대부분 눈치채지 못했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

레너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기사를 불렀다.

“그 이상 제 여동생을 모욕한다면, 저는 경의 머리를 그 몸에서 분리해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레너드의 목소리에선 노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정중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 말이 허세나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어……, 어, 으, 제, 제가 그만 말실수를……, 죄, 죄송합니다.…….”

기사가 더듬더듬 용서를 구했다. 황급히 돌아가는 눈알이 꽤 다급해 보였다.

기사의 사과에 레너드는 검 끝을 다시 내렸다.

“말이 통하는 분이셔서 안심했습니다.”

레너드가 다시 천사처럼 웃었지만 거기 모인 이들 중 이제 그를 마냥 착해 빠진 천사라고 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 * *

“푸하하하하하하!”

며칠 후, 적기사단 단장실.

레너드의 일화를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숨이 끊어질 정도로 폭소했다.

달튼이 혀를 쯧, 하고 차며 카이사르의 반응에 불쾌감을 표했다.

“그런 천사 같은 도련님이 어쩌다가 전하 같은 분과 친분이 있을까 염려했더니, 그제야 이해가 가더군요.”

“으하하하하! 아하하하학! 으헉, 억, 으허허헉!”

“아, 그만 좀 웃으십쇼.”

달튼의 책망에 카이사르가 눈물을 훔치며 간신히 웃음을 멈췄다.

“달튼 경, 말은 그렇게 해도 이튿날 레너드를 초대해 식사 대접까지 했다면서?”

“예. 어쨌든 놓치기 아까운 인재이니, 확실히 침 발라 놔야죠.”

“무슨 얘기를 했지?”

“기사단을 희망하기에 사관 학교를 추천했습니다. 졸업하면 냉큼 우리 기사단 부단장으로 데려올 겁니다.”

달튼이 의욕적으로 말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이토록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 직접 못 봐서 아깝군. 레너드의 그런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거야. 자네들은 축복받았군그래.”

“그런 축복은 사양합니다. 어린 분이 아주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더군요.”

“내 친구거든.”

“자랑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달튼은 슬쩍 카이사르의 눈치를 살폈다.

달튼이야말로 카이사르가 이처럼 호쾌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달튼은 때때로 이제 갓 성인이 된 그에게서 살기를 느끼곤 했다.

언제든 상대를 물어뜯을 송곳니를 감추고 있는 남자.

‘잿빛 늑대라는 별칭이 괜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니 다혈질인 달튼도 카이사르 앞에서는 자중하게 됐다.

레너드가 경고하고 목을 베는 사람이라면, 카이사르는 목을 베고 경고하는 사람이었다.

“아아, 기대되는군. 레너드가 얼른 황성에 들어왔으면 좋겠어.”

카이사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나저나 달튼 경, 헬레나에 대해 헛소리를 한 그 기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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