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25/156)

* * *

정오 무렵 공작저에 도착했던 카이사르는, 나에게 귀찮은 과업을 던져 주고선 자정 무렵에 떠났다.

레너드가 어머니의 호출로 잠시 자리를 비워, 결국 나 혼자 그를 배웅하게 됐다.

“하룻밤 자고 가지 그래? 밤에 마차를 달리는 건 위험할 텐데.”

“솔즈베리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른 거야. 얼른 돌아가 봐야지.”

“황태자가 되고 나니 바쁘구나.”

“괜찮아. 각오했던 일이고.”

카이사르가 꽤 산뜻한 말투로 대답했다.

“올해 여름엔 공작저에 못 오는 건가?”

벌써 초여름이 다 지나간 시기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공작저에 머물며 복작대고 있었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한참 늦게 공작저를 방문하더니, 심지어 하루도 못 채우고 떠나고 있다.

카이사르는 옅은 한숨으로 내 질문에 이른 답을 했다.

“미안.”

음,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괜히 물어봤나.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불편한 듯 입을 연 쪽은 카이사르였다.

“그러고 보니 사교 모임엔 좀 나가고 있어?”

“사교 모임?”

“내 생일 파티 후로 초대장을 꽤 받았을 것 같은데.”

“아, 그거라면 전부 거절하고 있어.”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이유는 역시 귀찮아서겠지?”

“물어서 뭐해.”

“하하, 역시나.”

카이사르가 소리 내 웃었다.

문득 이런 대화를 앞으로 얼마나 더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잖아도 분위기에 휩쓸린 첫 키스 이후 서로 미묘하게 어색해진 터였다. 아마 우리 둘 다 은연중 그날의 화제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관계가 급변하는 것이 두려운 탓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앞으로 그와 점점 더 소원해지리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혹시 브란테 변경백에게서 초대장이 온 적도 있어?”

혼자 청승에 취하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브란테 변경백? 거긴 왜?”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

카이사르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일 리가 없지.

사실 나도 그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율리카 브란테.

서로의 적당한 거리를 파악하고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야 하는 첫 만남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비부터 걸었던 금발의 영애.

“초대장이 하도 많이 와서 모르겠네.”

“그렇게 많이 와?”

“거절 답장 쓰느라 죽겠어. 아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 다들.”

내가 투덜거렸더니, 카이사르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녀석은 내가 일에 치이는 게 즐거운 건가.

그나저나.

‘확실히 뭔가 있긴 있군. 브란테랑.’

이번에 검투 대회 때 수도에 올라가면, 해밀턴에게 은밀히 물어봐야겠다.

“자, 그럼 난 그만 돌아가 볼게.”

우리는 저택을 빠져나와, 대기 중이던 마차 앞에 섰다.

“오라버니가 돌아올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가지.”

“됐어. 얼른 출발해야지.”

“그렇지만.”

황태자의 배웅 길이 참 초라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라 소란 떨지 않고 조용히 떠나겠다는 카이사르의 의견 때문이었지만.

‘지난번에 파티 얘기를 들은 이후로 의전이 소홀하면 묘하게 신경질이 난단 말이지.’

어쩐지 내 제자 놈이 황후한테 밀리는 것 같고, 홀대받는 기분이 들고 말이지.

아무리 귀찮아도 스승이 되기로 한 이상, 스승으로서의 책임은 다하고 싶다.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혼자 끙끙대지 말고.”

“헬레나.”

“응?”

“나, 헬레나 제자야.”

웬 동문서답이야 싶은 대답을 하며 카이사르가 씨익 웃었다. 어딘가 악당 같은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긴,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게 가르쳐 놓긴 했지.

나는 카이사르의 팔을 툭툭 치며 격려하듯 말했다.

“어리광 부려도 된다는 의미야.”

사실 이제는 카이사르가 내게 어리광을 부릴 만큼 어리진 않지만.

외모만 봐도 영 아니긴 하지. 스물한 살이 열일곱 살에게 어리광이라니.

그러나 농담 섞인 내 말에 카이사르는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어리광 말이지?”

“응? 어, 응. 뭐, 그렇지.”

“그럼, 이런 거?”

카이사르가 씩 웃더니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를 품에 꽉 안는다.

엥?

“뭐 하는 거야?”

그의 품에 안긴 채 내가 말했다. 그는 날 놓을 생각도 없이, 내 목덜미에 고개를 부비며 대답했다.

“어리광 부리는 중이야.”

“이게 무슨 어리광이야.”

“힘든 일들을 버티기 위해 헬레나를 채우고 있는 중이야.”

이상한 소리.

그나저나 이 녀석, 진짜 크긴 크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쏙 안길 줄 몰랐다. 내가 이렇게 작았나.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자아, 채워져라, 채워져라.”

“크흐흐.”

카이사르가 내 손길이 간지럽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며 소곤소곤 웃었다. 어린애같이.

힘들고 곤란한 일을 내게 감추는 게 섭섭하긴 하다. 날 그렇게 못 믿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어린애 같은 표정도, 행동도, 말투도, 오직 나에게만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살겠습니다.”

카이사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열심히 살아 주세요.”

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게 이 정도의 다정함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남김없이 줄게.

그러니까 언제든 또 오렴, 나의 귀여운 제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카이사르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나와 레너드, 아고트 세 사람은 검투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수도의 별저로 향했다.

떠나던 날, 부모님은 감격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았더랬다.

“우리 헬레나, 드디어 의욕적인 삶을 살기로 했구나. 자진해서 수도에 다 가다니……!”

“기왕 간 김에 사교 모임에도 참여해 보거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해 주마.”

으음. 의욕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사교 모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두 분이 기뻐 보이니까 내버려 두자. 일단, 웃어야지. 하하하.

마차가 영지를 벗어날 때까지 아고트는 차창 너머의 풍경에 완전히 넋을 빼앗겨 있었다. 나와 레너드는 그런 아고트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신기하니, 아고트?”

“네? 아, 네! 저,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 타 봐요!”

“수도에는?”

“수도에도요! 어른이 될 때까지는 못 갈 줄 알았는데……!”

아고트는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다. 눈에서 별 가루가 떨어질 것 같았다.

아우, 귀여워라. 나와 레너드는 제 꼬리를 물기 위해 빙빙 도는 강아지를 보는 심정으로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우승은 못해도, 아가씨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최선을 다할 거예요!”

“기왕 할 거면 우승할 생각으로 해야지, 아고트.”

“그, 그렇군요! 아가씨 말이 맞아요! 우승을 목표로……!”

“그렇지. 그 패기지.”

나와 아고트가 서로를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레너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의욕은 없지만 패기는 있는 거야, 헬레나?”

“당연하지. 하는 건 귀찮지만, 어차피 할 거면 이겨야 하는 법이거든.”

“그래? 그러면 나도 헬레나를 위해서 힘내 볼까.”

레너드가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겸손한 그에게서 보기 드문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그럼, 이겨야지.

제자들이 성과를 내는 걸 보는 게 짜릿해서 선생이 되기로 결심한 건데.

나는 오랜만에 들뜬 기분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른 검투 대회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우승하든, 분명 우승자는 내 제자 세 명 중 하나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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