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26/156)

* * *

나에게 수도의 화려함은 질리다 못해 물릴 정도였지만, 아고트에게는 아니었다.

“마차가 이렇게 많이 오가는데 깨진 포석이 하나도 없다니!”

그것은 정비 인력과 예산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저 성 좀 보세요! 너무 멋져요! 저런 곳에는 누가 살까요?”

황가가 산다. 참고로 500년 전엔 나도 살았던 적이 있고.

“용 조각상 보셨어요? 정말 크고 근엄한 거 있죠?”

아, 그거. 내가 악룡 크루세흐를 때려잡은 기념으로 세운 거다.

대회 사흘 전, 레너드와 아고트의 참가 신청을 마친 후의 거리 구경. 아고트는 다섯 걸음에 한 번씩 감탄사를 내뱉으며 걸었다.

나와 레너드는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가끔 맞장구를 쳐 줄 뿐이었다.

뭐랄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기분이군.

“첫 대회를 앞두고 긴장은커녕 저렇게 들떠 있다니, 걱정이네.”

“그런 것치고는, 아까부터 아고트에게 이것저것 엄청 사 주고 있지 않아, 헬레나?”

“뭐……, 그러는 오라버니도.”

“음, 아고트가 뭔가 받을 때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는 표정 보는 게 재미있어서 그만…….”

“실은 나도…….”

뜻밖의 장면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군.

‘이제 슬슬 자리에서 빠져 볼까.’

아고트에게 구경도 충분히 시켜 준 것 같고, 이제는 볼일을 보러 가도 될 듯싶다.

“오라버니, 난 잠깐 다른 길로 빠져야겠어.”

“뭐? 혼자?”

“응, 녹트 자작과 약속이 있어. 괜찮아. 마차가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까.”

“약속? 네가?”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귀찮아하잖아, 사람 만나는 거.”

“응? 어……, 그렇, 지?”

그렇지. 난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었지.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브란테랑 카이사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내가 알아서 뭐 하려고?’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약속 시각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에 물릴 수도 없었다.

* * *

해밀턴과 만난 곳은 시내의 한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사람들과 떨어진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창 너머로 밤이 내려앉기 시작한 도시의 정경이 보였다.

“제게 먼저 보자 하셔서 놀랐습니다.”

미소를 짓느라 눈가에 주름이 진 해밀턴이 내게 말했다.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드디어 절 정보원으로 쓰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아뇨. 전 정치엔 관심이 없습니다.”

“저런, 아쉽군요.”

아쉽다니. 정말 나를 정치판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건가, 이 사람.

“그래서, 궁금한 게 어떤 것인지요.”

“브란테가에 대해 잘 아시는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예? 브란테가에서 공녀께 뭔가 했습니까?”

짐짓 여유롭던 해밀턴의 눈썹이 초조한 듯 으쓱 올라갔다.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뭔가 했냐고 물으시는군요.”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첩자 노릇은 못 하시겠어요.”

“하하, 그러게요.”

가벼운 농이 오간 후, 해밀턴은 물잔을 기울여 입술을 축였다. 곤란한 말을 하기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듯이.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현재 황후께서 친자이신 프란 황자를 황태제로 올리려 하는 건 아십니까?”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안다기보다 추측 가능한 문제다.

카이사르가 황태자가 되었으니, 카이사르가 비명횡사하지 않는 이상, 황후의 친자가 황태자가 될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황제가 된 후, 자신의 아들을 황태제로 임명하도록 종용하려 하겠지.

‘하지만 당장은 황태제가 된다 해도, 카이사르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불리해지겠지.’

“황성 내의 세는 황태자 전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대로면 황후는 프란 황자를 황태제로 올리는 것도 어려워지겠죠.”

“그렇겠네요.”

“네, 그래서 요직에 자신의 사람을 앉히고 싶어 하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해밀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나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율리카 브란테를 황태자비에 앉히고 싶어 하는 거군요.”

“이미 꽤 오래전부터요.”

이제야 이해가 된다.

첫 만남부터 나에게 대뜸 시비를 걸던 율리카의 그 행동이.

카이사르와 친한 날 향한 질투, 라이벌이 될 수도 있을 공작가 영애를 향한 견제, 그럼에도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뻔뻔한 선전 포고.

‘결국 정치 싸움이었나?’

역시 시시한 이유였군.

나는 마른 입 안을 적시기 위해 물잔을 기울였다.

“카이사르의 혼약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가 됐군요.”

“담담하시군요.”

“뭐, 놀랄 것도 없죠. 황가에서의 혼약은 빠른 편이니까요.”

난 죽을 때까지 미혼이었지만.

“만약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는 공녀를 황태자비로 밀어 드릴 의사가 충분합니다.”

해밀턴이 은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싫은데요.”

“네? 하, 하지만 나중에 황후가 되실 수 있는 건데요.”

“겨우 황후나 되자고 제가 귀찮은 일을 굳이 할 이유가…….”

황제였던 내가 황제 마누라 해 보겠다고 되살아난 줄 아시나.

‘음, 그나저나 그 자식,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키스한 거야?’

나는 눈 오던 날 카이사르와 키스했던 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물론 첫 키스라는 게 호기심과 분위기에 얼렁뚱땅 진행되는 편이긴 하다. 풋풋한 애들의 키스에 억울해할 건 없지만.

‘그렇지만 좀 아쉽긴 하네.’

황태자비에 대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누가 그의 아내가 되든 이목 때문에라도 그와 어울리기 어렵게 될 거다.

좋은 제자와의 인연을 잃어버리게 됐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입 안이 씁쓸해졌다.

* * *

검투 대회 당일.

황성 주최라 그런지, 관객 수가 어느 때보다 많았다. 규칙을 바꾸면서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관람도 허가한 덕분에 관람석은 만원이었다.

“귀족 영애분들은 이쪽 자리로.”

테라스석이 있는데도 시종은 귀족 영애들을 1층 자리로 안내했다. 나야 경기장이 잘 보이면 좋지, 뭐.

‘어제 예선을 통과한 열여섯 명만 오늘 경기에 나오는 거구나.’

내 제자 셋은 모두 가볍게 예선을 통과했다. 뭐, 당연한 결과지. 스승이 난데. 에헴.

그때, 나의 옆자리로 한 영애가 다가와 앉았다. 나는 무심히 그 영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움푹 파인 드레스에 화려한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린 금발, 드러난 뽀얀 어깨.

장소랑 참 안 어울리는 드레스다, 하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으응?”

“허억!”

우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어머, 율리카 브란테 영애 아니신가요?”

나도 모르게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반면 율리카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여기, 이봐요! 저 다른 자리로……!”

“그냥 앉으세요, 영애. 뭘 번거롭게 자리를 옮기려 하세요?”

“히이익!”

벌떡 일어나 시종을 부르는 율리카를, 나는 강하게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율리카가 기절할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라면 이 애가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는 건가?’

이렇게 멘탈이 약한데 황가에 가서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지?

에휴, 너도 앞날이 참 어둡겠구나.

나는 어쩐지 율리카가 가엾어졌다.

“오랜만이네요, 영애. 잘 지내셨나요?”

“네? 오, 오호호, 그럼요. 공녀께서도 무탈하셨나요?”

“덕분에요. 어휴, 영애. 왜 그렇게 긴장하고 계세요. 긴장 푸세요.”

내가 율리카의 팔을 토닥거려 주자, 율리카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우리 사이가 나쁘다고 오해하겠어요. 웃어요, 영애. 분위기 망치지 말고.”

“아……, 아하하하……!”

율리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율리카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아, 어쩌지. 난 얘랑 사이가 나빠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바보 같은 애들도 귀여워 보이기만 하니, 이것도 병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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