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회는 흥미진진했다.
귀족 놀음치고는 꽤 격렬하고 스릴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 내 제자들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저 여자 검사는 어디 출신이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날렵하면서도 날카롭군.”
아고트는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실력으로 8강까지 올라갔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녀가 배운 검이 ‘의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는 검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아고트.’
아고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8강에서 떨어졌지만, 아마 이 대회가 끝나면 러브콜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올 것이다.
“저 사람은 페레스카 공작가의 자제분이 아닌가.”
“이미 다른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을 거머쥔 인재라 하던데요.”
“지금 사관 학교에 다닌다 했던가? 과연 미래가 기대되는군.”
나의 천사 같은 레너드는, 무대 위에서는 천사가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다가도, 시합이 시작되면 냉혈한 같은 얼굴로 돌변했다. 그럴 때마다 좌중에서는 여성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영애들이 또 난리가 나겠구나.’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이목은 최종 보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이사르 윈터 그레이.
그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참여했을 뿐, 이라고 다들 생각했을, 우리의 황태자 전하.
“검도 성격 따라간다더니, 저리 거침없고 냉정할 수가…….”
“과연 잿빛 늑대로군요. 적을 살려 두지 않으실 분입니다.”
카이사르는 상대가 누구든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결승까지 올랐다.
카이사르가 검을 들 때면 어김없이 좌중이 얼어붙을 만큼, 그의 실력은 압도적이고 일방적이었다.
“살기마저 느껴지네요. 대체 어디서 저런 아름답지 못한 검을 배우신 것인지…….”
술렁이는 좌중에서는 칭찬보다는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감입니다. 제가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물론 미안한 마음은 없습니다만.
‘아니, 이 인간들은 검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용 소품?’
검은 사람 죽이기 위한 무기야.
살기를 띠는 건 당연한 거라고.
경기는 어느덧 결승만을 남겨 두었다.
결승에선 카이사르와 레너드가 맞붙게 되어, 그야말로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곁에 앉은 율리카에게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전하의 검이 참으로 유려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느, 네에?”
내가 말을 걸자, 율리카가 깜짝 놀라 토끼 눈이 됐다.
“때로 압도적인 실력은 공포를 가져다주기도 하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검투의 꽃. 생과 사를 구분 짓는 검의 매력 아니겠어요?”
“하……, 뭐, 듣고 보니…….”
율리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표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지만.
“나약한 이들이 부디 자신의 안전이 누구의 검 아래에서 보호받고 있는지 알아야 할 텐데 말이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뒷자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카이사르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던 몇몇 귀족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괜히 내 시선을 피했다.
“어, 그러니까……, 요는 전하께서 멋지시다는 거잖아요?”
율리카는 그들과 내 신경전을 눈치 못 챈 듯, 눈을 도르륵 굴리며 내게 물었다.
……이 어리고 순진한 애가 어떻게 황태자비를 하겠다는 거지? 내가 왜 남의 집 딸내미 걱정까지 해야 하냐.
내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율리카를 쳐다보고 있는 그때.
결승 경기가 끝났다.
“카이사르 윈터 그레이 황태자 전하께서 최종 우승하셨습니다!”
승패를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대회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카이사르가 우승했다.
“이 검투 대회에서 황태자 전하가 우승하신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곁에 앉은 율리카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지금까지는 합을 맞춰 그럴듯한 몇 개 경기만 보여 주면 퇴장하는 역할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내 제자는 안 그래.
내 제자는, 진짜거든.
“우승자에게 화관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관중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조금 전 카이사르를 험담하던 이들도 포함해서.
카이사르의 머리에 푸르고 붉은 꽃으로 장식된 화관이 얹어졌다.
영애들의 환호 소리가 더 커졌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난리야?”
“어머. 모르시나요, 공녀? 우승자는 자신이 받은 화관을 마음에 품은 영애에게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고요.”
율리카가 그것도 몰랐냐며 잘난 척하듯 내게 설교했다.
얘는 검은 하나도 모르면서 그런 건 잘 아네.
그나저나, 그렇다는 건.
‘저 화관은 황태자비로 거론 중인 율리카 브란테에게 돌아가는 건가.’
아, 젠장. 자리 잘못 잡았다.
옆에서 뻘쭘하게 웃고 있어야 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카이사르가 상기된 얼굴로 나와 율리카 쪽으로 다가왔다. 율리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퍼졌다.
“전하, 승리를 감축드립니다!”
율리카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쥐고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검투 대회에 왜 이리 화려하게 입고 왔나 했더니, 이런 이유였군.
“감사합니다, 영애.”
“저는 전하께서 승리하실 거라 확신했답니다!”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카이사르가 고른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뭐지, 저 비즈니스적인 미소는. 나만 오글거리나?
나는 고개를 흘끗 돌려 상석을 확인했다. 황후가 이쪽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 정치라 이거지.’
시시하네.
드디어 카이사르가 화관을 집어 들었다. 율리카가 들뜬 눈빛으로 화관을 응시했다.
카이사르가 그런 율리카를 향해 빙긋 미소 짓더니, 화관을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그러니까……, 율리카가 아닌 나에게.
“……응?”
엇?
잠깐. 어라? 어?
“오늘의 모든 영광을 나의 존경하는 스승님께.”
으어어어어어어?
카이사르의 붉은 눈이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율리카의 빨개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일그러졌다.
좌중에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게 뭐냐고!’
무료한 인생은 이제 망했어.
나는 사고하기를 포기했다.
* * *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들었어? 황태자 전하께서 페레스카 공녀에게 화관을 주셨다며?”
“그 공녀가 황태자 전하께 검을 가르친 스승이라 하던데.”
“뭐? 그런 어린 영애께서 무슨.”
“그래? 서도에서는 꽤 유명하다던데. 그 댁 공자도 공녀께서 가르치셨다며.”
“헛소문이겠지, 설마.”
“혹시 황태자비로 마음에 두고 계신 건가?”
“황태자비라. 하긴, 페레스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사람들은 모이면 나와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소문은 추측을 낳고, 추측은 확신으로 돌변하고, 때로는 왜곡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항상 이런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러면 브란테 영애는 어찌 되는 거야?”
* * *
잿빛 늑대. 적에게 가차 없는 냉혈한. 살검(殺劍)을 휘두르는 황태자.
그 수많은 별칭을 등에 지고 있는 남자는 지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 앞에 납작 엎드려 있다.
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이사르를 내려다보았다.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식솔들의 기척이 전해져 왔다.
다들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너그러워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카이사르.”
“응.”
“내가 가장 질색하는 게 뭐지?”
“귀찮은 일 하는 거.”
“그런데 카이사르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했지?”
“귀찮은 일을……, 떠안겨 줬지.”
“죽여도 되지?”
“살려 줘!”
카이사르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상황에 나에게 화관을 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쩌렁쩌렁 울리는 내 분노에 카이사르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더니 곧 내 비위를 맞추듯 헤실헤실 웃는다.
“성과를 올린 제자가 스승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
“웃지 마라. 이 와중에 잘생겨서 더 기분 나쁘니까.”
“넵.”
카이사르가 장난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정치 싸움에 끌고 들어갈 작정이야?”
“그런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게 됐어. 난 순식간에 브란테 영애와 황태자비를 두고 다투는 여자가 됐다고.”
구체적으로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율리카의 턱에 어퍼컷을 날려 버린 여자가 됐다.
“황후를 견제하고 싶으면 다른 수를 써. 날 갖다 붙이지 말란 말이야.”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말했다.
내 노기를 느꼈는지, 카이사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아고트나 레너드가 우승했다면, 그 둘도 당연히 헬레나에게 화관을 줬겠지?”
“그 얘긴 왜 나와?”
“제자니까. 스승님에게서 배운 걸 보여 주는 자리였으니까.”
“그야, 그랬겠지.”
카이사르의 목소리가 왜인지 공격적이라, 나는 눈을 굴리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아고트야 관객 중에 아는 사람이 나뿐이고, 레너드도 아무 영애에게나 줘서 논란을 만드는 것보다 친동생인 내게 주는 게 모양새가 좋았을 테니.
그러자 내 대답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둘이 화관을 줬다면, 스승님은 분명 기쁘게 받았을 거야. 그렇지?”
“뭐……, 그렇지?”
“그런데 왜 난 안 되는 거야?”
“뭐?”
“나도 스승님의 제자인데, 내가 주는 화관은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어라.
이거 주객이 전도된 기분인데.
“아, 아니. 진정해 봐. 싫다는 게 아니잖아.”
“나랑 얽히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건가? 내게 뭘 받는 것조차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로?”
카이사르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어어, 울지 마. 스물 넘은 남자가 울면 진짜 감당 안 된다고.
나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누,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좋아! 좋다고! 화관 받는 순간은 나도 감동이었어!”
“거짓말!”
카이사르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식은땀이 났다.
“거짓말 아니거든!”
“스승님은 내가 우승한 게 자랑스럽기는 해?”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뿌듯했는데! 그런 쾌감 느끼자고 귀찮은 거 무릅쓰고 후학 양성 하는 건데!”
“그러면 당연히 성과를 낸 제자에게 칭찬과 보상도 안겨 주겠지?”
“당연하지! 당연……, 어?”
잠깐만.
이 싸한 느낌은 뭐지.
“후……, 다행이군.”
흥분해서 소리치던 카이사르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워어, 뭐야. 갑자기 침착해지지 마.
“사실상 그걸 위해 악착같이 우승했던 건데. 하마터면 마음의 상처를 받을 뻔했잖아, 스승님.”
“……응?”
카이사르가 옷매무새를 바로 한 후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없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날 설핏 올려다본다. 그 붉은 눈동자가 얼마나 얄미워 보이던지.
“그러면 얌전히 칭찬과 보상, 기다리고 있을게.”
“……으어엉?”
카이사르가 얼빠진 내 반응에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이 열리자, 방 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잔뜩 긴장해 있던 시종들이 ‘흐익’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들 걱정 말고 가서 일들 해.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카이사르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러다 막 생각났다는 듯,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날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헬레나, 앞으로는 초대장에 거절 답장 하느라 고생할 일 없을 거야. 어휴, 칭찬은 넣어 둬. 오늘은 칭찬받을 짓을 너무 많이 해서 감당이 안 되네, 참. 하핫!”
“뭐? 그게 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데!”
내 의문에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카이사르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