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28/156)

* * *

“정말 뚝 끊겼네……, 초대장.”

카이사르가 장담한 대로, 그 후 나를 귀찮게 하던 초대장은 뚝 끊겼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내 혼잣말에 레너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잘됐네. 매번 거절 답장 쓰는 거 귀찮아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좀 무섭단 말이야.”

“무서워? 뭐가?”

“그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생각하면…….”

나는 하하하 웃으며 저택을 나서던 카이사르를 떠올리며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진짜 뭐든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고, 그 녀석!

“뭐, 단순하게 생각해. 다들 널 황태자비 후보라 생각해서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된 걸 수도 있잖아.”

“그렇긴 한데…….”

영식들로부터 오던 초대장이 끊긴 건 그걸로 납득할 수 있다.

반면, 날 황태자비 후보로 오인하기에 오히려 줄을 대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도 있을 터다.

‘그런데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싹 다 조용해진 게 참…….’

나는 턱을 괸 채 ‘으으음’ 하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에라, 모르겠다. 귀찮은 일이 사라졌으니 됐지, 뭐.’

그래, 좋게 생각하자.

신경 써야 할 일이 그것 말고도 산더미다.

이를테면…….

“실례합니다. 롤랑 상단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메이드인 베시의 말에 나와 레너드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롤랑 상단? 거기서 왜?”

“아고트 문제로 오신 것 같습니다.”

그래, 이를테면 이런 거다.

검투 대회 후, 아고트를 데려가려는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별저에 들이닥쳤다.

“귀찮아? 내가 상대할까?”

내 표정에 레너드가 슬그머니 물어 왔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난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아냐, 내가 갈게.”

귀찮아도 할 수 없지.

“아고트의 주인님은 나니까.”

* * *

“저는 헬레나 아가씨께 제 몸과 마음과 목숨을 모두 바치기로 오래전에 결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상단에는 갈 수 없으니, 이 이상 제 주인님을 귀찮게 만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합니다.”

내 곁에 정자세로 앉은 아고트가, 이미 수십 번 읊어 잠꼬대로도 할 수 있게 된 대사를 줄줄 읊었다.

난 그 곁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고 맞장구만 쳐 주면 됐다.

맞은편에 앉은 배불뚝이 대머리 남자가, 이토록 단호한 거절은 예상치 못한 듯 쩔쩔매며 손수건으로 머리의 땀을 닦았다.

“그리 급한 거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게나.”

“싫습니다.”

“우린 자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할 의사도 충분히…….”

“싫어요.”

아고트가 남자의 설명을 끊으며 말했다.

“전 이미 아가씨 거예요.”

“……그렇다고 합니다.”

“그 재능을 썩히다니, 아깝지 않은가? 이런 평화로운 저택에서 자네의 검을 쓸 일이 뭐가 있어!”

“아가씨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데 쓰면 되죠.”

“……그렇다고 합니다.”

음, 난 슬슬 여기서 빠지면 안 되나? 아까부터 “그렇다고 합니다”밖에 말하고 있지 않은 기분인데.

“공녀, 설득 좀 해 주시지요.”

아고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남자는 우회하기로 작전을 바꾼 모양이다. 그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이 저택에는 이미 메이드가 많지 않습니까? 아고트 양을 저희에게 주시면, 공작가에도 후하게 사례하겠습니다.”

“글쎄요. 본인 마음이 제일 중요한데, 아고트가 싫다는 걸 제가 어쩌겠어요.”

나는 유감이라는 양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아고트 양이 공녀께 이렇게 목매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일부러 몸을 등받이 쪽으로 더욱 기대앉아, 턱을 살짝 들며 웃었다.

“사실 제가 좀, 잘나긴 해서.”

“아가씨, 멋져요!”

아고트가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남자는 어이가 소멸한 표정으로 그런 나와 아고트를 쳐다보았다.

결국 남자는 방문 30여 분 만에 소득 없이 퇴장했다.

제법 빠른 편이군. 어제 찾아온 사람은 두 시간이나 떠들다가 갔는데.

“아가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자꾸 귀찮은 일 하시게 해서.”

남자가 떠난 후, 아고트가 시무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아고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내 제자가 뛰어나서 그런 건데, 이런 건 자랑스러워해야지.”

“아가씨……!”

아고트가 감격에 겨워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감탄했다.

“그보다 아고트, 정말 저런 제안에 마음이 없는 게 맞아?”

“네?”

“혹시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 때문이라든지, 책임감 때문이라든지, 그런 이유로 내 곁에 있으려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야.”

나는 쭉 마음에만 두고 있었던 얘기를 드디어 꺼냈다.

실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아고트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 곁에 남으려는 것은 아닌가 해서.

“아가씨, 전 잘 알아요. 아가씨는 제가 곁에 없어도 부족함 없이 잘 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걸요.”

아고트가 빙긋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전 이제 안 돼요. 전 아가씨 곁이 아니면 싫어요.”

“세상에, 아고트…….”

“그러니까 저에게 가도 된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가지 말라고 말해 주세요. 네?”

어휴, 얘 말하는 것 좀 봐. 무슨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지?

이거 완전히 프러포즈 아닌가. 전생의 기억을 다 뒤져 봐도, 이렇게 감격적인 프러포즈는 처음 듣네.

“응. 가지 마. 가지 마. 넌 나랑 평생 살자.”

“네, 아가씨!”

어휴, 내가 복덩이를 주워 왔구나. 역시 귀여운 애는 일단 줍고 볼 일이야.

나는 아고트의 머리가 닳아 없어질 기세로 쓰다듬어 주었다. 아고트는 배를 내밀고 누운 고양이처럼 제 머리를 내게 내맡긴 채 행복해했다.

“아가씨들, 한창 즐거운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때 문 쪽에서 레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너드는 팔짱을 끼고 문에 비스듬히 선 채 흐뭇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앗,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레너드에게 말을 걸었다.

“헬레나에게 초대장이 왔어.”

“초대장?”

뭐야, 카이사르 녀석. 뭔 수를 써서 전부 다 막은 것 아니었나?

‘하긴, 아무리 황태자라도 전부 다는 무리지, 무리.’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매번 거절하고 있는데 다들 질리지도 않나 몰라.”

나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쓰게 웃는 레너드의 표정을 보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오라버니?”

“그게 실은, 황성에서 온 초대장이거든.”

“황성? 카이사르에게서 온 거야?”

“직접 볼래?”

레너드가 내게 초대장 봉투를 내밀었다.

봉인한 붉은 실(seal)에 선명하게 찍힌 황가의 문장이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레너드가 그토록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황후?”

그것은 마리안느 발레르 황후로부터 온 초대장이었다.

어떤 핑계로도 거절할 수 없는 그 초대에, 나는 속으로 카이사르를 향한 수만 가지의 욕지거리를 내뱉어야 했다.

* * *

황성 회랑에는 거대한 붉은 용을 잡는 한 여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크루세흐를 봉인하는 단테 레나투스. 그 그림 앞에서 나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거, 슬슬 그만 우려먹을 때도 되지 않았나.”

당사자로선 50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자신의 일화가 창피할 뿐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시답잖은 감상을 하고 있는데, 방에 들어갔던 시종이 다시 나왔다.

나는 시종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나는 지금 황후를 만나러 황성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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