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29/156)

* * *

황후는 지난번 검투 대회 때 먼발치에서 본 게 전부다.

불꽃 같은 붉은 머리카락에 자색 눈동자.

그 강렬한 색채에 비해, 실제 가까이에서 마주한 황후는 상당히 온화하고 나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공녀. 환영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후마마.”

나는 상석에 앉은 황후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 후 시선을 흘끗 오른쪽으로 옮겨, 거기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인사했다.

“또 뵙네요, 브란테 영애.”

“그러게요.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페레스카 공녀.”

이 방에는 황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율리카 브란테가 다소 자신만만한 미소로 날 보며 인사했다. 황후를 뒤에 업고 있기 때문인가.

“두 사람, 구면인가요?”

“네, 마마. 다만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브란테 영애가 저보다 빨랐군요.”

황후가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저 여자들끼리 담소나 나눌까 하고 초대한 것이랍니다. 어려워 마세요.”

“어렵긴요. 이런 제게 관심 가져 주시니, 오히려 기쁠 따름인걸요.”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 참으로 겸손하시네요.”

“총애라니요. 농이 과하십니다.”

내가 카이사르에게 총애를 받다니, 보는 눈이 없군. 내가 카이사르를 총애하고 있는 거다, 어리석은 이들아.

“농이라니요. 이번에도 보란 듯이 공녀께서 화관을 받지 않았나요?”

“마, 마마……!”

그 말에 율리카가 억울하다는 듯 황후를 불렀다. 그에 황후는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율리카에게 시선을 주었다.

“좀 더 분발하셔야겠어요, 영애.”

“큭……, 송구합니다.”

율리카가 기가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안쓰럽네.

“저와 함께 검을 배우셨기에, 동료로서 기쁨을 나누려 하신 것이겠지요.”

나는 에둘러 그렇게 설명했다. 내 말에 황후의 눈썹이 으쓱했다.

“실로 겸손하시군요.”

“사실을 말씀드렸을 따름입니다.”

“그런가요? 후후, 브란테 영애. 아무래도 영애는 마법이 아니라 검을 공부했어야 했나 봅니다.”

황후가 농담을 던진 후 부채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마법을 배워?’

요즘엔 마법을 쓰는 사람이 없을 텐데. 실용성이 없는 것에 비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학문이라서 말이다.

뭐야. 맹하게 생겨 가지고, 의외로 공부 머리는 있나 보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날이 참 좋더군요.”

황후가 막 생각났다는 듯, 창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잠시 후원을 거닐지 않겠어요? 마침 두 영애께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죠.”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마마.”

나는 웃으며 진심과는 반대되는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식의 표정’ 좀 더 연습하고 올걸.

지금 내 얼굴 근육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 * *

후원에는 늦가을의 마른 향기가 가득했다. 새 소리가 경쾌했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그리고.

피융, 하고 날아가는 살의 소리가 날카로웠다.

‘뜬금없이 궁도라니.’

우리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후원 한쪽에 임시로 마련된 궁도장.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젊고 잘생긴 남자 궁수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황성에서 가장 젊은 궁수랍니다. 두 영애께서도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아 불렀습니다.”

요즘 영애들 취향 범위 넓네. 궁도를 다 즐기고.

그렇게 생각하며 율리카를 흘끗 쳐다보았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뭐야, 이거. 황후 취향인 건가?’

하여튼 그런 연유로,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 궁도를 구경하게 됐다.

“공녀는 검을 다룰 줄 안다 하였는데, 활은 어떠합니까?”

“소싯적에 잡아 본 적이 있으나, 재주가 미력하여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용병 시절, 활을 다루던 동료에게 배운 적이 있다. 꽤 재미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검만큼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관뒀다.

“아녀자가 검도 모자라 활을 잡아 보았다니,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지 않습니까.”

율리카가 소소하게 반격을 해 왔다.

“자고로 품위 있는 영애라면 검과 활이 아니라 춤과 시를 무기로 삼을 줄 알아야지요.”

그렇게 말한 후, 율리카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만족한 듯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애의 말씀이 옳습니다. 많이 배우게 되네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 말에 긍정해 줬다.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리는 내 태도에 율리카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뭐하러 그런 보잘것없는 주제로 너랑 언쟁을 하겠냐. 귀찮게.

“브란테 영애는 어릴 때부터 황태자비로 교육받아 온 인재이지요. 언젠가 공녀께 영애의 춤을 보여 주고 싶군요.”

“그런가요. 기대됩니다.”

피융.

대화의 중간, 살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그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절로 심장이 선뜩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율리카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반면 공녀는 참으로 자유로이 성장해 오신 것 같습니다.”

“권력의 전장에서 먼 곳에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구귀족의 특권이죠. 공작께서 그 명예로운 자리를 계속 지켜 주셨으면 좋으련만.”

황후가 부채를 팔랑거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피잉. 다시 살이 공기를 갈랐다.

“공녀께서는 어떠신가요? 아버님을 닮아 권력에 대한 욕구가 없으십니까?”

“정치 말인가요?”

“여자들의 권력 말입니다. 예를 들면 황태자비 같은.”

“마마! 그것은!”

황후의 말에 율리카가 발끈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황후는 율리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손바닥을 보여 제지했을 뿐이다.

“네, 황가의 문제에는 관심 없습니다.”

내 대답에 율리카의 얼굴에 옅은 안도가 퍼졌다. 그러나 황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맹세하실 수 있겠습니까?”

“네?”

“이 황가의 안주인 자리에 눈독 들이지 않겠다, 맹세하실 수 있겠느냔 말입니다.”

피잉. 핑. 핑.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화살이 저 멀리 과녁에 꽂혔다.

아, 이제 알겠군.

고요한 후원에서 예민한 청각을 괴롭히는 날카로운 화살 소리를 들려주고자 한 황후의 의도를.

저것은 말이 얹히지 않은 협박이다.

“……마마, 대답에 앞서 제게 좋은 구경을 시켜 주신 보답으로 미력한 재주를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뜬금없이 화제를 벗어나 말했다. 황후가 의아한 듯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든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잠시 활을 받았다.

나는 화살을 집어 들어 시위에 걸었다. 가느다란 활줄이 끊어질 듯이 팽팽해졌다.

‘과녁이 움직이지도 않고. 여흥용이라 거리도 짧고. 애들 장난이지, 이건.’

용병 시절에 현장에서 배운 활은 이것보다 훨씬 무겁고 팽팽했다.

피이이잉.

내가 쏜 화살이 허공을 건너 날아가 과녁 한가운데 꽂혔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노린 것은 ‘소리’였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아간 화살의, 고막에 꽂힐 듯한 날카로운 소리. 그 압박감.

“……놀랍군요.”

황후가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나를 협박으로 짓누르려 하지 마라. 그 뜻이 정확히 전달된 듯싶었다.

“마마, 죄송하지만 원하시는 맹세는 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 전 거래를 하지 맹세는 하지 않거든요.”

“감히 마마를 상대로 거래라니. 무례합니다, 공녀!”

율리카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나도 황후도 그녀를 가볍게 무시했다. 아니, 오히려 황후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란테 영애.”

“네, 마마!”

“제가 방에 귀걸이를 두고 온 듯한데, 로르카와 가서 찾아와 주지 않겠어요?”

“……네?”

율리카가 황망한 눈으로 나와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황후의 명을 거절할 수는 없는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황후의 시종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후원에는 나와 황후만 남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재주도 많고, 배짱도 있고. 실로 영특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브란테 영애가 동년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군요.”

아, 걔가 나랑 동갑이었어? 그건 나도 놀랍네.

“어떤가요. 이것도 연인데, 나와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겠어요?”

……응?

이 질문은 예상 밖인데.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만, 전 황태자 전하의 친우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황태자는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지요.”

황후가 생긋 웃었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다.

“곧 본가로 돌아갈 몸이라, 청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귐에 거리는 문제 되지 않지요. 나와 친하게 지내 결코 해될 일은 없을 겁니다, 공녀.”

황후의 자색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요. 해될 일은 없죠.”

거절하면 해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인 건가.

‘끈질기네.’

난 황태자비 자리에 관심 없고, 얌전히 집에 갈 거야. 너희도 그걸 바란 거 아니었어?

‘황후의 협박이고 뭐고, 그냥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하지만 맹세하라는 그 말에 화가 났다. 권위로 약자의 선택권을 강제하는 그 태도가 말이다.

‘어쩌지? 차라도 엎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찻잔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엎지 못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내 손을 포개어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있었군.”

“……전하?”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니, 익지 않다. 들어 본 적 없는 근엄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 뒤에서 나를 보호하듯 서 있는 그는, 내가 아닌 황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습니다, 마마.”

“언제든 오세요, 황태자. 온 김에 함께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사양하죠. 마마께서 주시는 차는 제 입맛에 영 맞질 않아서.”

“저런. 차는 맛이 아니라 향으로 즐기는 거지요. 아직 어리십니다, 황태자.”

노골적으로 으르렁대는 카이사르와 달리, 황후는 방실방실 웃으며 맞대응했다. 나는 그 사이에 껴서 곤란해졌다.

“제 친우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자입니다.”

“놀리다니요. 여자들끼리의 즐거움을 사내인 황태자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즐거움은 후일 제게 좀 알려 주시고, 공녀는 제가 잠시 모셔 가도 될는지.”

“이것 참. 보세요, 공녀. 사내들이 이렇습니다. 참으로 섬세한 구석이라고는 없지요.”

황후가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드님의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으니, 이 어미는 이만 물러나야겠군요.”

아들이라는 둥, 어머니라는 둥.

카이사르를 직접 낳은 것도 아니면서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잘도 말하는군.

나는 슬쩍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그는 싸늘한 무표정이다. 다만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토록 무섭게 흔들리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오늘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공녀.”

황후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 부분이 유익했을까 생각하며, 나 역시 그저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카이사르는 내내 풀 죽은 얼굴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풀 죽을 필요는 없지 않나. 무슨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제가 온 거 어떻게 아셨나요?”

황성 안이라, 예의는 차려야 할 것 같아 일단 존댓말로 물었다.

카이사르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이내 자조했다.

“로위나가 알려 줬어. 정말 피가 식는 줄 알았어.”

카이사르는 기분을 추스르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귀찮은 일은 안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설마 황후가 나설 줄은…….”

조금 전 황후와 신경전을 벌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혼나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고생이 많네요. 전하도.”

꽤 성가신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구나.

순진하게 웃으면서 아군에게도 독을 건네줄 수 있을 것 같은 저런 사람을.

“……전하.”

“응?”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남아 전하의 편이 되어 드릴까요?”

내 말에 카이사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피로해 보이는 그 얼굴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한참 말이 없던 카이사르는, 결국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헬레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돼. 난 헬레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니까.”

“선택하지 않는다고요?”

“귀찮아하잖아. 이런 거.”

그래, 귀찮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시하다.

뭘 해도 흥미가 없다. 의욕이 나질 않는다. 무료하다.

하지만.

“카이사르.”

내 나직한 목소리에 카이사르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선택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거야.”

널 제자로 들인 것도, 너를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한 것도, 네 곁에 있어 주기로 한 것도, 모두.

“제자님이야말로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 스승님이 도와줄게.”

왜냐하면 네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전혀 귀찮거나 무료하지 않거든.

내 말에 카이사르가 자조했다. 괴로운 듯 웃다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뭐, 그래. 말문이 막힐 만큼 내게 고맙다 이거잖아. 부끄러워하기는. 그냥 들은 셈 쳐 줄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저 그의 곁을 지켰다.

로위나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긴 시간을, 그저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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